가을 어느 날

by Rainsonata

2012년 9월 14일


이야기 하나 - 요즘 꾸준히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네 살부터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 아직도 우리 동네 언덕바지에 있던 피아노 선생님 댁과 이층으로 통한 좁은 계단이 내 기억 속에 뚜렷하다. 초등학교 6학년쯤 피아노 치는 게 시들하다고 느껴졌을 때, 엄마는 단칼에 그만두라고 말씀하셨다. 아마 엄마가 등 떠밀어 다닌 피아노 학원이었다면, 불혹을 앞둔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이렇게 좋은 취미로 즐길 수 없었을 것 같다. 엄마 감사합니다.


이야기 둘 - <전교 1등 하라고 밤새 골프채로 200대를 때린 어머니를 살해한 고교생 아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판결을 내린 판사>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때린 엄마와 맞은 아들, 엄마를 살해한 아들과 아들에게 살해당한 엄마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엄마는 아들을 때렸다. 아들을 때려서라도 전교 1등이라는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서. 아들이 엄마를 죽였다. 자신의 삶을 되찾아야겠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아. 슬프다. 나도 한 아이의 엄마이기에 더욱 아프다.


이야기 셋 - 가을맞이 대청소를 하면서, 뒤뜰이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이층에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는 공부방을 마련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창문을 열고 가을 공기를 맡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아마 요즘 이곳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지 싶다. 아침에 명상음악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할머니께 향을 피우는 일도 이곳에서 하고 있다. 어제는 마음이 울적해서 할머니의 유품을 하나씩 꺼내어 보았다. 유품은 아래와 같다.


(아주 옛날부터 할머니께서 손수 게양하셨던 우리나라 태극기, 할머니의 유서, 할머니 냄새가 베인 옷감, 가족관계 증명서, 사망진단서, 묘비명 신청서, 할머니 핸드폰 마지막 청구서, 할머니가 나 주려고 종이에 쌓아두신 네 입 크로버, 할머니가 써주신 편지들, 한국에서 5000원 신권 나왔을 때 나 주시려고 열 장 담아두신 돈봉투, 할머니 여권, 할머니 Morning Calm 카드, 손톱깎기, 곱게 묶어두신 리본 두 줄, 문갑에 넣어두셨던 玉蘭香, 할머니 필체가 담긴 전화번호부, 이쑤시개, 부채, 삼성의료원 마지막 외래진료 예약증, 장례식 주차권, 할머니 약수저, 할머니 찻잔, 할머니가 코팅해두신 우리 남편의 첫 직장 명함, 새 깃털 두 개, 두루마기 한 벌)


이야기 넷 - 사무치게 그립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사무치다는 뜻은 "속까지 깊이 미치어 닿다" 또는 "속 깊이 통한다" 또는 "속 깊이 스며든다"라고 한다. 머릿속으로 되뇔수록 사무치다는 말은 그 감정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듯하다. 사무치다는 말을 떠올리면 명치끝이 저절로 아려오는 이유도 그 때문이리라.


이야기 다섯 - 법정스님께서는 <미리 쓰는 유서>에 이렇게 쓰셨다.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고 싶다. 누가 뭐라 한데도 모국어에 대한 애착 때문에 나는 이 나라를 버릴 수 없다." 나 또한 스님 말씀을 100% 공감한다. 최근에 읽은 송수권 시인의 <여승>이라는 작품 중,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 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라는 표현을 만나면 나는 1000% 한글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글을 읽을 때마다 매 번 감사하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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