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나는야, 추녀(秋女)

by taesu

며칠째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파란 하늘이다.

비가 가을을 재촉했는지 어느새 바람은 차갑고,

동네 어귀에 감나무 집의 감이 익어간다.

(성질 급한 놈은 저 혼자 벌써 익어버려

까치밥 신세가 되기도 한다. )


이렇게도 계절이라는 것은 정직하고도

성실하게 다가온다.


다음 주면 벌써 첫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다.

폭염과 폭우를 반복하던 여름과 더운 추석,

그리고 때늦은 태풍이 지나며 기후 위기가

더는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싶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찬바람이 불어오고,

노랗고 빨간 단풍이 들고, 감나무는 익어간다.


가을에는 나무들도 옷을 갈아입느라 바쁘지만

전업주부도 여간 바쁜 것이 아니다.


더는 미룰 수 없는 여름옷 정리를 시작으로

에어컨 필터 청소를 하고,

에어컨 리모컨도 잃어버리지 않게 챙겨두고,

방한복도 꺼내놔야지.


얇은 이불을 집어넣고 담요와 차렵이불,

온수매트도 꺼내 세탁하고

식구들의 침대마다 갈아줘야 한다.


테라스의 화분들도 들여놔야 하는데,

보면 볼수록 할 일투성이지만 일단은 멈추자.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콩쥐도 커피 한 잔은 해야지.

에라 모르겠다, 슬리퍼를 끌고 동네 단골 카페로 간다.


단독주택을 개조한 이 카페는

1층도 좋고, 2층도 좋지만,

가을이면 카페 마당이 명당이다.


감나무 아래 노란 테이블들,

아무렇게나 벽을 타고 자란 덩굴들.

필요 이상의 잡담을 하지 않는 카페 운영자와

(이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커피 나왔습니다.

결제하겠습니다. 이외의 말은 하지 않음)

거슬리지 않는 음악까지.


따듯한 커피 한 잔 받아 들고

카페 마당 한쪽에 자리 잡고 앉아

감나무를 보며 가을을 즐긴다.


코끝을 스치는 고소한 커피 향,

입안에 맴도는 기분 좋은 쌉싸름함,

목을 타고 넘어갈 때 따뜻한 느낌까지,

커피 만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오감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게

또 어디 있을까!


비록 한 시간 뒤엔 돌아가고 있는 세탁기가

빨리 건조기로 넣어달라며 알람을 울리고,

토크 폭격기 딸아이의 학원 라이딩을 위해

달려야 하는 콩쥐신세지만,

감나무 아래 있는 이 순간만은

나는야, 추녀((秋女)란 말이지.


몇 번이나 더 이 파란 하늘을,

청량한 바람을 느낄 수 있을까,

아무리 바빠도 이 귀한 계절을 부지런히 즐겨야지.

그리고 다가올 새로운 계절을

반갑게 맞이해야지.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들을 만들어 먹고, 먹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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