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대구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 그곳에서 태양** 박사장.
그게 아빠의 이름이었다.
(한 때는 장사가 꽤나 잘 되었다고 한다.)
아빠가 장사가 잘 될 때에는 시장사람들은 할머니가 장을 보러 오면
"아이고, 박사장 어무이 나오셨는교~"
하고 나와 아는 체를 했고, 할머니는 그 시선을 즐기 러 굳이 큰 시장까지 장을 보러 다녔다.
옷이 필요하면 옷가게에서 운동화가 필요하면
시장에 신발가게에서,
아빠가게 이름을 말하고 가지고 오면 됐다.
목욕탕에서도 문구점에서도 우리는 태양** 박사장이 요-라고 하면 됐다.
첫째 형이 어린 나이에 문둥병으로 죽고, 차남이던 아 빠는 장남이 되었다고 한다.
큰 아들을 문둥병으로 잃은 할머니는 둘째였던 아빠를 금이야 옥이 야 키웠다고 한다.
해달라는 것을 다해주고, 모자란 것 없이 하고 싶은 것을 다하면서.
그런 아빠는 서른이 되기도 전에 장사를 시작해 박사장 소리를 들었고,
곧 죽어도 누구 밑에 들어가서 일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여성편력이 심해 8살이나 어린 엄마를 두고도 다른 여 자를 만났다.
애초에 고등학생이던 엄마를 꾀어낸 것은 아빠 쪽일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근본도 없는 새파랗게 어린년이
멀쩡한 내 새끼를 꼬셔서 신세를 조졌다며 엄마를 욕 했다.
(무능력하고 바람을 피우는 남편, 그런 자기 아들을 혼 내기는커녕 남편 마음을 못 잡는다며
오히려 자신을 탓하는 안하무인 시어머니. 어쩌면 엄마의 가출은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아빠는 장사를 한다며 트럭을 끌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더벅머리에 야상을 입고, 통기타를 들고.
방랑시인처럼 전국을 돌아다니며 버는 돈보다 쓰는 돈 이 많았고,
언변이 좋았던 터라 전국 곳곳에 애인을 두고 살았다.
할머니가 오시고 짧으면 2주에 한 번, 길면 한 달에 한 번 집에 왔다.
언니는 아빠를 우리 아빠가 아니라 내 아빠라고 불렀다.
내가 아빠 곁에 가기라도 하면 무섭게 쏘아보았다.
5살 터울의 남동생은 아기라 괜찮지만 3살 터울에 나는 안 되는 일.
아빠를 나눠가지는 것이었다.
아빠가 손짓으로 나를 부르기만 해도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떨어뜨렸다.
아빠가 오는 날이면 언니는 아빠 무릎을 차지하고 앉아 쫑알쫑알 수다를 떨었다.
남동생은 아빠 등 뒤에서 목을 끌어안고 장난을 쳤다.
하하 호호 웃는 그들을 뒤로하고 나는 할머니를 따라 가 밥을 푸고 수저를 놓고, 냄비받침을 깔았다.
밥을 먹고 나면 아빠는 기타를 꺼내 이연실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 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엄마 일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 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 먹었다오.
아빠는 그런 사람이었다.
엄마 없는 아이 셋을 앞에 두고 엄마를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는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