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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나무 Jul 14. 2020

비 오는 아침


비오는 날 아침이었다. 여느 때 처럼 평화로운 아침일거라고 예상했다. 다만, 월요일이라서 짐이 약간 많았다. 딸의 어린이집 가방, 낮잠 이불, 꼭 선생님께 읽어달라고 할거라는 자기 덩치만한 그림책, 그리고 나의 가방. 여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무거웠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플라스틱 쓰레기가 가득찬 베란다가 거슬리기 시작한다. 짐이 이미 많은데, 저걸 버리고 직장에 무사히 출근할 수 있을까? 약간의 오차를 감안해서 계산해본다. 시간상으로는 문제가 없다. 다만, 비가 오고 있다는 것이 사소한 문제. 베란다로 흘낏 보니, 약간의 이슬비가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정도면 문제 없겠어. 베란다에서 플라스틱이 들어있는 비닐봉지를 들고와 현관 앞에 대기시켰다. 이제 딸이 옷만 잘 입어주면 바로 출근할 수 있는 평온한 시간이다.


"엄마, 나 오늘 원피스 안 입을래."

분홍색 원피스를 다 갖춰입고 고양이 머리띠까지 맨 아이가 말했다.

"왜? 그 원피스 좋아하잖아."

나는 갑자기 시간이 빠르게 가고 있음을 느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몰려온다.

"어제 이모가 준 아기상어 티셔츠 입고싶어."

"아, 그 변신 티셔츠? 지금? 지금 나가야 해."

나는 친절하게 아이를 설득했다.

"그거 친구들한테 보여주고 싶단 말이야."

비와 아이의 상태가 무슨상관인가 순간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너그럽게 고쳐먹었다. 그래, 비가 오는 날에는 마음이 변할 수 있지.

"그러면 빨리 갈아입으렴."

아이는 나에게 다가와 원피스 지퍼를 내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스팽글 티셔츠를 찾아달라고 했다. 그리고 바지를 다른 색으로 맞춰입고 싶다며 한참을 또 찾았다. 양말 색깔도 바꿔야 한다며 형광주황색을 찾았다. 내 배 아파서 낳은 귀엽고 깜찍한 내 자식이지만 순간, 왜 자기자식도 부모가 미워하는 순간이 있는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은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이는 오늘의 변덕이 매우 만족스러웠는지 콧노래를 오르며 옷을 갈아입었다. 시간은 더욱 빠르게 흘러가는것 같았고, 쓰레기를 버리지 말까 어떡하지, 안버리면 베란다에 벌레가 꼬일텐데. 일단 빨리 나가는것만이 방법인데.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옷을 다 입은 줄 알았던 아이가 우비를 입고 나왔다.

"우비는 뭐니?"

"오늘 선생님이 비온다고 하셨어."

"아...그거 이슬비야. 그냥 가도 돼.."

우리 아이가 비오는 날을 기다리는 이유가 우비와 장화 때문인것을 내가 왜 모르는가. 우비의 지퍼를 올려줄 마음의 여유도 없는 내가 문제라는것을 내가 잘 알고 있다. 출근시간까지 아직 물론 시간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여유분에 못미친다는 것 뿐.

"비오잖아."

아이는 완강했다. 그래. 비가 오지. 오늘따라 양보라는것을 머릿속에서 꺼내 어느 바위에 갖다 말린것 같은 딸아이를 꺾을 수가 없었다. 우비를 입히고 장화를 신겼다. 자, 이제 출근이다.

"행운의 여신~ 어린이집 갑시다~ 출바알~"

영혼까지 끌어모아 밝게 현관문을 열었다.


오른손에는 내 가방과 아이의 낮잠 가방과 어린이집 가방을. 왼손에는 플라스틱 분리수거 비닐을. 그리고 평소에 내 손을 잡고 엘베 없는 4층 계단을 내려가던 꼬맹이는 오늘은 스스로 난간을 잡고 내려가기로 한다.


이미 현관문을 여는 순간 퇴근하고 싶어 졌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문을 닫고 딸내미를 보니 장화를 바꿔신었다.

손에 들었던걸 다 내려놓고 그 좁은 입구에서 장화의 좌우를 바꿔준다. 자자. 아직까지 순조롭다. 이정도는 별 거 아니야.


1층까지 내려와 차 문만 열고 아이와 가방을 태우면 모든 것이 끝이다. 1층에 내려왔다. 지하주차장이 없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 4층에서 내려온 나의 모습은 스니커즈를 신고 계룡산 금잔디바위를 올라갔다가 내려온 대학교 4학년때의 무모한 나를 보는 듯 했다.


다소곳이 나를 기다리는 자동차. 그리고 이슬비인줄 알았던 비는 제법 장대비였다.

차문을 열려고 하는데, 아무런 작동이 없는 야속한 자동차, 나는 순간 머릿속 필라멘트가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래 나는 4층 집에 차키를 두고 왔구나. 그러나 젖으면 안 되는 것도 같이 들고 내려왔구나. 다섯 살 딸은 우비를 입어서 심기가 불편하진 않구나.


여기까지 사태 파악을 한 나는 쓰레기만 차 옆에 남겨놓은 채 딸의 손을 붙들고 다시 4층으로 올라갔다. 겨우 4층인데 고산병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딸은 첨벙첨벙을 해야 하는데 왜 뭘 놓고 왔냐며 투덜댔다.


간신히 4층에 도착해 비 맞은 생쥐꼴로 현관문을 열고 어제 외출 때 맸던 가방을 뒤져 키링을 찾아내는 승리의 순간! 나는 마스크를 챙기지 않았던 것도 생각해 낸다. 엄청난 발견이다. 나하나 딸 하나 채우고 문도 두 번씩 잠금장치 확인하고 다시 가방과 어린이집 가방과 낮잠이불을 끙끙대며 들고 내려 온다. 낮잠이불과 내 가방은 이미 젖었고 오늘 아침에 감은 머리도 이미 방금 감았대도 어색하지 않을 비쥬얼을 자랑한다. 그래도 다행히 다시 차로 돌아왔다.


약간 신난 아이를 잘 달래 차에 태우고 낮잠이불과 가방을 욱여넣고 플라스틱 재활용품은 트렁크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는다.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켜니 여기가 천국이었다. 하지만 출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쓰레기도 버려야 했다.

단지 내를 운전해서 분리수거장에 갔다. 식물 쓰레기 냄새가 역하게 올라온다. 막걸리 냄새가 진하게 밴 플라스틱 통. 고양이가 처마밑에서 비를 피하면서 "왔수?" 라는 표정으로 나를 스캔한다. 나는 비닐 끝 부분을 들고 플라스틱을 넣는 통에 쓰레기를 탈탈 털었다. 이렇게 막걸리 냄새를 보탰다. 그리고 비닐은 잘 구겨서 양념이 엉겨붙은 채로 버려져 있는 비닐통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았다. 에어컨을 2단으로 올리고 시동을 걸고 아이의 어린이집으로 출발했다. 아이는 핑크퐁 동요를 틀어달라고 했다. 열몇 번의 클릭 끝에 낡은 쏘울은 힘겹게 핑크퐁 동요를 재생했다.


아이는 비 오는 풍경과 핑크퐁 동요와 우비의 삼합이 만족스러운 듯 콧노래를 불렀다.


엄마 안녕히 다녀오세요.


아이는 만족스럽게 어린이집 등원을 마쳤다. 나도 다시 차를 운전해 나의 직장인 학교로 갔다.


지각은 아니지만 급히 내리는 바람에 내가 아끼는 린넨 원피스의 겨드랑 소매가 북 찢어졌다.

트렁크엔 우산도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나는 당황하지 않고 오늘은 판서를 최소화하리라 마음먹으며 비를 맞으며 뛰어갔다.

현관문 앞에 서서야 나는 깜짝 놀랐다. 거울 속에 비친 거대한 아줌마 한 명. 앞머리에 둘둘 말아놓은 헤어롤도 다 젖어버린 비 오는 아침이라니.


곧 머릿니가 생길 것 같은 머리 꼴로 정시출근 완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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