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빅이슈를 사는 착한 나에 취했던 걸까

근데 혹시 이거 재고처리 하신 건가요...?

by 래인

가끔 빅판에게서 잡지 <빅이슈>를 산다. 처음엔 4천 원이었던 가격이 5천 원, 7천 원이 되더니 이제는 1만 2천 원이 되었다. 물가가 오른 만큼 잡지 값도 당연히 오를 테지만, 월급 빼고 다 오르는 무자비한 고공행진 속 얇아지는 지갑이 걱정이다. 소소한 일상 속 호의마저 주저하게 만드니, 괜히 입안이 쓰다.


물론 정기구독으로 빅이슈를 살 수도 있다. 그게 더 안정적인 방식이라 빅이슈 입장에선 환영하고 싶을 테지. 하지만 내가 굳이 오프라인에서 빅판에게 직접 사는 건, 그들의 존엄한 노력에 대한 존중을 면대면으로 표현하고 싶어서다.

굳이 빅판에게 빅이슈를 직접 사는 건, 그들의 존엄한 노력에 대한 존중을 면대면으로 표현하고 싶어서다.


인사와 인사가 오가고, 카드와 잡지가 건네지는 그 순간, '홈리스'라는 굴레를 끊고 스스로 서려는 한 인간의 분투 앞에, 나는 작은 응원의 마음을 건넬 수 있다. 그리고 잡지를 내게 건네는 빅판의 표정에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는 자부심을 함께 느낀다. 그 짧은 유대가 내겐 꼭 필요한 과정처럼 여겨졌다.


얼마 전에도 그랬다. 한 지하철역 입구에서 빅판을 마주쳤고 평소처럼 카드를 내밀었는데, 결제 단말기가 없다신다. 카드지갑을 뒤져보니 현금이라곤 5만 원짜리 지폐 한 장뿐. 내가 건넨 5만 원을 본 빅판은 자신의 낡은 갈색 지갑을 꺼내 거스름돈을 끌어 모아보았지만 3만 8천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다이소로 달려가 5만원권을 깨고 당당히 1만 2천원을 건넸다.


모처럼 온 손님인 듯한 내가 이대로 그냥 떠나버리면 어떡하나 노심초사하고 계신 건 아닐까? 검게 그을린 빅판의 얼굴 뒤로 마침 다이소 매장이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하고 냉큼 뛰어 들어가 천 원짜리 소품을 사며 지폐를 바꿨다. 그리고 당당히 1만 2천 원을 건네고 잡지를 받아 들었다. “많이 파세요!”라며 부러 한 톤 높인 쾌활한 인사까지 덧붙여서.

출처: 빅이슈 홈페이지


그렇게 빅판을 가방에 넣고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는 길이 꽤 유쾌했다. 그런데 잠시 후, 가방 속 잡지를 꺼내 포장을 뜯는 순간 당황스러운 기분이 밀려왔다. 내가 받은 빅이슈는 두 달 전의 것이었다.

순간 당황스러운 기분이 밀려왔다. 내가 받은 빅이슈가 두 달 전의 것이었기에.


순간 씁쓸했다. 내가 존중과 응원을 전하고 싶어 현금까지 바꿔가며 보여준 선의가, 어쩐지 재고를 떠 넘겨받는 일로 돌아온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사실 빅판에게 “최신호로 주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은 건 나였다. 다만 그동안 만난 빅판들이 으레 늘 최신호를 건네주셨기에, 굳이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과월호를 권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건 보통 최신호를 내어주고 나서였다. 그래서 ‘최신호가 기본’이라는 나름의 경험칙이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 기묘한 불편함을 곱씹다 보니 씁쓸함의 이유가 조금 선명해졌다. 나는 대가 없는 선의를 건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선의가 ‘내가 기대한 방식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내가 표현한 그에 대한 응원이 나에 대한 고마움으로 확인되기를, 존중이 존중으로 답해지기를 바랐던 모양이다. 결국 나도 보답을 바라는 마음으로 선의를 건넨 셈이다.


선의를 건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보답받고 싶었던걸까?


그렇다면 내 마음은 진짜 선의였을까? 혹은, 더 나은 위치에 있음을 확인하며 베푸는 자기만족에 불과했을까? 그저 “내가 이렇게 의식 있는 사람이다"라는 우쭐대는 심정의 표현은 아니었을까?


마주하기 불편한 이 '선의'의 진실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 의도가 그리 순수하지 않을지 모른다. 누군가에게 주는 나의 감정에는 늘 크고 작은 기대가 섞여 있고, 때로는 내가 더 나은 처지임을 확인하는 은근한 우월감마저 깃들어있는, 불순물이 잔뜩 낀 어떤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끗한 선이 아닐지 몰라도,
그 모양이라도 흉내내는 것마저 의미 없다 할 순 없진 않을까.

하지만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위선도 선이다'라고 했던가. 깨끗한 선은 아닐지 몰라도, 선의 모양이라도 흉내 내는 것마저 의미 없다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앞으로도 길에서 빅판을 만나면 빅이슈를 사곤 할 테다. 완벽하게 순수하지 않더라도, 서로의 손길을 통해 건네지는 그 짧은 순간만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기에, 그리고 의도가 무엇이 되었든 그날 빅판의 매출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줄 테니 말이다.


그래,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때론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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