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함의 강박에서 연결에 대한 믿음으로
어릴 적의 세상은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가 아주 오래전이라 그 시절의 혼란과 고통이 희석되었기 때문일까? 분명 당시의 세상은 명쾌했다. 학교에 가면 '이것이 정답이다'라는 지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열심히 듣고, 이해하거나 외우면 되었고, 때가 되면 치르는 시험에서 그 이해와 암기의 결과를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 성과는 명확한 숫자나 등급으로 나타났다.
그렇게 소화 가능한 지식으로서 정보들만이 존재하던, 납작한 단층의 세계에 살던 나는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며 입체적이고 겹겹이 쌓여 있는, 복잡한 의미의 세계에 들어섰다.
토끼굴로 들어선 앨리스는 끝 모를 곳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토끼굴을 통과해 원더랜드에 뚝 떨어져 버린 앨리스처럼 혼란에 빠졌다. 웬만큼의 노력을 기울이면 명쾌하고 간결하게 정리되곤 했던 세계는 더 이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도 잡히지 않는 아득한 미지의 영역이었다.
미지는 곧 나를 불안으로 이끌었다. 만사를 나의 언어와 시각으로 소화해 정의 내릴 수 있었던, 질서 정연했던 세계는 온데간데없었다. 가장 먼저는 내 지적 역량이 부족한 탓일까 고민했다. 나보다 뛰어난 지능과 지혜를 가지고 있는 누군가에겐 이렇게 어려운 세상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도 했다.
공부를 더 해야 한다, 독서를 더 해야 한다 등과 같은 자기 계발에의 조급함이 생겨났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에게 직장 생활만으로도 버거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사실은 못하는-스스로를 자책하는 시간만 늘어났을 뿐이었다.
그때의 난 고고한 백조처럼 보였을까. 아니면 여유 없는 하룻강아지였을까.
불안과 두려움, 막막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물밑으로는 더 발버둥 치며 짐짓 태연한 듯, 모든 것을 다 핸들링할 수 있는 듯 자신만만하게 굴었다. 그만큼 내 속의 초초한 불안은 더욱 바닥 없이 깊어져 갔다.
마침내 그 불안이 공황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내 삶에 던져졌을 때, 사실 처음에는 그 연관성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꽤나 단단한 멘탈이라고 자부했기에, 세상을 자신만만하게 살아왔고 그에 걸맞은 성과도 종종 거두었기에, 공황이라는 증상은 패배자, 약자의 증거 같았다.
하지만 당장 비행기나 작은 유람선조차 탈 수 없을 정도의 불안증세가 심해지자 이건 정신력이 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물론 이 불편 또한 ‘업무에 지장’이 되었기에 필요를 느꼈던 점이 지독하게도 나다웠기에, 나중에 돌아보니 우습기도 했다.
짧지 않은 시간 전문의의 조력을 받으며 나를 점검할 수 있었다. 가장 큰 깨달음은 불안과 좌절마저 나의 감정이기에 그대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객관적인 태도, 즉 메타인지적 태도였다.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무엇이 막막한지와 같이 내 속의 공백과 한계, 불확실성의 영역을 불안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됐다. 그리고 이 메타인지적 태도는 복잡하고도 불확실한 세상 속에 내가 살아나갈 법을 알려주었다.
예전엔 모르는 상태가 불안했고 이를 최대한 빨리 해소하고 싶었기에 ‘모든 걸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을 느꼈다. 심지어 그게 강박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주로 전전긍긍하며 모든 내용을 다 기록하려고 드는 식이었다. (그렇다고 기록한 것을 그렇게 열심히 복기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이 잘 이해되지 않을 때면 곧잘 초조해졌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내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명확히 구별하고 있는지, 그래서 모르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 나갈지가 중요했다. 모르는 상태 또한 자연스럽고 필요한 과정이었다. 일부만 이해하거나 혹은 전혀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더 이상 명쾌한 정보를 양적으로 얼마나 축적하고 있는지가 아닌, 불명확하게 흩어진 수많은 정보들이 연결되어 갖게 되는 '의미'를 파악해 내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이젠 모든 것이 파악가능한 작은 세계가 아닌, 미지의 것들이 한없이 펼쳐진 원드랜드가 나의 세계였다.
지금은 완벽히 이해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맥락 속에서 드러나는 것들이 있음을, 불완전한 경험들이 쌓여 점차 의미를 만들어 가는, 연결의 힘을 믿는 것, 그것이 첫 걸음이었다.
모든 것을 알려고 드는 대신, 언젠가 연결되는 순간을 믿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제야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