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 정국
뽑을 사람 없다는 말, 요새 들어 부쩍 많이 들린다. 괜히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정 나이의 모든 국민은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선거권과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을 갖는다. 그런데 모두가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 행위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을 터이다. 정치에 뜻을 품은 일부 집단, 곧 우리가 정치인이라 부르는 이들만이 보통 피선거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며 대선이건 총선이건 출마하곤 한다. 말인즉슨, 나머지 국민은 매우 한정된 풀 안에서 무려 한 나라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는 뜻이다. 소수의 정치인들이 개개인의 의견을 완벽히 대변하리란 보장이 없다. 대의민주제의 몇 안 되는 단점 중 하나다.
괜찮은 사람들만 선거에 나오면 다행이겠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3월 대선 정국만 봐도 그렇다. 각각의 후보들은 쉬이 넘기기 힘든 결함을 빠짐없이 가지고 있다. 확실한 본인들만의 공약도 부재한다. 누가 이 부분에 대해 짚고 넘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누군가가 비슷한 얘기를 꺼낸다. 지조 없이 여론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형국에서 인기 영합주의, 포퓰리즘의 색채가 짙게 묻어난다.
그래서 그런지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관심을 아예 두지 않는 층들이 늘어났다. 이들을 두고 일각에서는 회색분자라 칭하는데, 썩 마음에 드는 단어는 아니다. 단어의 의미 자체에 좌냐 우냐 고르라는 의도가 내포되어있는 전형적인 흑백논리요 진영논리에 의한 폭압적 표현이다. 필자도 현재는 회색분자라 할 수 있다. 정치색이 뚜렷하지 않다. 해서 필자가 선거일에 하라는 투표는 안 하고 헌법 전문에 명시된 민주 이념을 괄시하는, 건강하지 못한 국민인가?
아니다. 회색분자가 된 데에 거창한 이유는 없다. 정말 뽑을 사람이 없어서다. 국정운영 전반에 대한 뚜렷한 비전없이 오로지 선거에 이기기 위해 서로 네거티브만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진정성을 느낄까.
새로운 지도자를 갈구한다. 해묵은 이념 갈등에서 벗어나, 각각의 사회 문제에 부합하는 맞춤형 해결 방안을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리더, 기성정당의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강을 펼 줄 아는 진취적인 리더, 고루한 사고에서 탈피하여 전 연령층과 벽 없이 소통하는 젊은 리더의 탄생을 바란다.
하지만 해방 이후 보수와 진보라는 두 줄기를 중심으로 성장한 한국 현대 정당사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신인물이 등장하기엔 우리 정치 환경이 척박하기 그지없다. 거대 양당 위주로 돌아가는 시스템도 문제지만, 대다수 국민이 그 시스템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보수화되었다. 어쩌면 변화는 아래에서 먼저 이행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치 2017년 프랑스 대선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현 프랑스 대통령의 ‘앙 마르슈(En Marche !, 현 르네상스)’가 기존 좌우 여야를 꺾고 당당히 중앙 무대에 선 것처럼 말이다. 이변의 바탕에는 구태 정치에 환멸을 느낀 수많은 프랑스 국민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다.
90년대 후반은 386세대(30대 · 80년대 학번 · 60년대생) 정치인들이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젊고 개혁적인 이미지로 큰 반향을 일으키던 세력이다. 이제는 세월이 지나 '586'이 되어 현 정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지금으로 봐선 어째 그들이 바라던 세상은 다시금 미래 세대의 숙제로 남겨진 듯 보인다.
* 본 주제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으신 분은 최장집 교수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후마니타스, 2010)> 를 권해드립니다.
* 사진 출처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