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_page 4 : 이름. 믿음과 의심.
"끝에 다다랐지만 처음으로 되돌아가 보자."
영화 'Life of Pi' 감상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를 할 차례가 되었다. 파이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을 두드려 신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내피와 외피가 다른 한 벌의 외투처럼 스토리 바깥면과 안쪽면이 다른 천으로 겹쳐져 있는 영화였기에 더욱 궁금했다. 표류하는 보트 안에 사람과 호랑이를 같이 태우고 흘려보내는 독특한 이야기의 외투 안쪽을 들춰보면 파이와 파커로 대변되는 내면적 존재 또한 심하게 표류하는 모습이 새겨진 내피가 만져졌고, 그것이 지난 감상의 주된 내용이었다. 작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마치 셰프가 굽기와 삶기처럼 서로 다른 두 가지 조리법으로 음식에 두 가지 층위의 레이어를 입히듯 영화의 메시지를 복합적으로 겹쳐 익혀내고 있었다. 생존이란 조리법은 원래대로라면 잘 섞이지 않는 본능과 이성이란 두 가지 재료가 시간이 흐를수록 어떻게 하나로 혼합되는지를 보여주었다면 요리 가장 안쪽엔 신과 종교에 대한 질문이라는 레이어를 하나 더 숨겨두고 있었다.
이제 가장 깊숙한 곳에 조심스럽게 담겨 있던 육즙을 차분히 음미해보려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지만 잠시 멈추고 처음으로 살짝 되돌아가 보자. 영화에 대해 그동안 했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본다. 잔잔하고도 아름다운,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잘 짜여진 영상미, 그리고 정말 매력적이었던 비유와 상징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앞서 언급했던 인간 내면의 갈등 스토리는 마치 이솝 이야기의 우화처럼 우리 자신과 인간이란 존재를 돌아보는 시간을 선사했다. 이것이 영화에서 뽑아낸 세 가지 감상 포인트이기도 했다.
마지막 남은 이야기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앞으로 펼쳐질 남은 이야기는 마지막으로 남은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앞서 말한 세 가지 측면을 모두 담아내고 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비유들 위의 비유이기도 하고, 이야기 전체의 엠블럼이기도 한 '파이(π)'는 출발점이자 종착점이기도 하다. 소수점 아래로 무한한 숫자가 이어지는 수들의 대표성도 가지고 있으면서 중요한 수식에 참 많이 등장하는 기호이기도 한 파이(π)는 확실히, 그리고 여전히 신비로움을 간직한 수학적 실체이자 상징이다. 그렇게 수학적 파이(π)의 특성을 끌고왔지만 작가는 그에 더해 인간과 종교에 대한 고찰까지 그 안에 녹여내고자 했다. 파이(π)가 지닌 아름다움은 덤이다.
감상_page 4.
이름. 믿음과 의심.
너의 이름은... 'π(Pi)'
영화는 '파이 이야기'라는 소설이 원작이다. 작가가 제목을 먼저 선정하고 소설의 스토리를 그려냈는지, 아님 반대로 소설의 스토리가 나오고 나서 적합한 주인공의 이름을 찾아 부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순서와 별개로 주인공의 이름 '파이(π)'는 이야기에도 메시지에도 정말 찰떡이다. 이안 감독 역시 주인공으로 열연한 Suraj Sharma(수라즈 샤르마)를 발굴하기 위해 신인 배우 3천 명의 오디션을 봤다고 하니 주인공도, 주인공의 이름도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선택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왜 그토록 이름이 중요했을까. 영화 초반 이름과 관련된 재밌는 에피소드부터 시작되는 장면은 마치 이후 전개될 내용의 트레일러처럼 보일 정도다. 파이라는 이름에 부여하는 의미가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만큼 스토리 전체를 함축해서 표현하기에 아주 적합한 제목이자, 한편으론 메시지를 담아낼 충분한 공간을 가진 이름이었으며, 다양한 인생사를 대변할 수 있는 대표성까지 지니고 있었다. 대중적이면서도 신비함을 간직한 이름 파이(π). 이 이상 적합한 주인공 이름을 찾아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잘 선택된 이름이었다.
다만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이름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영화에선 의미를 부여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이름이기 때문이다. 소설가도 이름이 없으며, 요리사, 불교 신자, 선박회사 직원들도 이름이 없다. 그들은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등장인물 1, 2니까 이름을 부여하지 않은 걸까. 그렇다면 파이의 어린 시절 중요한 가르침을 주었다고 그려진 마마지 삼촌은 어떤가. 그는 심지어 파이의 이름에 지대하게 관여한 사람이기도 하며, 소설가가 파이를 만날 수 있게 중재한 핵심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사람들이 부르는 대중적인 호칭 '마마지 삼촌'만이 남았다. 심지어 그는 삼촌도 아니다. 아버지의 친구일 뿐이다. 그런 그를 부르는 별칭을 ‘마마지’라 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이름 자체가 본질을 대변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무한의 정원으로 들어가보자.
3.14라는 숫자로 잘 알려진 원주율 파이는 다들 알듯 3.14 뒤로도 숫자가 끝없이 이어진다. 신기하게도 반복되지 않는다. 2025년 기준 소수점 아래 300조 이상의 자리까지 밝혀졌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은 더 나은 컴퓨터가 나오면 얼마든지 갱신될 수 있다. 어쩌면 작가는 주인공의 이름에 스스로 부여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상상력이 담길 수 있는 공간까지 고려했을지도 모르겠다. 무한을 의미하기도 하는 파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무엇인가를 채우기에 참 적당한 공간이 된다. 그래서 마음껏 상상해보기로 했다.
9가 연속으로 6번 이어진다는 762번째 자리는 유명한 과학자 파인만이 외우고 다녔다는 일화와도 연결되는 파인만 포인트로도 불리운다.(영화의 주인공은 그보다 더 길게 외워 학교 전체를 놀라게 했다.) 실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8자리의 숫자(자연수) 정도는 현재까지 발견된 파이의 숫자 배열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이를 확인할 수 있는 사이트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파인만 포인트보다 더 긴 99999999(9가 8번 연속)가 나오는 자리는 소수점 아래 66,780,105번째 자리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대한민국 국민들에겐 모두 13자리의 주민번호가 부여되듯 한 명 한 명에게 겹치지 않는 숫자를 부여할 수 있다면 해당 숫자는 각 개개인을 상징하는 숫자가 될 것이며 숫자의 나라에서 해당 숫자는 각각의 존재를 가리키게 된다. 그런데 파이의 소수점 아래 이어지는 숫자들은 논리적으로 그 모든 숫자를 포함하고 있으니 파이는 모든 사람들을 다 포함하는 상징적 기호가 될 수 있다. 파이라는 이름 아래 지구상 모든 사람들을 다 담아도 공간이 남는다. 크리슈나의 입에서 우주가 펼쳐진다는 이야기는 담요를 뒤집어쓴 어린 파이의 온 마음을 사로잡았지 않았나.
무한의 성은 이해할 수 있는 복도와 이해할 수 없는 복도가 이어져 있다.
파이(π)의 본래적 의미는 원의 지름과 원주(원둘레)와의 비율을 의미한다. 도대체 원의 지름과 원주의 비율이 뭐길래 단순하기 그지없는 두 길이의 비율이 놀랍게도 수학과 물리학의 중요한 자리에서 어김없이 등장하고 우리의 일상은 파이를 계산하지 않고선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일까.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어 수많은 이들이 파이의 신비함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내가 지닌 수학과 물리학의 깊이는 보잘 것 없지만 원과 원의 중심을 지나는 직선을 보고 있자니 마치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는 이해할 수 있는 일(직선의 길이)과 이해할 수 없는 일(원주의 길이)의 비율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영화에선 지속적으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실질적으로 믿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저쪽에 대하여 우리가 놓은 다리와도 같다. 물론 다리가 없어도 살아갈 수는 있다. 우리가 만일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가지고서 세상을 대한다면 아마도 파이 아버지처럼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단단해 보이지만 대신 우리의 삶은 무리수가 빠진 빈틈 많은 직선처럼 변할 것이다. 결국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빼고선 우리 삶을 얘기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무리수를 부정했던 피타고라스학파 역시 무리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진 못했지 않나.
결론적으로 말해 실수(實數)가 유리수와 무리수의 총합이듯 우리의 삶, 우리의 실재(實在)는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과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의 총합이다. 그렇기에 믿음은 삶의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과학도 가슴 속에 있는 것을 가르쳐주진 못한다고 말했던 파이 어머니의 말 역시 이와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목마름이 이름이 되다. 'thirsty'
마마지 삼촌이 감동한 수영장 '피신 몰리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에 의해 '피신 몰리토 파텔'이라는 파이의 본명이 탄생했다는 스토리 자체는 다소 허무한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렇게 해서 작가는 파이가 태어난 배경이자 존재의 출발점을 '물'로 삼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이제 파이가 살아가야 할 배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배경 또한 '물'이었다. 외형적으론 바다라는 공간이었지만 내면적으론 목마름의 공간이었다.
공간을 마련했으면 이제 무대를 꾸미고 동선을 설계해야 했다. 영화 속에선 파이와 리처드 파커에 가려 살짝살짝 드러날 뿐인 이름이지만 실질적으로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이름이 있으니 바로 ‘thirsty’다. 이 이름은 파이와 파커를 연결해주는 자력선이자 철새가 보이지 않는 경로를 따라 날아가듯 전체 이야기의 경로를 이끄는 길이기도 하다.
물을 마시다 리처드 파커에 의해 잡혀온 호랑이 thirsty는 담당자의 착오로 포획자와 포획물의 이름이 뒤바뀌어 버렸으니 사건의 외형으로는 하나의 웃픈 헤프닝이며, 의미적으로는 언어학자들이 말하는 '언어 기호의 자의성'이 아주 독특하게 형성된 사례라고도 볼 수 있는데, 결국 물에서 이름을 따온 파이와 물을 마시다 잡혀서 이름을 얻게 된 리처드 파커는 thirsty라는 이름에서부터 얽히는 존재가 되었다. 확인사살처럼 영화 초반 성당의 신부는 성수를 마신 어린 파이에게 “You must be thirsty.”라고 말하며 물을 건네준다.
이름이 오디션이 되다. 'thirsty'
애초에 인간이 육체적 존재일 수만은 없듯 이 목마름은 본질적이다. 그래서 ‘thirsty’는 단순이 물이 갈급한 신체적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나 신에 대한 갈망으로도 연결되는 인간의 본질적 목마름까지 드러내고자 하는 이름이다. 알려짐과 성공이 갈급한 이들을 모아 진행하는 서바이벌 형식의 오디션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익숙하듯 이 영화는 첫 이름을 물에서 따온 파이를 육신과 영혼이 모두 메말라가는 상황 속에 던져넣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스토리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방이 물로 채워져 있는 바다라는 공간은 목마름이 가장 절실하게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했다. 한 명의 종교인으로서 물을 길으러 우물가를 찾아왔던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가 겹쳐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 목마름은 본질적이기에 합리적 이성을 대표하는 아버지에 의해 본능이 거세당하기 전까지 어린 파이는 종교를 3개씩이나 가지며 자신의 목마름을 채우고자 했었다. 하지만 요구한다고 쉽게 채워지는 갈증은 아니었다. 목마름이 본질적이듯 갈증의 해소 또한 본질적이어야 했다. 복기해보면 파이가 가졌던 목마름은 원초적인 면도 함께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때때로 본능과 잘 구별되지 않기도 하며, 미숙해 보이는 순간도 있었다. 배와 가족을 심각한 위험에 빠트리는 폭풍우가 찾아왔을 때 파이는 오히려 신을 만나는 듯한 시간처럼 즐기고 있었던 순간이 대표적이다.
종교를 많이 가지면 신을 더 쉽게 만날 수 있는 걸까? 좋아하는 색 3개를 섞는다고 더 예쁜 색이 된다는 보장이 없으며, 맛있는 음식 3가지를 섞으면 오히려 맛없어짐을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 3개의 종교가 기대처럼 쉽게 섞이지 않으리란 건 우리도 직감적으로 느끼지 않나. 어린 파이는 본질적 목마름을 따라 충실히 흘러갔으나 결국 합리성의 댐 앞에서 멈춰서야만 했고 그 이후의 삶은 무미건조해졌다. 아난디를 통해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본질적 목마름에 다시 눈뜨기 전까지는 말이다.
결국 그 갈증은 채움으로써가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을 내려놓은 뒤에서야 해소되었다. 파이는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 애써 만들어낸 모든 것, 그리고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모든 것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외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추고 싶던 내면, 삶에 대한 의지, 더 나아가선 채워달라는 욕구 자체까지 내려놓은 뒤에서야 목마름을 채워줄 물을 만날 수 있었다. 폭풍우가 아닌 ‘비’가 내리는 것으로 신은 그 목마름에 응답했다.
이해할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해주는 '믿음'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앞에서 우린 종종 쉽게 당황하거나 넘어진다. 그런데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상황 한가운데 턱하니 떨어져버린 파이였다. 다가오는 모든 상황은 감당할 수 있는 심리적 수위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였다. 터져버릴 것만 같은 정신을 붙잡고 있으려면 무언가가 필요했다. 이럴 때 구세주처럼 등장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뒤집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번역기가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믿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해주며, 종교란 이러한 믿음 위에 지어진 건축물과도 같다. 믿음이란 지붕 아래서 우린 이해할 수 없음을 새롭게 번역하고, 갈피를 잃은 마음이 쉼을 얻는다.
하지만 평안함을 건축물의 견고함을 보증하는 지표로 그대로 대입하면 곤란하다. 아기돼지 삼형제의 첫째는 짚으로 만든 집에서도 평온했다. 늑대가 오기 전까진 말이다. 이처럼 부실한 건축물에서도 평안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믿음의 함정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믿음으로 인해 스스로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거나 이해하지 못한 세상으로 한 발자국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믿음 아래 세상을 담아버려도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종교가 가진 하나의 모순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는 한편으로 환상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환상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또 하나의 창이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성에 토대를 두지 못한 믿음으로 구축한 종교는 환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현실성이 부족한 믿음은 해석의 막다른 골목에서 자신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왜곡하기 시작한다. 사이비 종교가 우리 사회에서 결코 끊어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파이 역시 극심한 심리적 고통 속에서 자신의 안식처를 종교적 믿음 아래 찾고자 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그가 거한 종교적 안식처는 어떠한 곳이었을까?
그에겐 평안이 필요했고 종교가 그 필요에 응답했다.
일본의 선박회사 직원들은 파이가 이야기하는 섬의 존재를 전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들의 반응은 한편으로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우리 역시 영화에 나오는 신비한 섬을 현실의 눈으로 보고자 애쓸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믿기 어렵다고 의미조차 없다 쉽게 단정하진 말자. 그 섬의 이야기는 사실을 담고 있었다기보다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까. 영화 앞부분엔 비슈누가 잠들면 끝없는 우주 위에 떠오르고, 이 세상과 모든 것이 그의 꿈속 허상일 뿐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비현실적 장면이 될 수 있음을 이미 말했던 것이다.
파이는 바다 위에서 자기분열에 이를 정도의 극단적인 경험을 하였다. 그에겐 무엇보다 평안이 필요했고 종교가 그 필요에 응답했다. 파도처럼 흔들리는 혼란스러운 자아가 쉴 곳은 자연스럽게 육지와 같은 곳을 떠올리게 만들었을 것이다. 인간들이 보지 못한 신의 모습을 조각해 전시하듯 파이 역시 자신의 믿음을 신비의 섬으로 형상화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파이는 어떤 믿음으로 그 섬을 구축했을까? 비슈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그것 때문에 특정 종교로 귀결시킬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애초에 파이는 다종교 신자가 아니었나. 극단에 다다른 자신의 갈등을 어떤 믿음의 섬에 정박시켰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최소한 그 섬에서 ‘안식과 평안’을 얻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는 종교의 핵심적인 특성이기도 한데 어느 종교에서나 기본적으로 종교에 귀의한 이가 느끼는 대부분의 첫 경험은 ‘안식과 평안’이다. 그리고 그 안식은 파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었다.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이제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존재가 아니었기에 신비한 섬의 낮은 둘 모두에게 안식의 공간이 될 수 있었다.
종교는 규율로, 규율은 죄의식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종교의 또 다른 특성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종교에도 규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종교라는 건축물 안에서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규율 아래에서 평가를 받고, 평가는 항상 우리를 죄의식의 방으로 이끈다. 충실한 믿음은 규율에 대한 충성과 매우 밀접하게 붙어 있는데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죄의식의 갈고리 또한 더 많아지게 된다.
평범한 사람에게 죄의식이란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무한한 안식을 제공하리라 여겼던 종교는 그 이면에 고통스러움에 대한 직면도 무한히 반복됨을 알려주고 있었다. 안식을 제공하던 공간이 밤이 되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뒤바뀌는 장면은 그래서 내겐 너무 강렬한 이미지였다. 그리고 그런 죄의식을 직면할 수 있는 존재는 본능이 아니라 이성이다.(밤이 되어 전혀 다른 의미로 뒤바뀐 호수를 바라볼 수 있었던 건 파커가 아니라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파이였다. 파커는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그 자리를 피했다.)
종교적 믿음을 통해 파이는 안식을 얻었으나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켜주던 믿음은 생각보다 튼튼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변해버린 호수를 바라보았던 것처럼 어느 순간 파이는 여전히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감지하였고, 결정적 계기는 열매처럼 생긴 잎사귀가 감싸고 있던 치아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무엇인가를 먹는 행위를 상징하는 치아는 부정할 수 없는 자신의 과거 행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도덕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식인 또는 시체의 활용)였건, 아니면 종교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살인 또는 육식)였건 그 증거물엔 감출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졌다.
파이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믿음으로 낮에만 활동하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밤의 현실은 눈을 감고 외면하면 되었다. 조금만 참으면 다시 낮이 돌아올 것이고, 회피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믿음의 구조물이라 할지라도 아무에게도 보일 필요가 없으니 혼자서 거하는 이상 아무도 그 섬에서 누리는 안식을 파괴하지 못하리라 여겨도 무방했다. 다만 그랬을 경우 파이는 여전히 그 섬에서 나오지 못했을 것이며, 종교는 단지 현실에 대한 회피 이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과 괴리된 채 단지 자신의 믿음 안에만 머무르게 되면 이후 나오는 파이의 고백처럼 그저 잊히는 존재가 될 뿐이었다. 믿음으로써 안식을 찾았지만 그 삶이 결국 잊히는 삶으로밖에 귀결되지 않는다면 변화가 필요했다. 그리고 진정한 종교란 현실 속에서 의미를 가질 수 있어야 했다.
안식을 가져다준 믿음에 의심을 더하는 것. 그것이 두 번째 선택지였다. 대부분의 경우 한 번 안식을 누리게 한 믿음을 다시 의심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렇기에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의 믿음 밖에 있는 이야기를 만나면 믿음을 의심하기보다는 반대로 자신이 담지 못하는 이야기를 억지로 좁은 믿음 안으로 구겨 넣으려는 태도를 취한다. 그렇다면 파이는? 의심은 믿음을 살아있게 해주기 때문에 유용하다는 영화 앞부분 대사는 여기서 다시 반짝이게 된다.
힘들게 찾은 안식이었지만 안식의 한계는 분명했다. 낮의 안식과 밤의 죄의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 반복될 것이었다. 믿음에 의심을 더하자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안식을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때 자신을 위한 섬인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자신만을 위한 섬이라는 것을 파이는 깨달았다. 그리고 당장 체감적으론 자신을 위한 섬처럼 보이나 본질적으론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섬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괴로웠지만 자신의 살아있음에 아름다운 해석만을 입힐 수 없음 역시 부정하기 어려웠다. 선박회사 직원들에게 얘기했듯 부인할 수 없었던 행동은 결국 자신 안의 악마가 깨어난 것이며, 지금도 그 악마를 짊어지고 있다는 고백은 더 이상 현실을 왜곡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신의 은혜는 우리의 고통보다 크고 신의 섭리는 우리의 계획보다 앞서 있다.
놀랍게도 파이는 새로운 안식처를 찾을 때까지 기약 없는 불안정한 삶을 선택하였다. 불완전한 작은 믿음에 거하기보다 불안정한 큰 믿음으로의 항해를 시작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새로운 믿음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다. 힘들게 찾은 섬을 떠난다고 새로운 육지를 발견한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다만 그에겐 다른 종류의 희망과 위안이 있었을 것으론 보인다. 잊고 싶던 행위를 직면하게 만들었던 그 치아는 연꽃잎처럼 생긴 잎사귀 속에 감싸져 있었다. 아난디의 춤을 보고 왜 숲속에 연꽃잎이 있다고 표현했는지 물었던 파이였는데 이젠 그 의미 앞에 직접 서게 되었다.
신의 은혜는 나의 과거 행위를 덮어주기 위해 존재하는 면죄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 그대로를 감싸고 있었고, 파이의 괴로웠던 삶 자체를 품어주고 있었다. 종교가 끊임없이 우리의 죄악됨을 일깨울지라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신의 마음은 결국 인간을 향한 사랑이다.
힘든 순간 안식을 제공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주던 곳을 떠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지금만 바라보면 하기 어렵지만 남은 삶 전체를 바라보면 섬을 떠나 밖으로 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나만 생각하면 필요가 없겠지만 신과 함께 거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해볼 가치가 있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만이 전부라고 여겼으나 많은 사람들의 삶 자체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무수히 채워져 있음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그 수많은 삶 속에 자신이 가게 됨으로써 생길 의미가 있다면 더욱 가야만 했다. 죄를 위해 순수를 희생시키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분이 신이고, 그 행위가 ‘사랑’이라는 신의 섭리라면, 파이의 삶 또한 하나의 희생으로써(파이의 잘못으로 그런 고통을 겪은 것은 아니니까)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신의 ‘사랑’이 될 수 있었다.
파이는 결국 자신이 지닌 모순을 해결하지는 못했지만 그 모순을 그대로 안고 떠나기로 했다. 새로운 믿음의 결과는 신에게 맡긴 채 기약 없는 항해는 시작되었다. 파이의 의지였지만 어떤 면에선 신의 응답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다. 표류 초반, 고통스러웠던 시간들 속에서 파이는 스스로를 신께 드리며 그 그릇에 무엇이든 채워서 쓰시라고 고백했었다. 외형적인 결과만 보자면 파이의 기도에 신은 한참을 침묵했다. 그러다 파이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서 이젠 (신께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고백할 때가 되어서야 신은 그 그릇을 사용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셨다.
신의 섭리란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파이도 신을 기다렸고 신도 파이를 기다렸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파이가 신을 향해 자신을 위한 응답 요청을 그만두기로 결심하자, 그때서야 신은 파이가 신의 뜻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보았으니까. 이제 파이의 새로운 믿음은 혼자만의 섬이 아니라 수많은 인생들의 섬에서도 다시 피어나야만 했다. 새로운 믿음의 결과를 신에게 맡겼던 파이는 마침내 한 섬에 도달했다.
굳이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지금껏 파이의 표류 스토리에 대해 신의 섭리라고 칭했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보면 이는 작가가 그려낸 픽션이다. 파이를 만들어낸 작가는 파이의 삶도 창조했던 거였다. 신을 영웅으로 동경하던 어린 파이를 그리스 영웅의 삶으로 이끌고선 마침내 신의 전령사라는 역할을 그에게 부여했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소설이라도 등장인물의 인생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라 보긴 어렵다. 그래서인지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웹툰은(영화로도 만들어짐) 이를 만화적 상상력의 배경으로 사용했고, 이언 맥큐언의 소설 '속죄'는 이에 대해 훨씬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진 감동적인 작품이었다.(이 또한 영화로 만들어졌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왜라고 질문하는 것은 비단 스토리의 주인공만은 아니다. 이야기를 접하는 사람들 역시 무의식적으로라도 그 이유를 알기 원하며, 또한 납득할 수 있는 이유이길 기대한다. 그렇기에 작가의 권능은 정당성 위에 자리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당성이란 생각하는 것만큼 객관적 지표가 아니기에 사람들에 따라 다르게 판단할 것이고, 결국 작가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내용보다 이야기를 만든 이유에 대해 더 많이 설명해야만 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에서, 신처럼 인간의 삶에 개입하여 권능을 휘두르기는 하지만 작가는 최대한 그런 식으로 인식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소설가에게 들려주는 경험담이란 형태를 통해 이야기가 실재했다고 믿게 만드는 구도를 만들면서, 동시에 마마지 삼촌의 갓난아기 일화처럼(폐에 물이 차서 발목을 잡고 빙빙 돌렸고, 그로 인해 어깨가 넓어졌다는) 현실성에 의심을 더할 만한 내용도 같이 담아내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 이야기의 최종장에 이르러 ‘선택의 자유’를 주는 것과 같은 다양하고도 교묘한 방법으로 그 문제들을 풀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바닥까지 파헤치는 것 같아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글의 목적은 감상이지 평론은 아니다. 그리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서 파이와 신의 관계를 다시 정리하면 결국 처음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 수도 있다. 파이는 단지 가상의 인물일 뿐이고, 이것은 그저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니까. 하지만 앞서 말했듯 파이에게, 그리고 이 스토리에 부여된 핵심적인 역할 중 하나는 대표성이다.
깨끗한 물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 화면에 보이던 테라스와 우리의 시선이 직접 맞닿고 있다고 여겼던 착시는 물이 일렁이면서 깨지고 우리에게 반전을 선사한다. 우리는 파이(물)를 통해 건너편(세상)을 바라보고 있던 거였다.
이야기의 출발을 묻는 영화가 아니다. 이야기를 믿을 것인가로부터 진짜 여정은 시작된다.
사실이란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며 만나는 무수한 이야기들을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나눌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영화는 사실 여부를 떠나 그 각각의 이야기들이 지닌 본질과 만나는 것이 삶의 진정성과 만나기 위한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먹지 못하는 포도를 시다고 말하는 여우는 실재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하지만 여우의 행동은 우리내 삶의 한 단편이고 그게 바로 여우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한편으론 걱정이 된다. 이 문제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닿을 수 없는 숫자의 종결점을 향해 한없이 나아가는 원주율처럼 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 속에선 한없이 이어지는 숫자들을 뭉텅 잘라내고 그저 3.14라는 세 숫자만 남겨도 별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이 문제 역시 그럴지 모른다.
파이가 했었던 말처럼 그냥 일어난 일이며 꼭 어떤 의미가 있어야만 되는 일이 아니어도 괜찮을지 모르며, 이 이야기를 보는 것은 고개를 돌리는 리처드 파커의 행동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졌던 파이와 아난디 중에 누가 옳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을 수도 있다. 정답은 모르겠다. 파이는 단지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로 남아있고, 그 이야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유는 이제 우리에게 건네졌을 뿐이다.
다만 이야기를 들은 나로선 그 진지함에 최대한 응답하고 싶은 것이 진심일 뿐이다.
이해할 수 없는 곳으로 나아가기 위해 다리를 건너가다 보면 종종 건너편에서 우리가 '신'이라 부르는 존재를 만나게 된다. 나 또한 그랬다. 그래서 파이(π)는 참 매력적이다. 계산할 수 있음과 계산할 수 없음이 동시에 공존하는 신비한 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파이값을 산출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하지만 방법을 알지만 답을 말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계산을 진행할 수는 있으나 계산의 끝에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 파이가 열심히 외워서 칠판 가득 파이값을 채웠지만 그 값은 결코 최종 답이 될 수 없었다. 그 뒤로도 무한히 이어지기 때문이다. 설사 학교 전체의 칠판을 다 사용한다 하더라도, 아니 전 세계의 칠판을 다 사용해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신이라는 존재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신에게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주셨으나 그 계산 끝에 있는 신을 우린 결코 볼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상황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선택할 시간이 된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에 들어섰을 때 소설가도 동일한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꼭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둘 다 선택하는 것은 어떨까? 요리사와 선원이 등장하는 이야기와 그 주인공들을 동물로 표현한 이야기 속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것은 무엇이 더 사실에 부합하느냐를 따지는 일이거나, 무엇이 더 매력적으로 들렸느냐를 선택하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파이와 리처드 파커 모두 각각의 존재의미를 가지고 있었듯 두 이야기 모두 각각의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음을 우리는 보았다. 바깥쪽 이야기는 바깥쪽대로 안쪽 이야기는 안쪽 이야기대로 뒤집어 입을 수 있는 외투이기에 결국 한 벌의 옷으로 수렴이 되고, 그 둘을 모두 선택함으로 인해서 파이 이야기는 완성이 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파이의 이야기는 그저 다른 조난당한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목록의 한 줄에 속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파이의 생존과 관련된 이야기일 뿐이라면 그 이야기에 붙을 분류표는 선박회사 보고서에 기록되었던 것처럼 ‘매우 드문 특별한 사례’이거나, 소설가의 말처럼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이야기’ 정도가 되면 무난할 것이다. 하지만 파이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어느 쪽에서도 파이가 겪은 깊은 갈등과 우리 자신이 만나는 일은 없다. 파이의 이야기는 단순히 영화의 주인공 이야기를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인생에서의 내적 갈등과 만날 때 더 강인한 생명력을 갖게 된다. 이해할 수 있는 일과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늘 우리 주변을 채우고 있다. 왜 하필 ‘파이(π)’였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