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_page 3 : 표류하는 존재
"감사해요. 이젠 준비가 됐어요."
인생이 길이라고 했던가. 많은 사람들의 곁에서 훤히 보이는 도로 위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고 있을 때도 있고, 아니면 홀로 어딘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터벅터벅 걷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알려주는 방향을 그대로 답습하며 나아가는 때도 있을 것이며, 때론 바다처럼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희망을 돛대 삼아 경험이란 흔적을 따라 좇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간혹 우리는 길 위에 있지 않다고 느끼곤 한다. 나는 분명 어딘가 있는데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는 때. 그건 꼭 도로를 벗어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있는 곳과 있어야 할 곳이 다르다고 느끼는 순간 일상의 길과 인생의 길이 갈라지기 시작한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본질적으로 느끼는 갈등과 고민의 지점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직장에서의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시계는 어제와 다름이 없으나 우리의 인생길은 내가 기억하던 어제로부터 벗어나 있을 때 우린 표류하는 존재가 된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우린 'Life of Pi'라는 영화를 통해 파이의 이야기를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누구도 겪어보지 못했던 험난한 여정을 헤치고 나아왔지만 정말 더는 갈 곳이 없고 갈 힘도 남지 않은 파이였다. 자신에게 삶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이젠 준비가 되었다는 고백이 나지막하게 울린다. 그의 표류기가 나의 삶과는 닮지 않았음에도, 그의 고백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우리도 인생길에서 길을 잃고 헤메거나 내면의 갈등이 통제되지 않을 정도로 벌어졌던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었을까. 대답이 비슷해서가 아니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보트 안에서는 세상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막상 멀리서 바라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그저 떠다니는 듯한 파이의 삶에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영화에 더 애착이 간다.
* 오늘의 이야기는 호랑이가 소환한 'Life of Pi' 감상의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부터는 영화의 스토리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많은 정보들이 등장하니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 호랑이가 소환한 'Life of Pi' 감상 첫 번째 이야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 호랑이가 소환한 'Life of Pi' 감상 두 번째 이야기는 여기에 있습니다.
감상_page 3.
표류하는 존재
파이의 내면도 표류하고 있었다. 그의 외침은 일종의 표식이었다.
배가 침몰한 이후 파이의 생명은 구명보트 안으로 옮겨졌다. 이제 나의 운명은 어딘가에 있을 다른 누군가에게 달려 있였다. 하지만 구조해달라는 외침은 어디에도 닿지 않고 파도에 휩쓸릴 뿐이다. 남겨진 희망의 필수조건은 생명의 연장이었고 생사의 기로는 오롯이 작은 보트에 매달려 있었다. 문제는 생명을 위한다는 행위가 두 존재를 심하게 갈라놓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육신을 지키고 내면을 버리는 일, 또는 그 반대의 상황. 그건 결국 버려진 한 존재가 머물 곳을 잃고 표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작은 보트는 끝모를 바다를 정처없이 떠다니고 있었지만 표류하고 있던 것은 단지 배만이 아니었다. 파이의 분열된 존재 역시 어딘지 모를 곳에서 계속 구조요청 신호를 내고 있었다.
영화를 보면 파이의 대사가 계속 이어진다.(호랑이와 다른 동물들은 인간의 말을 못하니...)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건 대부분 속으로 생각하는 말이었다. 그러다 간혹 파이가 입 밖으로 직접 말을 내뱉는 순간들이 있었다. 생각해보니 그건 대부분 중요한 순간들이었고, 그 상황에서 나온 말들은 일종의 자기고백과도 같았다. 자신의 현재 상태를 토해내는 말들이었으며, 당시 그의 존재가 표류하고 있는 위치에 대한 표식이기도 했다.
구명보트 위에서의 첫 희생자는 얼룩말이었다. 어둠을 배경으로 한 생명이 사라지는 장면이 마치 그림자극처럼 펼쳐진다. 잔인한 리얼리즘은 어둠의 커튼으로 가려졌지만 대신 그 죽음과 각 대상들의 거리감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하이에나에게 소리치다 결국 등을 돌리고 있는 오랑우탄, 참혹한 현장에서 최대한 멀어지고자 했던 파이가 보인다. 얼룩말의 죽음을 지켜보며 안 된다고 크게 외치고 있으나 붙잡을 현실이 없는 허공에 놓인 그의 손이 모든 것을 대변하는 듯하다.
“안 돼!”
어쩌면 안 된다는 말은 보트 위에서 파이가 입 밖으로 가장 많이 외친 대사가 아닐까 싶다. 침몰 이후 겨우 구명보트에 몸뚱이를 올렸지만 배가 침몰하기 전의 생활과 가치규범 또한 깊은 바닷속으로 함께 가라앉아버린 후였다. 결국 이전까지의 상식과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도 어렵고 용인하기도 어려운 상황을 계속 마주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처음 맞닥뜨리는 이 불편함과 괴로움의 상황에서 파이는 계속 “No!”를 외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파이만큼은 아닐지라도 우리도 간혹 그런 상황 속에 놓이게 될 때가 있지 않나. 받아들이기 힘든 눈앞의 현실도 괴로운데,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다. 지금의 상황이 정말 싫은데 내가 싫어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내가 무기력해질수록 반대로 현실은 점점 참혹해지는 것만 같다. 미쳐버리기 전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은 눈앞에 닥친 현실에 대한 거부감을 표출하는 것뿐이다. 파이가 있는 위치가 그래서 더 안타깝게 다가온다.
물론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시체의 활용 등) 요리사의 가치관은 인정할 수 없었지만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이 필요하며 먹을 것은 거저 생기지 않는다는 요리사의 주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생존하기 위해선 요리사의 자질과 능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러한 갈등, 뭔가 기시감이 든다. 스스로를 행복한 불교신자라고 소개했던 이가 취했던 방법이 있었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따라선 채식을 해야 하나 선박이라는 폐쇄된 공간과 긴 항해와 배려 없는 주방을 감안하면 채식만 할 수 없다는 현실 또한 너무 분명해 보였다. 이 커다란 딜레마 앞에서 불교신자는 딜레마를 극복하기보다 비껴가기로 결정했다. 건더기를 뺀 고기스프는 고기가 아니므로 채식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는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타협한 이상 갈등은 해결되었고 자신을 옥죄던 죄책감과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행복한'이란 수식어로 자신을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덤이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은 우리는 수긍한다는 버튼을 바로 누르기 어렵다. 무언가 해소되지 않은 지점이 남았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파이의 어머니도 채식주의자였으나 그녀도 그 방식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지 않으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덤벼!" ("Come on!")
파이도 한때 불교신자와 같은 타협점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완전한 타협점은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잠시 봉합된 것처럼 보였으나 그건 불안한 감정에 잠시 최면 주사를 놓아준 것이고 불안정함 자체는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계속 커지던 불안정함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해소되었다. 아니 터져버렸다. 주어진 현실 앞에서 불가능한 타협점을 찾느니 현실 자체를 바꾸는 것이 하나의 돌파구였다.
늘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게 반응했던 파이가 현실에 대고(하이에나에게) 격정적으로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덤벼보라는 외침이었다. 그렇게 파이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순간(오랑우탄의 죽음 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리처드 파커) 현실은 바뀌었고, 현실이 바뀌자 갈등의 상황도 바뀌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파이가 자신을 변화시키는 순간 현실 앞에서 내내 무기력했던 자신을 벗어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다만 그 대가는 컸다. 또 다른 누군가가 죽어야만 했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절규했던 자신이 이젠 누군가를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다. 이전에 외쳤던 안 된다는 외침은 바꿀 수 없음에 대한 절망감에서 나왔지만, 하이에나의 죽음 이후 들리는 외침은 돌이킬 수 없음에 대한 한탄으로 이루어진 절규였을 것이다. 이 또한 참 아이러니다. 이전엔 답답한 자신이 싫었겠지만 대신 그때는 무기력한 자신 뒤에 숨을 수 있었다. 무기력한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또 한 명의 피해자였고, 현실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하이에나의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모든 책임은 파이 자신에게 있었다. 책임을 돌릴 그 누구도 보트 위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없었던 파이는 살기 위해서 책임을 파커에게 지워야만 했다. 파이가 살기 위해선 파커라는 적대적 존재가 필요했고, "No!"의 대상은 자신이 아닌 파커가 되어야만 했다. 파커가 이 시점에서 등장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육식과 살생을 의미하는 물고기는 하필 녹색이였다. 죽음 앞에서 그 색은 변하고 있었다. 리처드 파커를 먹이기 위해 처음으로 물고기를 잡은 파이가 물고기를 기절(?)시키며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있다. 그는 무엇이 미안했을까... 죽어가는 물고기에 대한 미안함? 목축을 생업으로 삼는 민족들 중에서 가축을 도살하기 전 의식이라 부를 만한 일종의 행위가 치뤄진다는 얘기를 듣긴 했으나 이는 그와는 좀 달라 보였다. 왜냐하면 파이의 슬픔은 오히려 물고기의 죽음을 확인한 뒤에 더 강해졌기 때문이다.
“미안해...”
나에게도 그랬지만 그에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한 이였다. 그 소중한 이가 갑작스럽게 죽음에 이르렀고, 결국 원치 않게 장례식장의 주인 노릇을 해야 했던 그는 한없는 슬픔에 빠졌다. 때때로 같이 죽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히는 그를 위로해야만 했다. 충분하진 않지만 그의 상실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삶마저 내려놓겠다 말하는 그 허망한 말투엔 상실감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오히려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서 그런 마음이 울컥 올라온다고 했다. 견딜 수 없는 슬픔 속에서도 무언가를 입에 넣고 있는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너무 싫다고, 정말 괴롭다고 말하는 그였다.
이해가 됐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죽고 싶다고 느낄 만큼 슬픈 상황에 모든 희망의 창문을 다 닫아버리고 나를 칠흙 같은 어둠 속에 가둬놨는데 배고픔을 채우겠다는 생존의 욕구는 어렵지 않게 그 캄캄한 방문을 열어젖힌다. 내 마음은 나가기 싫지만 내 몸은 벨소리에 응답하고 있는 중이다. 먼저 떠난 이에게도 한없이 미안해지고 자신에게도 무안해지지 않을까. 배고픔에 대한 욕구가 슬픔에 젖어 있는 마음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 어느 누구도 이해해 줄 수 없다고 여겼던 깊은 슬픔의 자리가 내 마음의 자리였거늘, 누구나 느끼는 배고픔의 자리에 이토록 쉽게 자리를 내어주다니... 내 슬픔은 겨우 밥숟가락과 치환되는 가치였던 건가 싶을 수도 있다. 자기 자신도 어쩔 수 없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겠으나 하찮고 가벼운 취급을 받게 된 슬픔에게도 억울함을 피력할 자격이 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미안해진다.
미안하다는 말은 원치 않게 펼쳐진 지금의 현실을 이전의 모습대로 복구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우리는 안타깝게도 벌어진 상황을 벌어지기 전 상황으로 뒤바꿀 수 없다. 결국 미안하다는 말은 지금 벌어진 상황에 대해 다른 어떤 마음은 필연적으로 상처를 받을 수 있음을 공감하고 위로를 건네는 행위였을 것이다. 물고기는 파커에게 필요했지만 파이에겐 위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스스로를 위로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상황. 그것이 파이가 처한 상황이었고, 미안해지는 마음 아니었을까.
"내가 졌어요. 뭘 더 원하는 겁니까?"
"비오는 게 느껴지니..? 이젠 준비가 됐어요."
파이와 파커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적당한 거리를 찾았다고 여겼을 무렵, 그래서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고 여겨질 즈음 그들 앞엔 최후의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것까지 모두 휩쓸어간 거대한 파도와 매서운 폭풍우가 마지막으로 파이와 파커의 생명까지 삼키려던 때, 생명을 건 마지막 통곡이 파도를 뚫고 울린다. 난 가족을 잃고 모든 걸 잃었다고. 내가 졌다고. 그런데도 뭘 더 원하느냐는... 끔찍한 상황은 당신이 만들지 않았냐고, 난 거기서 그저 살아남고자 애썼을 뿐이라는 신에 대한 항의성 외침이기도 했다.
하지만 파도가 누르는 죽음의 그림자 앞에서 결국 파이는 파커가 있던 덮개 밑으로 같이 들어갔다. 파커의 생생한 두려움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보게 된 파이는 파커의 가장 연약한 순간을 온몸으로 같이 받아주었다.
그리고 잔잔해진 바다가 펼쳐진다.
보트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고 기진맥진한 파이와 파커였지만 아직 숨을 거두진 않았다.
잔인함과 자비로움이 공존하는 묘한 시간이었다. 신은 폭풍우를 거두고 잔잔한 비를 내린다.
하늘의 뜻을 느꼈을까. 파이는 파커를 끌어안고 생의 의지마저 내려놓으며 고백한다.
이젠 준비가 되었다고.
파이의 마지막 고백은 아무것도 없는 전부였다. 어느 것 하나 남지 않은 빈손의 파이가 자신의 모든 존재를 내놓고 이젠 거둬달라고 신에게 요청하고 있다. '신'과 '신앙'은 그의 가장 깊은 곳을 채우는 것들이었는데 이제 더 채울 것도 없고, 더 비워낼 것도 없었다. 그렇게 파이는 생의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신의 응답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겨진 마지막 삶의 의미가 드러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파이 이야기의 마지막 챕터이자 가장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이야기와의 동행은 어려웠지만 결과적으로 고민의 구덩이를 건너가 공감의 들판에 누울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나 또한 갈등하는 한 명의 종교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드디어 감상의 마지막 페이지가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