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가 소환한 'Life of Pi' 두 번째.

감상_page 2 : 빛나는 설정과 매력적인 상징

by ㄴㅏ름대로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을 책 어린왕자의 유명한 문장이다. 우리에게 '길들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해준 어린왕자와 여우는 위 문장 외에도 가슴에 남을 만한 여러 문구들을 남겼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아마도 어린왕자는 호불호 없이, 성별과 인종과 세대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토록 이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만들었을까..?


모자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으로 변하는 반전(?)이 처음부터 등장하고, 이솝우화와 같은 재미난 교훈과 어른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 날카로운 풍자도 있으며, 순수한 사랑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는 가슴을 몽글몽글하게 만들기 충분하다. 맘만 먹으면 해지는 모습을 원하는 만큼 볼 수 있다는 어린왕자의 행성은 낭만적이면서 동시에 진심 아이들과 같은 싱그러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스케치북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는 워낙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기에 각 개개인의 매력 포인트를 합치면 얼마나 더 길어질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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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의 주제는 어린왕자가 아니다. 다만 어린왕자가 취했던 이야기 구성 방식이 영화 'Life of Pi'에서도 일부 겹쳐 보였기에 떠올랐던 생각이었다. 어린왕자의 가장 매력적인 부분 중 하나는 그 비유와 설정의 탁월함에 있다. 여섯 행성과 한 송이 장미, 속이 보이지 않아 모자가 된 뱀과 속이 보이지 않아 행복을 준 상자, 한 마리 여우에서 하나뿐인 여우로 바뀌는 장면 등등. 이런 식의 상징과 구성은 자연스럽게 다분히 동화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메시지가 가볍지 않음에도 부담을 별로 느끼지 않게 된다. 영화 'Life of Pi'도 그렇다. 잘 짜인 설정과 매력적인 상징이 영화 전반을 수놓고 있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이다.


* 호랑이가 소환한 'Life of Pi'라는 제목은 이전 글에서 유래했으며, 오늘은 감상의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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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Life of Pi는 지난 글에서 언급했었던 것처럼 동물원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여러 동물들이 등장하는 가운데 갑자기 커다란 분홍색 벽이 화면을 채운다. 벽 중앙엔 사람들을 태우고 가는 코끼리 한 마리가 크게 그려져 있고 이어서 핑크빛 홍학이 그 앞을 줄줄이 지나간다. 벽화의 코끼리가 인도의 신 가네사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렇게 신비로움을 남긴 이미지가 화면을 스쳐간 조금 뒤 이번엔 실제 코끼리가 다시 등장한다. 재미있게도 동물원 담장을 사이에 두고 두 마리 코끼리가 서로 마주쳐 지나가고 있다. 동물원 안쪽의 코끼리는 밖으로 나갈 자유가 제외되었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속박 없이 돌아다니고 있고, 밖의 코끼리는 어디든 갈 수 있겠으나 인간에게 길들여져 그 명령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어느 코끼리가 더 자유로운 존재일까? 아니 질문을 바꿔야 할까? 어느 코끼리가 더 행복할까?


이 영화는 이렇게 영화의 시작부터 엔딩 크레딧까지 끊임없이 존재와 존재가 만나고 생각과 생각이 부딪히며 그 모든 것이 서로 얽히고설켜 스토리를 직조한다. 그 스토리는 흘러 흘러 작은 배를 타고 결국 믿음과 상식과 신념을 바다 끝까지 밀어붙이는데 막상 그 내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과 달리 우리는 생각보다 편안하게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게 된다. 그건 아마도 앞에서 말했듯 동화적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Life of Pi_15.jpg AI의 도움을 받은 이미지

주인공 파이에게 바톤을 넘기고 사라지나 싶었던 동물들은 배가 침몰하는 순간부터 다시 등장한다. 담벼락과 철창 밖으로 나온 그들에겐 자유 아닌 자유가 주어진다. 주인공급 호랑이 '리처드 파커'와 다리를 다친 얼룩말, '오렌지 주스'라는 이름을 가진 오랑우탄과 모두에게 적대적인 하이에나까지. 그들의 목숨을 건 연기가 펼쳐질 좁은 무대와 함께.



감상_page 2.
빛나는 설정과 매력적인 상징



잘 짜인 설정과 적절한 비유는 마치 동화속 이야기가 술술 읽히는 것과 같다.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사람들의 이해에 탁 들어맞는 순간이다. 특별히 과장하지 않아도 부족하지 않고, 장황하게 부가 설명을 덧붙이지 않더라도 모자람이 없다. 그 비유 하나하나가 보태주는 힘에 의해 본래 의미도 자연스럽게 오래도록 살아남고, 잘 짜인 설정이 뒷받침하는 버팀목은 흔들림에도 강하다.



반으로 나뉜 듯한 보트, 보트와 떨어진 듯 이어진 뗏목, 그리고 두 존재를 모두 품고 있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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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은 하얀 방수천으로 덮여있는 작은 구명보트, 그 보트에 연결된 또 하나의 임시 뗏목, 그리고 그 공간을 각각 점유하고 있는 파이와 리처드 파커, 외로움과 목마름을 극적으로 드러내주는 바다라는 공간, 그리고 그 각자의 공간 안에서 파이와 리처드 파커가 서로를 적대시하거나 또는 다가가거나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의 이야기이자 하나의 비유가 된다. 보면 볼수록 반하게 되는 설정이고 무대이다.


앞서 말한 영화속 다양한 '존재'들은 꼭 구체적인 실체가 있는 대상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때로 종교와 과학처럼 인류 문명의 한 축을 대변할 때도 있고, 이성과 본능처럼 인간 내면의 한 파트를 대신할 때도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중심축은 파이와 파커, 인간과 호랑이로 등장하는 두 존재이다. 이름만큼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다. 하늘과 바다는 파이와 파커를 모두 품고 있으나 아직 그 둘의 관계는 하늘과 바다만큼 멀다.



Life of Pi_29.jpg 파이가 머무는 공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튼튼해지고 정교해진다.



파이와 파커, 서로에 대한 부정에서 포용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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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동물원에 있을 땐 한때 파커를 친밀하게 여겼던 파이였다. 망망대해 위 작은 보트에서 마주한 파이와 파커는 서로를 적대시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선 너란 존재가 사라져야 된다고 말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국 파이는 파커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상대방을 부정하지 못하니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자기가 있는 자리를 더욱 공고하게 다지는 것일 뿐. 파이도 마찬가지였다. 파커를 부정하지 못하는 파이는 자신이 있는 곳(별도의 뗏목)을 더욱 튼튼하게 만든 다음 파커에게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아직은 서로 함께할 수 없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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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해달라는 쪽지를 바다에 띄운 뒤 천천히 돌아와 덮개를 들추고 파커를 바라보는 파이. 아직 경계심과 두려움이 가시진 않았지만 최초로 파이와 파커 모두 서로의 존재를 차분하게 직면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화면 구도도 놀라웠는데 마치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상대방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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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는 원래 있던 뗏목이 아닌 보트로 들어왔고 파커는 원래 있던 공간(방수천 아래)을 나와 있으며 서로를 경계하지 않은 채 보트 위에 누워 있다. 둘 사이 관계에 큰 변화가 생겼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이 장면 이후엔 둘의 자세도 거의 비슷하게 등장한다.) 서로에 대한 경계와 적대감이 사라지자 바닷물은 이제 그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투명하게 그대로 보여준다. 이후 밤이 찾아오고 혼란스러웠던 지금까지의 여정, 악마와 같은 자신 속의 괴물, 간절히 바라는 얼굴 등이 어두운 물속에서 펼쳐지지만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다. 결국 그 안에서 인정하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을 상대방에게 덧씌우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까. 이제 그런 파이를 파커가 아무런 적의 없이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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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커가 보는 것이 파이가 보는 것과 다르지 않게 되었을 때, 둘의 존재가 서로 교차되어도 어색하지 않게 되었을 때, 보트에 탄 파이와 리처드 파커는 이제 구분되지 않는다. 하늘이 바다를 비춰주고 있는 것인지 바다가 하늘을 비춰주고 있는 것인지 구별되지 않으며, 배가 하늘에 떠 있는 것인지 바다에 떠 있는 것인지도 구별되지 않는다. 애써 짓는 구별이 무의미해지는 순간이다. 어쩌면 파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리처드 파커 안에도 영혼이 있다고 말했던 그 어릴 적 기대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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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파이는 파커를 길들이고자 했었다. 그리고 나름 성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성의 의지에 따라 본능을 컨트롤하고, 필요에 따라선 본능을 내면 깊숙한 곳으로 들여보낼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어떤 면에서 성숙한 인간이요 문명인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훈련 장면 이후 문명으로 연결되는 매개체인 선박의 등장은 우연이라 보기 어렵다. 하지만 막상 구조를 요청하는 시점에서 파커는 덮개 아래로 숨어버린다. 의식의 밑바닥으로 들어갔다 해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파커를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문명사회의 일원이 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그 사람의 진정한 구조(구원)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파이는 영화의 후반부에 실제로 육지에 다다라 구조되었을 때 기뻐하기보단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내겐 진정한 구원은 어느 한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모든 것을 앗아간 폭풍 이후 노트와 생존 도구 등 자신이 애써 만들었던 모든 것들은 사라지고 오직 신으로부터 유래한 두 존재만이 보트에 남았다.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대신 감출 것도 없었다. 두 창조물 모두 신으로부터 생명을 부여받은 존재니까. 누구 하나만 살아남을 수도, 누구 하나만 처벌받을 수도 없었다. 드디어 파이는 파커를 자신의 가슴에 품을 수 있게 된다.



존재는 대립하지만 겹칠 수도 있다. 부정은 답이 아니다.


비슷한 듯 다른 두 존재의 대비. 이전 글에서 얘기했듯 이런 구도는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바탕이며, 그 결과 각각의 존재는 대비되는 것만큼 선명해진다. 예를 들어 파이의 부모님을 한번 보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대변하며 현실에 대한 냉정한 거리와 적응을 강조하던 아버지가 한편에 있었다면, 다른 한편엔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사고를 대변하며 현실에 순응적이되 종교적 신비성까지 포용할 수 있었던 어머니가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저 대립하는 존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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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파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황에 따라 각자의 입장을 이야기하지만 그렇다고 갈등하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경우는 없었다. 상대에 대한 부정도 없었다. 영화 전체에 다양한 상징이 등장하지만 어떤 면에서 파이의 부모님은 마치 우뇌와 좌뇌를 인격화시켜 캐릭터를 만들면 저렇게 보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당연하겠지만 우뇌와 좌뇌는 대비되지만 대립적인 존재는 아니다. 결국 한 인격체의 두 측면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 영화에서 취하고 있는 대비되는 두 존재의 대립각은 우열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대비를 통해 각 존재가 지닌 특성과 생명력을 더욱 강하게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정점은 바로 바다 위에서의 파이와 파커였다.


그리고 재미있는 점 하나는 영화는 종종 서로 다른 존재를 의도적으로 겹침으로써 일부러 경계를 흐려버리기도 한다는 점이다. 주인공의 고향 퐁디셰리는 인도이기도 하고 프랑스이기도 한 지역이며, 캐나다인이면서 인도를 찾은 소설가와 인도인이면서 캐나다로 간 주인공이 만난 것은 영화에선 운명이라 말하지만 큰 틀에선 작가의 의도된 설정이리라. 파이의 시들었던 종교성을 다시 피어나도록 도와준 이는 아난디라는 무희였다. 그녀는 한 명의 무희에서 하나뿐인 여자 친구가 되었다. 둘은 동물원에 있는 리처드 파커의 행동을 보고 서로 다른 견해를 내어 놓는다. 한쪽은 자부심의 동작으로, 다른 한쪽은 귀를 기울이는 동작으로. 결국 두 해석은 정답의 가능성과 오답의 가능성을 모두 안은 채 우리의 머릿속에 겹쳐 있게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라 선박의 침몰 원인을 묻는 일본의 조사원들은 동물이 등장하는 스토리 하나와 요리사와 행복했던 불교신자가 등장하는 진술을 모두 담아갔다. 관건은 진실성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택에 달려 있었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진실은 따라갔다.


일본 조사원들의 선택과 파이의 이야기를 들은 소설가의 선택은 달랐다. 두 선택은 모두 진실을 담고 있었다. 그게 참 신기한 일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더 재미있어진다. 아직 얘기할 것이 더 남았다는 것도 신기하다. 다음엔 한 걸음 더 들어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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