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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Dec 11. 2023

방송작가로 사는 삶

남들 앞에 나서고 싶은 내면의 깊은 욕구가 있다 보니 자연스레 아니 어쩌면 운명처럼 ‘방송 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됐다. 처음 일을 시작한 곳은 한국씨네텔이라는 당시 외주제작사 중에선 제법 규모가 있는 곳이었다. 그때는 막내 작가가 일을 배운다는 개념이 강했던 시대라 첫 월급은 세전 80만 원이었다. 이전 직장인 외국계 회사의 인턴 때보다 거의 반절이 줄었지만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돈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L 본부장님 밑에서 직속으로 다큐멘터리 자료조사 일을 담당했는데 L 본부장님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과 상사 중에 제일 천사 같은 분이었다. 예민함은 하나도 없었고 늘 나를 배려해 주셨다. 아마 그분 덕에 방송작가라는 일은 바로 그만두지 않고 12년을 이어왔던 것 같다. 게다가 방송작가 일은 내가 하는 데로 성과가 즉시 나왔기 때문에 성격 급하고 예민한 나에게는 천직이었다.              


        

처음 프로그램을 맡아서 하게 된 건 SBS 좋은 아침이었다. TV로만 보던 연예인을 실제로 본다는 것이 너무 설렜다. 가수 양희경 님, 배우 전수경 님, 가수 한대수 님 모두 선배 작가님이 섭외했고 나는 서포트 하는 일을 맡았는데 이후부터는 내가 직접 섭외에 참여하고 구성에 참여할 수 있었다. 섭외한 배우가 출연을 결정하고, 구성한 대로 편집이 되고 내가 쓴 내레이션이 성우의 목소리를 타고 방송에 나온다는 게 정말 보람찼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몇 가지가 있다. 당시 평균 시청률 30~40%를 웃돌며 전 국민의 동해였던 웃어라 동해야의 배우 지창욱 님을 섭외했던 일과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성, 섭외를 맡아 진행했던 가수 배일호 님 편이다.


이후 나는 미친 듯이 일에 빠져 살았는데, 이후 맡은 작품이 방송 작가 3년 차 때 JTBC 미각 스캔들이었다.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다큐멘터리 <트루맛쇼> 김재환 감독이 외주제작사 대표로서 이끌었던 프로그램이었다.

미각 스캔들은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와 함께 미디어에 맛집으로 나온 식당들의 실체를 파헤치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일종이었는데, 이때 정말 재미있게 일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3년 차 방송 작가가 맡기에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의 난이도가 너무 어려웠고 예전에 만들었던 작품을 지금 보면 부끄러워 고개가 숙여진다.      

이때는 아이템을 찾고 이에 해당하는 식당이나 식품 업체에 직접 잠입 취재를 하기도 했다.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닐 만큼 거진항을 풍족하게 만들어줬다던 명태가 한국에서 사라진 이유를 취재하기도 했고, 중국인 관광객이 엄청 많이 왔었는데 단체 관광객이라는 빌미로 비싼 값을 받고 말도 안 되는 음식을 한식이라고 대접하는 실태도 고발했었다.


자연산 민물 장어가 비싸다는 걸 악용해서 바닷장어를 민물 장어인 것처럼 교묘하게 속여 무한리필로 판매한다는 사실도 알렸고

정부에서 인증하는 ‘착한 식당’ 가격제도 때문에 정작 정상 가격에 판매하는 영세 자영업자들이 겪는 어려움도 알렸었다.     


세상의 부조리를 방송으로 알리는 작업이었기에 참 뿌듯함도 많이 느꼈던 일이었지만 이도 10개월만 하고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같은 팀의 메인 작가님의 괴롭힘과 피드백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말이다.     


이후 나는 서울 생활에 지쳤다는 핑계로 고향인 전주로 도망치듯 내려가서 지방 방송국에서 작가 일을 하다 미처 끝내지 못했던 대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서울로 왔다.

당시에 일복이 터져서 전주, 세종시, 대전, 서울 방송국의 일까지 도맡아 하며 원형 탈모가 생길 정도였는데. 다행히 이때 일했던 사람들과는 잘 맞아 큰 탈 없이 일했던 것 같다.      


방송작가를 하면서도 늘 칭찬을 받고 싶어 했고, 부정적인 피드백이 오면 그걸 못 견뎌 했다. 그래서 나는 프로그램도 10개월에서 1년 주기로 옮겨 다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했던 작품이 MBN 집시맨과 서울경제TV의 주식, 경제 방송들이었는데. 이때도 스트레스가 엄청 심했다. 나는 이 두 가지 프로그램을 하면서 겪었던 스트레스가 내 유방암의 원인이 아닐지 조심스레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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