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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혁이아빠 Jun 27. 2023

지갑속 가게 명함

6/27 식사일기

지갑 속에서 한참 전 선결제를 해두었던 가게 명함을 발견했다. 날짜를 보니 꼬막이 제철이던 2월 어느 날이었다. 마침 오늘 점심 모임은 내가 내는 날이니 여기로 가야겠다. 전주가정식백반. 반찬을 푸짐하게 늘어놓고 먹는, 사라져 가는 전주식 한식의 미덕을 저렴한 가격에 선보이는 곳이다. 추운 계절 즐겨먹는 꼬막이 사시사철 대표 메뉴라는 점이 아쉬운 대목이다. 제철이 아닌 메뉴를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나는 휴대폰에 메뉴판 사진을 띄워놓고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여름에 다녀간 이들이 남긴 블로그를 살펴본다. 두루치기에 술 한 잔을 곁들인 이도 있었고, 육회에 산낙지를 곁들인 이도 있었다. 낮술은 마실 수가 없고, 육회에 산낙지는 예산 범위를 훌쩍 넘는다. 메뉴가 많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그 두 가지를 제하고 나니 남은 것도 두 가지였다. 너무 호화롭지도, 겸손하지도 않은. 생삼겹 낙지볶음과 연포탕. 한 가지만 하려다 행여 부족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둘 다를 주문하기로 했다.



사실 날씨가 염려되었다. 바야흐로 한여름 장마철이었다. 더울 수도, 비가 올 수도 있었다. 가능성은 반반. 결국 어떤 경우라도 우월한 곳은 가까운 곳이었기에, 나는 여기로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어차피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고 다시 한번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게다가 지난번에도 모두가 만족스러워하지 않았던가. 숨은 맛집이라며, 이토록 혜자로운 공간이 있었느냐며 상찬하고 배를 두드리며 나서지 않았던가. 검증된 맛집이니 한 번 더 모신 것이다.



앉기가 무섭게 빼곡한 반찬 그릇이 비워지기 시작한다. 마침 중국을 다녀온 이가 있다. 중국과의 외교 문제로 촉각을 곤두세우던 시기 대사가 밥을 관저에서 대접하는지 바깥 식당에서 대접하는지를 두고 얼마나 고심했는지도 반찬거리가 된다. 수산물을 둘러싸고 정치권 한편에선 먹방을 찍고 다른 한 켠에선 금식을 한다는데, 들어오는 메뉴엔 낙지가 두 번이나 들어간다. 볶음에는 고추장 칠갑을 하고 나오고, 연포탕에서는 뜨끈한 국물에 몸을 그득하니 풀었다.



괜스레 식탁을 둘러본다. 젊은 시절 한때 귀빈들의 오만찬 준비를 담당했던 나다. 스테이크가 질기면 다음 날 명이 질기다고 핀잔을 듣곤 했었다. 식자재에는 아무런 서사도 감정도 없고 오로지 함유된 영양정보만 있지만, 그 위에 이런저런 사연이 얽혀 이야깃 거리가 되고 기분이 된다. 실은 식사란 식자재의 가공 및 제공에 대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을 읽는 일이었다. 그가 초청하는 상대와 여건에 따라, 전하려는 메시지에 따라, 때로는 컨디션과 기분에 따라 메뉴도, 조명도, 와인도, 선물도, 공연도. 신경 쓸 변수는 너무나도 많다. 엊그제 총부리를 돌렸다는 쁘리고쥔이란 사람도 원래 크렘린의 오만찬 담당이었다고 하니, 푸틴의 최측근이 되어 용병을 맡은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다행히 오늘은 메뉴로 만족하지 않은 이가 없다.  



나가는 길에 선결제를 해두었던 명함을 꺼낸다. 지난번에 왜 먹은 금액보다 많은 금액을 결제했더라. 조만간 다시 찾을 것이란 확신이 있었던 것일까, 아니다. 옆자리에서 먹고 있던 다른 일행을 발견한 탓이었다. 그 사람 테이블까지 함께 계산하려 했다가 못했지. 순전히 당신 때문이었다. 다시 오려던 그이와는 이제 이곳에 올 일이 없게 되었다. 남김없이 모두 결제하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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