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혁이아빠 Jul 02. 2023

묵직하게 재미있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해야 할 과업을 남겨두고 잠시 압도될 때 이상하게 외도하고 싶은 기분은 굳이 길게 부연하지 않아도 되니 좋다. 어제 그랬다. 홀로 저녁을 먹고 일부러 빨래를 돌리고 개면서 영화를 한 편 보았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1. 내 밥줄, 혹은 꿈을 어느 한 사람에게 걸거나, 어느 한 직장이나 직종에 건다는 것. 그것이 평생직장 개념이면 기득권으로 비치겠고, 그것이 '연극'이나 '영화'면 낭만적이겠다. 그리고 둘 다 요즘 사람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평생 영화에 헌신하리라 믿었던 영화 PD(영화 기획자, 섭외하고 회계하고 등등) 찬실이. 함께하던 예술영화감독의 돌연사로 인해 갑자기 백수가 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홍상수 감독의 PD로 늘 함께 하던 김초희 감독의 자전적인 사연을 코믹하게 풀어내 시작부터 배꼽을 잡는다.

"영화 안 하고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찬실)


"지금 그게 문제인 거 같아요?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게 문제지."(장국영)


"영화보다 중요한 게 많죠. 사람들하고 함께 있는 거. 우정을 나누는 거. 사랑하고 사랑받는 거. 그런 것들도 영화만큼 중요하죠. 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요."(김영)


"젊었을 때 저는 늘 목이 말랐던 것 같아요. 좋아하는 일만은 저를 꽉 채워줄 거라 믿었어요. 근데 잘못 생각했어요. 채워도 채워도 그런 걸로는 갈증이 가시질 않더라고요. 목이 말라서 꾼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찬실)


삶이 코너에 한번 몰릴 때가 있다. 막 던지게 된다. 사실 정신 차리기가 쉽지 않다. 바로 그때 찬실이에게는 다행히 귀인? 귀신? 이 하나 나타나 차분하게 이끌어 준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누구인지는 밝히진 못하겠다만.


그래도 찬실은 정신 차리고 자신에 대해 깊이깊이 생각해 봐야겠다고, 그럴 힘이 남아 있어 정말 다행이다. 이미 거기서 결말은 보지 않아도 되었다. 사랑은 이뤄져도, 안 이뤄져도 그만. 밑줄 긋고 싶은 말은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다. 그 안에 영화도 있고, 다른 것이 있어도 된다. 자기 파괴적인 것만 아니라면.


2. 영화의 서사가 한 줄이면 좀 심심했을지 모르는데, 연탄곡이다. 다른 쪽에서 윤여정이라는 광대가 다른 한 줄을 타고 있다. 교차로는 많지는 않고 중간중간, 드문드문 만난다. 오히려 자연스럽다. 다른 세대가 너무 엉겨도 이상하지 않겠는가.


"이상하게 할머니들한테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안 까먹고는 못 사는 그런 세월이 있는 것 같아요. 안 그러고서는 어떻게 저렇게 웃을 수 있나 싶어요."(찬실)


"할머니들은 다 알아요. 사는 게 뭔지. 날씨가 궂은 날에도, 맑은 날에도"(김영)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윤여정의 시)


잠시 팽팽하던 현업에서 튕겨져 나가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노인의 삶이다. 왜 렌즈를 거기에 들이댔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사실 중간중간 노인이 들여다보는 꽃에도, 애써 꽃을 살리려는 모습에도 들이대는데, 이건 반칙이라 느끼면서도 너무 이해가 되었다. 수술을 하러 긴 시간 사무실을 비우게 되면서 유일하게 부탁한 것이 선물 받은 화분에 물 좀 달라였는데, 돌아와보니 시들어 있어 적잖이 속상했던 기억도 겹쳐 웃다 울 뻔했다.


찬실은 윤여정이 상실한 어느 자리를 대신한다. 무거운 것 들어주고, 글 읽어주고 배워주고, 밥 얻어먹으면서 서서히. 자신도 모르게, 영화를 사랑하다 떠난 딸의 옆방으로 돌아와 씩씩하게 다시 피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카운트> vs 시리즈 <사냥개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