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하지 않은 빈 시간이 생기면 밀린 책으로 손이 갈 것 같지만, 책을 일하는 것처럼 왕진지하게 읽는 나는 정작 갑자기 선물처럼 주어지는 시간엔 넷플릭스 시리즈를 본다.
시간을 받아든 것은 최근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던 일이 한방에 술술 풀린 덕이다. 서쪽에서 귀인이 홀연히 나타나 모든 근심을 해결해 주었다. 우리나라도 아니고 저 멀리 이역만리 G7 국가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고루한 옛날 사고를 이래서 버릴 수가 없다.
한방에 문제를 해결한 시원함을 기념할 겸 간만에 복싱을 소재로 한 영화와 시리즈를 연달아 보았다. 우선 시리즈부터. 최근 순위권에 보이던 <사냥개들>이다. 음주 운전으로 자주 오르내리던 김새론 배우 외에도 허준호, 박성웅, 이상이 등이 주연이다. 나름 허투루 찍지 않았겠다 싶어 얼른 틀어보았다.
결론은, 아, 너무 제대로 찍었다. 8부작인데 앉은 자리에서 끝까지 봐버리느라 새벽에 잠들고야 말았다. 복싱을 소재로 한 영상물의 미덕은 대개 거짓말하지 않는 몸의 솔직함으로 비열한 세상과 직접 부딪고 깨지고 좌절하면서도 끝끝내 다부진 몸의 피지컬을 더 묵직하게 연단해가며 밀어붙인다는 점인데, <사냥개들>은 거기에 '야수성'을 더했다.
세상의 때가 물들지 않은 순수한 눈빛의 복서가 실패와 절망의 서사 속에 쌓아가는 분노와 복수심 위에 더해지는 해맑은 야수성이라니. 그 조합으로 여기저기 두들겨 패기 시작하니 보는 언더독들도 열패감 속에 켜켜이 쌓아 둔 오래 묵은 아드레날린을 막 터뜨리며 감응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집에 남자 한 마리 키우지 않는 여성들은 좀 궁금할지도 모르겠다. 남자들이 이런 시리즈물 볼 때 어떻게 즐기는지. 막 혼자 팔다리 경직되어가며 움찔거리고 아주 가관이다. 이렇게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되어 한바탕 액션 활극을 뛰고 나서 쉽사리 잠이 올리 없다.
이게 심정적으로 좀 후련함을 선사할 수는 있겠는데, 몸에 좋은지는 정말 의문이다. 이런 장르가 그토록 땡겼던 내 환경 자체가 몸을 좀먹는 주원인이었겠지만, 이걸 즐기며 밤을 지새우고, 가뜩이나 많이 나왔던 아드레날린을 더 폭발시켰던 것이 몸에 좋았을 리는 만무했을 터. 아, 몸이란 솔직한 것이구나 깨닫고 다음날부터 운동을 시작한다면 오케이.
그리고 폭력적이다 음주 논란 배우를 계속 노출시키는 것이 맞느냐 뭐 이런 논란에 대해서는 생략. 원래 이런 시리즈물은 나름의 문법에 따라 즐겨야지, 여기서 심오한 의미 찾으면 절간에서 새우젓 찾는 격이다. 그래서 나도 연달아 밤새 보는 것이 '몸에 안 좋을지도 모르겠다'로 말하는 것이다.
좀 건강한 권투물이라면 이걸 권하고 싶다. 두 시간짜리 영화 '카운트' 88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규칙과 공정함을 두고 연일 치열한 공방이 벌어지는, 역으로 공정함이란 가치에 대해 많은 구성원들이 의문을 품고 있는 이 사회에 앞서 언급한 복싱이란 단단한 육체가 갖는 거짓 없는 돌파력이 갖는 매력이 선 굵게 드러난다.
물론 중간중간 내뱉는 '의미 있는 일을 하라'라는 대사가 거슬리기도 하지만, 감독은 그 '의미'도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드러내면서 꼰대스럽지 않게 마감했다. 얍삽함이 기본생활양식이 되어 있는 듯한 이 재수 없어 미칠 것 같은 사회에 펀치 팡팡! 내일이 당장 그렇게 바뀌진 않겠지만, 영화에서라도 그렇게 한번 슉슉 번개처럼 날아보자는 것이다. 심판이 매수당했다고? 그럼 KO가 있잖아!
난 요즘 들어 우리나라가 상대의 호의에 대해 '고맙다'라는 인사를 거의 하지 않는 이상한 사회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예전엔 호의라 부를 것이 많았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한다든지. 그러나 그건 거의 법규에 가까운, 즉 지켜야만 하는, 안하면 도덕적 비난의 가능성이 큰 윤리의 영역이어서 해놓고도 고맙다 소리를 거의 못 듣는 의무나 도리의 영역이었다.
요즘은 호의가 아예 없다. 호의를 베풀면 권리인 줄 안다는 우스개부터, 되려 어려움에 빠진 사람을 도우려던 선한 사마리아인이 소송당한다는 이야기까지. 그래서 여전히 고맙다 소리가 거의 없다.
이 영화에서는 호의와 고마워하는 마음이 조금 엿보였다. 물론 주인공들이 경상도 싸나이들이라 말로는 안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