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시작이다. 에어컨들 많이 트실 것이다. 견딜 수 없는 습기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나는 덥고, 에어컨을 틀었고, 아내는 추워서 도망갔다. 홀로 남은 방 안에서 자꾸만 불면에 시달린다. 겨울은 추워서, 여름은 잠을 이룰 수 없어, 이러나저러나 삶은 견뎌내야 하는 것이니 불만은 없다.
네이버에서, 다른 소셜미디어에서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반바지 광고에 굴복하고 말았다. 여름 한 철 교복처럼 입어서 뽕을 뽑으리라 마음먹고 입어보니 다리가 흉하다. 수북한 터럭을 좀 걷어내면 어떨까 싶어 평소 이용하던 턱수염 면도기를 대었다가 유혈이 낭자하고 말았다. 크게 교훈을 얻고 다시 쿠팡에서 권유하는 8000원 대의 제품을 하나 더 샀다.
이렇게 소비가 소비를 낳았다. 작은 욕망 하나가 일으킨 연쇄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반바지를 하나 고르고 나니, 내가 여기에 관심이 있다고 인지한 인공지능은 바지 광고를 끈덕지게 보여주었다. 요가 시간에 입던 바지가 타이트해서 좀 민망했던 차, 마침 눈에 띈 똥 싼 바지 스타일로 하나 더 골랐다. 없던 욕망마저 일깨워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맹공으로부터 후퇴한 것은 결국 그 바지 위에 입을 비바람막이 얇은 합성섬유 외투까지 고르고 난 뒤였다.
물론 충동질을 한 것은 광고였으나 나름 차분하게 검색, 비교해가며 골랐는데, 문제는 검색어였다. 상품의 용도와 기존 제품군과의 차별성을 감안해 우리말로 이름을 지어주면 좋겠건만, 요즘은 그런 성의를 찾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다리털을 완전히 밀지 않고 피부 위에서 적당한 길이를 남겨두어 피부 손상을 최소화하는 방식의 칼날이 있는데, 그냥 면도기라 하기엔 뭣했는지, 서양 사람들이 쓰던 그대로, '트리머'라고 이름을 붙여두었다.
생각해 보니 그런 게으름은 상업의 영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주로 들여다보는 정부 문서에도 그런 표현들로 가득하다. 조사 빼고는 외국어로만 구성된 과학 분야 연구개발 과제들 같은 경우야 말할 것도 없다. '디지털플랫폼정부'라는 둥 대표적인 정책의 간판을 외국어로 다는 경우도 많다.
쇄국정책으로 나라 빗장을 걸어닫던 조선말도 아니고, 워낙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이니 어쩔 수 없다 자조해 보지만, 서양에서 추동된 그 무엇을 우리의 기존 인식 체계 내에서 수용하기 위해 의미를 곱씹고, 조응하는 말을 찾거나 지어내는 과정 없이 수용부터 하는 자세는 여전히 아쉽다.
곱씹지 않으니 그 의미를 충분히 알고 받아들이질 못한다. 플랫폼이 무엇인지 곱씹는 절차를 생략하고 따라가다 보니, 정부의 기능을 한자리에 연결하고 모아 민과 관이 함께 문제를 해결하자는 말의 의미나 취지와 달리 부처별로, 그 부처 내의 실국별로 너도 나도 각자의 플랫폼을 만들어 결국 플랫폼의 의미와는 멀어진 무언가가 창조되고 마는 그런 식이다.
다시 트리머로 돌아온다. 나의 왼쪽 다리는 면도기로 밀어 민둥산이고, 오른쪽 다리는 트리머로 밀어 털이 조금 남았다. 반바지를 입고 서보면 다리의 채도가 달라 가관이다. 이제 너도 나도 트리머로 부르고 알아들으니 굳이 다른 우리말을 창조해 내자는 주장은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의미를 정확히 곱씹는 작업만은 생략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짝짝이 다리가 결과물이라면 돈도 8,000원밖에 안 들었고 털이 자랄 때까지 부끄럽고 말 일이지만, 모두가 하나씩 만든 플랫폼은 그 의미에서 이미 멀어졌을 뿐만 아니라 혈세도 천문학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