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하나의 자리로, 저마다의 길을 걷는 우리

by BEAU WOI

요가는 인류가 오랜 세월 이어온 전통 속에 신뢰를 두었다. 수천 년 동안 반복되고 정제된 수행과 가르침은 그 자체로 확실성의 근거가 되었다. 인간은 스승에서 제자로, 제자에서 다시 제자로 이어지는 전승의 사슬을 통해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확인했다.

철학은 전통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시간을 쌓기보다 질문을 이어갔다. 하나의 물음이 또 다른 물음을 낳고, 그 끝없는 탐구의 흐름 속에서 신뢰가 만들어졌다. 요가가 시간의 깊이로 자신을 정당화했다면, 철학은 사유의 연속성으로 자신을 정당화한 셈이다. 그래서 나는 일관성으로 가는 길 앞에서 두 전통 모두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게는 두 길 모두에서 어떤 공백이 남아 있었다. ‘이어진’ 전통은 존중할 수 있었고, ‘공통된’ 질문은 매혹적이었지만, 그것들이 결정적인 체험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다만 “이게 다가 아니다”라는 확신, 채워지지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앎만이 남았다. 인간은 언제든 자기합리화를 할 수 있음을 알기에, 감각적 경험조차 신뢰의 기반으로 삼기 어려웠다. 내가 확실히 안다고 느끼는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늘 미세한 모자람과 균열이 있었다.


시간을 이어, 소수로서 탐구에 자신을 바친 이들의 저술은 생각보다 방대하다. 세상에서 널리 인정받은 저작은 몇 권에 불과하지만, 탐구의 과정에서 남겨진 단편과 사후 메모들은 헤아리기 어렵다. 유명한 책들도 각기 의미를 지니지만, 내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오히려 공개되지 않았던, 미완의 기록들이었다. 수많은 해석과 이론 속에서 길을 잃던 어느 날, 설명을 넘어서는 가르침이 내게 다가왔다. 종교의 언어도, 논증의 형식도 아니었다. 그저 알았다. 나는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 단순한 메시지를 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존재는 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순간 나는 철학이 걸어온 오래된 길을 다시 떠올렸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인식에 대한 근원적 은유다. 동굴 속 사람들은 벽의 그림자를 현실로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빛이 만든 허상에 불과하다. 한 사람이 고통스러운 전환을 거쳐 동굴을 벗어나 태양을 본다. 태양은 모든 존재와 앎의 근원, 선(善)의 이데아다. 플라톤은 우리가 익숙해진 감각의 세계가 실재가 아님을 가르친다. 진리를 향한 길은 외부의 전쟁이 아니라 내부의 전환이며,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눈의 훈련은 곧 자기 자신을 전복시키는 일이다.

스피노자 또한 같은 길 위에서 사유한다. 『에티카』의 마지막 문장처럼 “모든 위대한 것은 어렵고, 드물다.” 사물을 영원의 관점, 곧 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바라보는 자유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상상과 정념에 사로잡혀 파도처럼 흔들린다. 자유인은 드물다. 그 드문 가능성 속에 인간의 가장 숭고한 가능성이 놓여 있다. 플라톤의 태양을 응시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영원의 관점으로 사물을 본다는 것은 눈이 타는 고통을 감수하고 인간적 감정의 굴레를 벗어나는 일이다. 자유는 늘 어렵고, 드물다. 보이는 세계의 자유들과는 다른 결의 자유다.

인도의 즈냐나 요가는 물리적 매개보다 내면의 힘으로 질문을 밀고 나간다. 굳이 도구를 든다면 작은 자아인 ‘나’ 자체일 것이다. 육체, 그리고 그 길에 자신을 바치려는 결심과 의지. “나는 누구인가?”라는 단 한 줄의 물음으로 시작되는 길은 부정의 연속이다. 나는 몸이 아니다. 나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감각이 아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모든 동일시를 벗겨낸 끝에 남는 것은 순수의식이며, 그것은 우주적 실재인 브라만과 하나다. 세계는 환영이고, 아트만과 브라만은 둘이 아니다. 단순한 진리에 도달하기까지는 긴 명상과 침묵이 필요하다. 진리는 언제나 여기에 있으나, 그것을 알아보는 눈은 드물게만 열린다.


제3자의 눈에는 “그게 무슨 의미냐”고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이는 세계의 크고 작은 성취는 정도와 형태의 차이일 뿐,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많은 이들이 결국 이 문제에 이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길은 단계적으로 가도 좋고, 단번에 가는 이도 있다. 다만 빨리가 아니라 제대로 가야 한다. 방해와 오류, 유혹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길은 오직 각자의 길이며, 경험은 공유될 수 있으되 동일하지 않다. 목적지만 같을 뿐이다.

플라톤, 스피노자, 인도의 현인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세계를 가리켰다. 인간이 보는 세계는 허상이며, 진실은 하나다. 그러나 그 단순한 진실은 누구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진리를 본다는 것은 눈을 바꾸는 일, 익숙한 모든 믿음을 의심하는 일이다. 처음은 고통스럽고, 외롭고, 드물다. 그 어려움 속에서만 진리는 제 자리를 드러낸다. 이 길을 걷지 않은 이들에게는 한 문장이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경험 없는 문장은 허공을 떠도니. 그러나 길 위의 이에게는 단 한 문장도 감동이 된다. 타인에겐 아무것도 아닌 순간들이 그렇게 빛난다.


나에게 그 길은 철학의 논증으로도, 종교적 신앙으로도 오지 않았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직관이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명료함. 명료하지만 언어로 닿지 않는 감각. 오래 묵은 의문이 한순간 녹아내리는 체험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압도적 황홀은 아니었다. 다만 그때 처음으로 신뢰가 생겼다. 전통의 무게도, 논리의 완결성도 아닌, 하나의 단순한 사실에 대한 확신. 진실은 하나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문장은 단순하지만, 그 단순함에 도달하는 길은 길고도 어렵다. 한 줄의 문장은 문장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시간과 경험을 품고 있다. 그림자를 벗고 태양을 보는 일, 정념을 떠나 영원을 직관하는 일, 동일시를 벗겨내어 순수의식을 드러내는 일 — 모두가 하나의 여정을 다른 말로 부르는 것이다.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숭고한 가능성은 아마도 그 길을 끝내 포기하지 않는 데 있을 것이다. 생이 다할 때까지. 나는 특정 종교를 갖지 않았지만, 바로 그 단순한 직관 속에서 처음으로 신뢰를 발견했다. 진실은 이미 있으며, 언제나 하나다. 어렵고 드물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깨달음이다.


보이는 세계 속에서 깨달은 자의 얼굴을 흉내 낼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나의 길 위에서 조용히 걸어간다. 그리고 안다. 세계 어딘가, 다른 장소와 시간 속에서도 같은 길을 걷는 이들이 있음을. 우리는 서로의 길을 따라 걷지 않지만, 각자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며 보이지 않는 길을 걷고 한 지점으로 함께 향한다. 그 길 위에서도 나는 일상의 얼굴을 성실히 산다. 평범한 하루의 반복 속에서도 진실은 여전히 있다. 언제나 하나이며,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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