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곰의 일희일비 #7]
누군가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도구가 뭘까요?
패션? 집? 차? 직업?
저는 과감하게 그 사람에게서 나는 '향취'라고 주장해보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애써 고르고 고른 향을 뿌렸을 때의 그 마음,
그리고 상대가 혹은 내 스스로가 그 향을 음미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어쩌면 스쳐가는 향기 하나로도 새로운 인연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되는
빗내음이 가득한 8월의 어느 밤, 제가 사랑하는 향에 대해 써보았습니다.
오늘, 당신의 향은 무엇인가요?
누군가가 가장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척도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무언가에 들인 시간, 노력, 마음의 깊이 혹은 내 삶의 공간을 차지하는 비중까지.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돈만큼 적확하고 명징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잴 수 있는 도구가 또 있을까? 지금 내가 무엇인가에 가장 많은 돈을 쓰고 있다면, 내 삶에서 그 대상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거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누군가는 집에, 누군가는 술에, 또 다른 누군가는 여행에, 자신의 마음을 쏟는 만큼의 돈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그런 관점에서 누군가 내게 가장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없이 '향수'라 대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향수'라고 대답해야만 할 만큼, 향수는 내 삶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 '향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향수에 왜 그렇게 집착하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처음 나를 향수의 세계로 입문하게 만들어준 조말론의 향수들은 그 당시의 내게 가장 신선한 감각이었다고 밖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때 내가 가장 사랑했던 향들은 스물 다섯 즈음의 나처럼 밝고 신선했다. 당시 나의 최애 향수는 조말론의 ‘라임 바질 만다린’. 새큼하게 찌르는 그 첫 향을 맡을 때, 나의 미래가 가본적도 없는 캘리포니아의 햇살처럼 항상 밝고 맑게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때는 여전히 내가 어떤 희망의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동대문표 싸구려 옷 위에 걸치는, 온 몸에 걸친 옷보다 더 비쌌던 향수의 냄새는, 그렇게 내내 밝진 않았던 내 삶에 걸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어갈수록 시트러스의 상큼한 향들에게서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 세월이 흐른만큼 취향도 조금씩 변해가면서, 스물 일고여덟 즈음부터는 조말론보단 딥디크의 향들에 더 자주 손이 갔다. 조말론에 비해 딥디크 향들은 그 향취가 조금 더 무겁고도 적확했다. 그래서일까. 주관이랄지 자아랄지, 어쩐지 그 모든 것들이 조금씩은 익어가기 시작하는 그 때의 나와 더욱 잘 공명해준 것은 딥디크의 향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사랑했던 향은 무화과의 달큼한 흙빛 아름다움을 담은 ‘필로시코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지치고 힘든 내게 선물하고 싶어 퇴근길에 충동구매했던 바로 그 향수였다. 그땐 그렇게 나를 위로해주고 싶었던 것 같다. 매년 한두병의 향수를 사면, 그 해 내가 지나왔던 어떤 굴곡들이 조금은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으니까. 못견디게 더운 여름날도, 못견디게 잊고 싶었던 누군가도, 내 몸에 섞인 그 흔적들을 무화과 향으로 덮으며, 마침내는 새하얗게 잊어내고 싶었다.
서른이 넘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면서 나의 향 취향 또한 달라졌다. 이전엔 누군가에게 보여질 향들을 패션처럼 소화했다면, 이제는 그 대신 내가 생각하는 스스로의 삶과 개성에 가장 가까운 향들에 천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소셜 에고를 두르고 둘러 퍽퍽한 오므라이스같던 나는, 새 사랑을 시작하고 나서 고수가 듬뿍 올라간 동남아식 볶음밥 같은 본연의 향취에 조금은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내가 나여도 괜찮을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나의 향들도 ‘온전히 나여도 괜찮은’ 취향들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그러면서 역설적이게도 더 너른 취향의 향수 브랜드들을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머스크와 민트향이 폐부를 찌르는 프레드릭 말의 ‘제라늄 뿌르 무슈’를 뿌리기 시작한 것도, 달큼한 과일향 대신 침향이나 백단향처럼 무거운 나무향들에 호감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 부터였을 것이다.
그러다 최근에는 향의 취향이 좀 더 완곡해졌다. 여전히 달고 새큼한 향과는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은은한 꽃향기를 담은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프리지아’를 종종 사용한다. 만개한 꽃밭의 아름다움은 아니더라도, 은은한 비누향의 체취가 담긴 그 하늘하늘함은, 여전히 어느 한 구석은 소년이고픈 내 마음을 닮았기 때문이다. 또, 같은 나무향이라고 하더라도 좀 더 풍성한 궤적을 그리는 향들에게 더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르라보의 ‘샹탈’을 들 수 있는데, 샌달우드의 곧고 따듯한 나무향과 더불어, 가죽, 카다멈, 바이올렛 등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마초-페미닌한 묘한 향취들이 이 향 안에 다 녹아있다. 복잡미묘한 삶 속에서, 그보다 더 어려운 내 마음이 명쾌하게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종종 이 향수들을 걸치며 오늘의 나를 생각한다.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생각보다 어둡더라도, 또 가끔은 누군가에게 한없이 가벼운 아이처럼 보이더라도, 내가 뿌리내린 스스로 안에 있으니 다 괜찮다고 다짐하면서.
이처럼 향수를 뿌린다는 행위 안에는 꽤 많은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사람마다, 시기마다 좋아했고 또 좋아할 향이 달라지듯이, 우리의 인생도 때론 직선으로, 때론 곡선으로 향취를 그리며 나아간다는 것. 그리하여 이 작은 향수들을 고르면서도, 사진첩 속 내 표정엔 다 담기지 않았던 그 시절의 나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여전히 지나간 추억의 향들을 체취에 붙잡고 있는 이유다. 마흔살이 된 나는 어떤 향수를 뿌리는 사람이 될까? 하나 분명한 것은, ‘늘 같은 것’만 뿌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점이다. 향수와 함께 내 삶도 여러빛깔로 영글어 가기를. 또한, 그 다양한 색 속에서도 ‘나’라는 중심을 잃지 않기를.
내년 생일엔, 꼭 내 이름을 딴 향수를 하나 만들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