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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Jan 11. 2020

미국 할머니

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이전까지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에게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나라는 아니었다. 그저 바다 건너에 멀리에 위치한 세계 1위의 강대국 그리고 무수한 콘텐츠가 흘러나오는 곳 정도로 이해했달까. 한국과 미국의 여러가지 관계를 부족하게 나마 이해하긴 했지만 그것이 나에게 주는 직접적인 영향을 체감하기엔 아직 어렸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에 직접 가고 보니, 이 나라가 그저 나와는 관련 없는 먼 나라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굉장히 가까운 나라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여행 279일 차, 2018년 1월 21일

  토론토에서 야간 버스를 타고 미국 할머니가 계신 뉴저지주 체리힐에 도착했다. 외할아버지의 누이이신 미국 할머니를 처음 알게 된 건 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그전까지만 해도 외국에 가족이 살고 있다는 것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었는데, 그때 처음 할머니께서 한국에 오시면서 미국에 가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 할머니는 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에 다시 한번 한국에 오셨었다. 나는 할머니가 떠나시는 날이 되어서야 얼굴을 비출 수 있었다. 할머니는 가족들로부터 나의 여행 이야기를 미리 들으시고는, 기회가 되면 미국도 꼭 오라고 하셨다. 그때 계획으로 미국에 갈 수 있을지 확답을 할 수 없어 우선은 감사하다는 말을 먼저 전했다. 공항에 갈 시간이 되었고 아빠는 할머니를 태워다 드릴 준비를 했다. 그런데 웬일인지 누이인 할머니가 밖으로 나오시는데도 할아버지께서 마중을 나오시지 않는 것이었다. 의아했지만 내가 쉽게 말을 꺼내긴 어려운 상황이라 그저 가만히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결국 끝까지 할아버지는 나오시지 않으셨고 할머니는 차에 올라타셨다.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할머니가 소녀처럼 울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울음에 깜짝 놀랐다. 할머니께서는 이제 나이가 들어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도 아마 그런 직감 때문에 혹여 눈물을 보일까 봐 일부로 마중을 나오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6.25 전쟁 때 할머니께서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피난을 갔던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조금씩 삼키셨다. 정말 이번이 할머니의 마지막 방문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당신께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렇게 할머니를 공항으로 보내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시간만 흘렀을 뿐 내가 항상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느꼈던 그들도 결국엔 소년, 소녀였다. 여러 환경적인 이유들로 그들은 다른 곳에서 헤어진 이후의 남은 평생을 지내고 있지만 가족은 가족이었다. 나는 한 가지 다짐을 했다. 


  '당장 확답을 할 수는 없지만, 할머니를 뵈러 미국에 가야겠다.'


  할아버지의 손자로서, 할머니를 찾아뵈어 또 다른 추억을 만들어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결심을 한 지 9개월 만에 나는 드디어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을 지나 미국에 도착했다. 진짜 미국에서 미국 할머니를 만나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할머니는 동네 이웃인 지미 부부께 부탁해 차를 타고 나를 데리러 오셨다. 할머니는 영화에 나올 것 같은 길가에 있는 미국 식당으로 나를 데려가, 밤새 버스를 타고 왔으니 배고플 거라며 Hungry man 세트를 시켜주셨다. 빵과 소시지, 그리고 계란 프라이와 커피까지 흔한 조합인데도 미국에서 먹으니 정말 미국에 온 것 같았다. 그렇게 Hungry man 세트로 배를 채우고, 다시 차를 타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미국 할머니가 살고 있는, 땅이 넓은 나라 미국에 왔다.


  여행 281일 차, 2018년 1월 23일

  오늘은 비가 내려 외출을 하지 않고, 할머니 댁에 있었다. 할머니는 앨범을 꺼내 들고 옛날이야기 그리고 할머니의 가족 이야기를 해주었다. 할아버지 댁에 가족 사진이 걸려있는 것처럼, 할머니 댁에도 할머니 자녀분들 그리고 손주분들과 함께 찍은 가족 사진이 걸려있었다. 할머니께서는 한 명 한 명 그들을 내게 소개해주었다. 같은 피에서 나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가족들의 사진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물론 한국에 계셨을 적의 옛날 이야기를 다 이해하기엔 내가 너무 어려, 할머니께서 조금 아쉬워하시긴 했지만 나로선 신기한 이야기들이기는 했다. 주룩주룩 비가 오는 날, 넓은 집에서 자신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니, 때론 이곳에서 참 외로울 때도 있으시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행 286일 차, 2018년 1월 28일

  오늘은 할머니의 church life를 함께 하는 날이다. 교회에는 수많은 한국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계셨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있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다들 어떤 꿈을 안고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일까. 할머니께서는 70년 대에 남편 분과 함께 이곳에 와 Cafeteria를 운영하시며 자식분들을 키웠다고 하셨다. 그때에는 동양인들에 대한 인식도 크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하셨다. 그래도 그 어려움을 이겨내며 자식분들을 키워내신 것을 보면 옛 이주민들에게 이 땅은 기회의 땅이었음에는 틀림없었을 것 같다.


  할머니는 주변 친구분들께 나를 소개해주었고 나는 한 분 한 분 인사를 드렸다. 오후에는 지인의 집에서 저녁 예배가 있다고 하셨다. 집에서 휴식을 조금 취하다가 또 할머니와 함께 저녁 예배를 위해 외출을 했다. 그곳에서는 아까 교회에서 뵈었던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분들이 계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계신 공간이 얼마만인가 싶었다. 그분들은 나의 여행에 호기심을 느끼시며 외국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시기 시작했다. 심지어 예배가 끝난 이후, 할아버지 한 분의 주도로 나는 여행에 대한 작은 발표까지 하게 되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새로운 것에 흥미를 느끼는 그분들의 모습이 귀여우시면서도 멋있었다. 궁금증을 가지고 사는 것만큼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이 또 없지 않을까. 어쩌면 그것도 삶의 습관 아닐까. 발표하며 마주했던 그분들의 눈빛을 오래도록 기억해야겠다.


  여행 290일 차, 2018년 2월 1일

  할머니 댁을 떠나는 날이다. 약 10일 간 할머니와 이야기도 나누고, 가끔은 산책을 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 할머니 지인들 덕분에 필라델피아 같은 근처 도시를 여행하기도 했다. 제일 중요한 건 10일 동안 정말 배 터지게 한국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다. 오늘 조차 어제 반찬 먹었던 반찬을 다 먹지 못해 그것들을 먹고 집을 나서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마지막 날이니 외식을 하자며 지미 부부와 함께 근교로 가 맛있는 생선, 새우 요리를 시켜주셨다. 내가 추억을 드리러 왔는데, 마지막까지 정말 받기만 한다. 


  오늘 또한 심지어 미국을 떠나는 게 아니라, 할머니 덕에 뉴욕 근처의 동화 삼촌 댁으로 가는 것이었다. 뉴욕에서 허드슨 강을 건너면 있는 한인 마을에 계신 동화 삼촌 부부 댁에 며칠간 머물면서 대도시 뉴욕을 여행하게 되었다. 아무리 가족이라는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더라도, 타지에서 항상 외부인이었던 내가 받은 이러한 호의들은 정말로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가방을 싸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언제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아쉬움과 감사함이 교차했다. 한번은 다시 꼭 오겠다는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섰다. 마음이 따뜻하게 먹먹했다.



그렇게 미국은 내게 더 이상 TV에서나 보던 먼 나라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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