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후잡담

더 가까이에서 더 세밀하게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by RAMJI

1999년, 해가 바뀌면서 세상이 망할 것이라는 종말론이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2000년 1월 1일의 태양은 무심히 떠올랐지요. 나중에야 알았지만 2000년은 특별한 해였습니다. 유엔(UN)이 새로운 세기를 맞아 새천년개발목표(Millennium Development Goals, MDGs)를 발표했거든요.


MDGs는 전 세계 빈곤 퇴치, 교육 기회 제공, 성 평등 촉진, 유아 사망률 감소, 산모 건강 개선, HIV/AIDS 및 기타 질병 퇴치, 환경적 지속 가능성 보장,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 등의 영역에서 2015년까지 달성할 8가지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당시의 놀라운 발표는 회원국들의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개도국의 MDGs 달성을 위해 선진국들은 대외원조를 늘리겠다고 약속했고, 각국 정상들은 원조 예산을 얼마나 늘릴 것인지 앞다투어 공언했습니다. 북유럽 국가들이 통 큰 후원자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편 그 시기 학계는 대외원조가 효과가 있는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습니다. 돌아보니 경제학자들의 오랜 논쟁-시장에 개입해야 하느냐 내버려 두어야 하느냐-의 연장선이었네요.


Jeffrey Sachs는 대표적인 원조 찬성론자로서, 대규모 원조로 개발도상국의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 William Easterly와 같은 회의론자들은 원조의 효과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원조가 개발도상국의 경제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오히려 부패와 비효율성을 초래할 수 있다고 했지요. 작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Daron Acemoglu와 James Robinson도 원조에 회의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국가의 발전은 제도, 특히 정치 제도에 달려있기 때문에 원조의 역할은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죠.


최근 읽은 <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의 저자 Abhijit Banerjee와 Esther Duflo는 201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는데요, 이들은 원조가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거대한 담론보다는, 개도국 주민의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작은 대책이 무엇인지 데이터 분석(RCT)으로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또한 (경제성장이나 빈곤퇴치) 정책에 미치는 정치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정치가 전부는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거대한 정치 제도 외에도 개도국 주민의 일상에 긍정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작은 제도가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저자들은 정책을 실패로 이끄는 요인으로 이데올로기, 무지, 타성을 들고, 이런 문제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행동을 가까이에서 세심히 살펴봄으로써 충분히 해결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차토파다이와 에스테르는 여성할당제를 채택하고 2년이 지난 시점에 할당제를 적용한 마을과 그렇지 않은 마을의 공용시설 현황을 비교했다. 두 사람은 여성 지도자들이 여성이 원하는 공용시설(웨트스벵골에서 여성의 숙원 사업은 도로와 식수원 확보였다)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학교에는 많은 예산을 투입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남성우월주의가 극심한 라자흐스탄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타났다. 그곳 여성의 숙원 사업은 식수원 확보였고 남성의 숙원 사업은 도로 확장이었다. 여성 지도자들은 도로보다 식수원 확보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했다.
인도의 다른 지역에서 진행한 연구도 여성 지도자들이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이들은 한정된 예산을 남성보다 다양하게 활용할 뿐 아니라 뇌물을 받지 않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우리가 이런 조사 결과를 공개할 때마다 엉터리 결과라고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직접 마을에 찾아가 남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성 프라단과 대화를 했고, 여성 후보는 자신의 사진보다 남편의 사진이 더 크게 나온 포스터로 선거운동을 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다. 우리도 그런 자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그 포스터를 보았다. 이처럼 여성이 마지못해 정치 지도자로 나서는 상황은 자진해서 적극적으로 지휘봉을 잡고 마을을 개혁해 나가는 진취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또한 여성이 마을총회에서 의장을 맡거나 발언을 하는 경우는 드물다. 여성들은 학력도 낮고 정치경험도 적다. 하지만 여러 한계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이 조용히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해내고 있다.(가난한 사람이 더 합리적이다, pp.336-337)


이 지역 사정에 무지한 저 같은 사람은, 마을위원회 선거에 여성후보만 출마할 수 있다고 하면, 꽤 진보적인 제도가 시행되고 있구나, 라고 간단히 생각하고 말 겁니다.


이 지역을 좀 아는 사람들은 제도 뒤 현실을 보겠지요. 그들은 후보자 여성 본인이 아니라 그 여성의 남편이 실제로 마을의 주요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할 거라고 말합니다. 혹시 지역을 방문하게 되면, 남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여성들과 대화를 하면서, 여성 후보가 남편의 사진이 실린 포스터로 선거운동을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갖겠지요.


그러나 그 지역을 보다 속속들이 관찰하고 데이터를 분석한 저자는 그 현실 아래에서 다른 가능성을 찾아냈습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공적인 자리에 앉은 여성들이 조용히 리더십을 발휘해서 자신들의 숙원 사업에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는 정치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2000년대를 지나고 2010년대를 통과하면서 원조 찬반에 대한 논의는 사라졌고 그 자리를 결과(result) 기반, 근거(evidence) 기반이라는 용어들이 채우고 있었네요.


MDGs가 종료된 지 오래이고 후속으로 발표된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2016-2030) 종료도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독서기록을 남기려다가 의도치 않게 회고의 글을 썼습니다. 주민의 삶을 밀착 관찰하고 수집한 데이터에 기반해 프로젝트의 성과를 판단하는 것, 이 간단치 않은 과제가 2025년 현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는지 궁금해집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서로 달라도, 서로 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