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수능 1등급 4개 받은 자의 2022
대한민국 11월의 클래식 3종이 있다.
빼빼로 데이, 김장, 그리고 수능.
11월 한 달 동안에는,
일 년 열두 달 중 나머지 열한 개 달에 먹는 빼빼로를 더한 양보다 많은 빼빼로를 섭취하고
친구들과 주말 약속을 잡을라치면 집집마다 매주 껴있는 김장 행사가 타당한 불참 사유가 된다.
그리고 11월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단연 수능.
수능을 기점으로 뻔하디 뻔한 뉴스과 광고 마케팅이 나온다.
수능을 앞둔 학생과 부모, 교육계의 긴장감을 부추기는 뉴스
가장 핫한 소비자 군집으로 등극할 수험생들을 타겟한 시장 마케팅
내 인생의 한 시점에도 존재했던 빅 이벤트였기에 이 마음을 너무너무 잘 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수능에 난리법석인 시대를 보며 안타까움과 슬픔이, 불편함이 일었다.
https://www.fnnews.com/news/202211160600255382
올해는 수능 한파가 없었다.
기후변화 때문이란다.
기후가 바뀌었다.
기후도 바꼈는데, 우리 사회는 무엇이 달라졌는가?
초등학생 때부터 쓰던 저금통을 옮기다가 이 쪽지를 발견했다. 아마도 고3 담임이 수능께에 응원차 건네었던 쪽지인 듯하다.
기억에도 없던 이 글을 새 마음으로 읽는데, 가벼운 웃음이 스친 후 남은 감정은 찝찝함이었다.
2등급 2개 맞아오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시겠다는 선생님. 인간적으로 좋아했던 분이고 당시에는 선생님께 감사해하며 졸업했던 것 같은데(아마 선생님으로서는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것일테니 여전히 감사하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지금의 나를 보고있자니 선생님을 향해 눈을 흘기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선생님과 여러 차례의 진학 면담을 통해 가장 이름있는 학교에 지원하거나, 취업이 잘 '된다고 하는' 방향으로 노선을 잡았다. 모르긴해도 여전히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그런 전략으로 대입 준비를 하고있지 않을까.
대망의 수능을 치르고 선생님이 제안한 2등급 2개 조건에 상회하는 결과물을 들고 온 나.
그리고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시겠다고 했던 그 결과는,
지금의 나다.
당시 이 독특한 등급 구성으로 뽑아낼 수 있는 다양한 경우의 수 중에서 나는 가장 컷트라인이 높고 취업률이 우수하다는 학과에 진학했다. 그 과정에서 적성과 흥미는 고려되지 않았고, 결국 휴학 포함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뜻깊은 방황을 열심히 씩이나 하다가 이제서야 느즈막히 내 길을 가고 있다.
수리와 외국어, 사탐 1등급 중에서 빛이 나는 언어 4등급을 보라. 저 성적을 받은 내가 지금은 책을 써 직접 출판을 하고,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친다고 야단이다. 내 인생에서는 수능 성적과 진로가 일치하지 않을 뿐더러, 상관관계가 없다.
모든 선택은 내 몫이고 그에 따른 결과도 내가 책임져야함을 알고 있다. 대학교와 학과를 선택하는 것 그리고 이후 진로를 결정하는 것까지 전부. 하지만 19살의 모범생은 그러한 인생의 섭리를 알지 못했다. 누구도 나에게 가르친 적이 없거나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며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을테니까. 무엇보다 초중고 12년은 오로지 대입만을 위해 달려가는 레이스였기 때문에 대학만 잘 가면 된다는 그 말을 나는 철썩같이 믿고 따른 것 뿐이다.
덧붙여 내가 결정했다는 선택이 정말 나만의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과연 태어난 이래로 줄곧 부모와 학교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온 청소년이, 그것도 대부분 본인의 능력이 아닌 부모의 경제적 지원으로만 가능할 대입이라는 그 선택이, 오롯이 나만의 기준에 의한 선택이었을까 묻는다면 누구도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순간에 말은 눈과 손과 기운으로 더 강력하고 분명하게 전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부모나 교사에게 덤터기 씌우려는 의도는 아니다. 중요한 길목에서, 정확히는 수능이 중요한 길목이라는 뜻이 아니라, 19세에서 20세로 세대가 전환되며 법적 성인이 된다는 측면에서 그 중요한 방향키를 타인에게 위임한 것이 우리 모두의 실수였다.
배운대로만 사는 인간은 결국 노예가 되게 마련이다. 공교육의 뿌리가 노동자 양산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아야한다. 이 글이 내가 살아온 인생을 나라탓, 시대탓, 부모탓, 온갖 남탓으로 돌리는 비겁한 패배주의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읽혔다면 다시 생각해보시라 말하겠다. 물론 한 때는 내가 아닌 모든 것을 원망했고 여전히 깊은 곳 어딘가에는 비겁한 패배주의자가 생존해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만 그 녀석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있고(안다는 것은 중요하다), 알려서 딱히 좋을 것 없는 그 존재를 굳이 굳이 드러내 외치는 까닭은, 여러분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다.
수능은 결단코 인생을 결정하지 못한다. 그에게 주어진 힘은 한껏 확대되고 과장되고 부풀어있다(동어반복 얼마든지 더 해줄 수 있다). 그에게 네 인생을 결정하는 행사권이 있다는 그놈의 주변 말들에 속지마라. 나처럼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목소리들도 정--------말 많으니 이 입장 또한 고루 들어보아라. 사람은 자기가 살아온 인생만큼만 말할 수 있다. (말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유심히 들여다 볼 것!) 그러니 수능 1등급 맞고도 10년 넘게 방황하는 내 목소리도 고려해보시라.
결국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이것이다. '수능'과 '대학'보다 중요한 것(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중요도가 낮다는 뜻이다)은 '그래서 어떻게 살고싶은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무엇'에 해당되는 것은 남은 인생 80년 동안 80번도 더 바뀔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무엇'을 '왜', '어떻게' 할 것이냐 이다. 예를 들어 이런 거다.
무엇 : 교사로서 아이들과 그 가정을 만나는 일
어떻게 : 책 읽기와 글쓰기, 생각 나눔을 통해
왜 : 학생들이 자신을 발견하고 극대화 하도록 돕기 위해서
요즘 초딩들의 장래희망으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업이 유투버와 아이돌이라고 한다. 내 친구들이 초딩이었을 때는 전부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되겠다고 했었다. 내가 대학갈 적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다. 올 해 수능을 쳐 2023년에 대학교 신입생이 되는, 청소년에서 청년이 되는 이들이 훗날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될 때, 세상은 또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있을까.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그러하니, 지금 현재 당신이 '무엇'이 되고자 한다면 그 '무엇'은 당신을 지탱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릴지도 모른다. '무엇'에 기대지 말고, '어떻게'와 '왜'를 고민하며 개인의 경계 시기를 보낸다면 시대의 경계에 조금 더 유연하게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대학에 입학하면,
해방이다! 먹고 놀자! VS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두 부류로 나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느 쪽도 결국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도 실컷 놀아보고서야 노는 게 의미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지금은 노는 데 미련 없어 좋다!)
혹시 본인이 후자쪽에 가깝다면, 1-2년(그 이상이어도 나쁠 건 없다) 고민하고 탐구하고 방황하는 시간을 가져보라. 다만 남들보다 뒤쳐졌나 의심이 든다면, 그 마음은 정상이니 그냥 무시하면 된다. 대신 그 1-2년이 당신의 100년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라.
내 뇌가 가장 말랑하던 시절, 삶에 드리워진 베일이 얇았던 시절, 호기심과 상상력으로 창창하던 시절, 가장 성공 확률이 높았을 내 안의 보석찾기를 난 여전히 하고있다. 이 시간이 괴롭긴해도 싫지는 않다. 회백색의 무딘 돌이었던 나에게서 점점 고유한 표면이 드러나고 감취어졌던 모양새도 가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태어난 자기만의 고유성을 탐구하고 극대화하는 고결한 인생의 숙명을 겨우 인생 스무해 언저리에 섣불리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뿐이다. 그것도 이미 실패로 판명난 수능과 대학 시스템의 거짓에 속아서 말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당신의 모든 순간이 새로운 시작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