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트아크와 모코코 도시락
산은 게임을 좋아하는 평범한 남자 사람이다. 밤새 스타크래프트를 하느라 수업 시간에 모자란 잠을 보충하던 청소년 시절을 거쳐, 공강 시간이면 학교 근처 PC방에서 동기들과 LOL(League Of Legend)을 하다 저녁이 되면 술을 퍼마시고 지하철 첫차를 기다리며 다시 PC방으로 향했던 대학생이 되었고, 지금은 사회인이자 로스트아크의 열혈 유저다. 여느 커플처럼 우리도 게임 때문에 다툰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나는 산이 게임을 하는 걸 싫어하지는 않는다(종종 할 일을 안 하거나 밥 먹을 때 폰을 쥐고 있는 건 다른 문제다).
장르는 다르지만, 나도 만만치 않은 게임 중독자다. (지금은 빠져 있는 게임이 없지만,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을 쓴 이유는 다시 언제 빠지게 될 게임이 나올지 몰라서다) 꼬맹이 때 외할머니댁에서 사촌오빠가 가져온 팩 게임기로 하던 소닉을 시작으로 펜티엄 Ⅲ 컴퓨터로 하던 타잔, 짱구는못말려, 프린세스 메이커 등의 CD 게임들, 내가 경험한 최초의 MMORPG(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수천 명 이상의 사용자가 같은 서버에 접속하여 각자의 역할을 플레이하는 게임) 메이플스토리, 비슷한 시기 넥슨에서 연달아 나왔던 큐플레이, 크레이지 아케이드, 카트라이더까지. 1가정 1 컴퓨터가 당연시되기 시작하며 컴퓨터 게임 산업이 성장하던 시기와 자극에 꼼짝없이 당하는 초등학생 시절이 겹친 탓인지 난 속수무책으로 게임에 빠져들었다. (엄마의 주민등록번호를 이용해 '온라인 맞고'까지 쳤다…)
지는 걸 싫어하던 나는 다른 유저와의 경쟁이 바탕인 게임에는 쉽게 흥미를 잃었다. 대신 '타이쿤'이라 통칭하는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이나, 스토리의 비중이 높은 게임을 좋아했다. 게임 속에서 주어진 캐릭터로 또 다른 내가 되어 성장을 함께할 수 있다는 점은 언제나 매력적이었다. 더불어 이야기로 이어지는 구성은 생동감을 더해주었다. 나는 게임 속에서 놀이동산을 운영하며 롤러코스터에서 내린 손님들의 토사물을 치워주고, 타잔이 되어 치타와 싸우고, 짱구가 되어 초코비를 먹으며 악당을 물리치고, 아빠가 되어 딸을 다양한 직업의 성인으로 키워냈다. (프린세스 메이커의 유저가 왜 엄마가 아니라 아빠인지 내내 불만이었는데, 일본 문화 콘텐츠의 한 축이 되는 사상을 깨닫고 나니 순수하게 즐겼던 게임이 다르게 보이긴 했지만…)
감수성이 폭발하던 청소년기에 음악과 영화, 해외 드라마에 눈뜨면서 게임에의 열정은 조금씩 사그라들었지만,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하는 성향을 톡톡 건드리는 게임이 잊을 만하면 나타났다. 2G폰을 온종일 붙들게 만들던 붕어빵 타이쿤, 생과일 타이쿤, 밭에 농작물을 키우던 더 팜(The Farm), 미니게임천국 등의 간단하고 귀여운 게임들. 본격적인 스마트폰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대학생 때는 밤새 영화를 찍고 수업에 가던 와중에도 아이러브커피에서 손님들에게 에스프레소 꼰빠냐, 도피오 등의 커피를 서빙하고, 중년층까지 게임의 세계로 인도한 애니팡에 중독되곤 했다.
수업시간에도 달리는, 게임에 미친 CC
산과 나는 3학년 2학기에 연애를 시작한 같은 과 CC였다. 한 학번 선배인 산과는 신입생일 때 같이 영화도 몇 번 찍었고 사진 동아리도 하는 등 친분이 있는 사이였는데, 나의 휴학과 산의 군 휴학 기간이 묘하게 우리의 틈을 메워주면서 같은 학년으로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여러모로 쿵짝이 잘 맞았던 우리는 수업이 끝난 후에도 같이 과제를 하거나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냈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친구 사이인지 썸인지 갈팡질팡하던 혼란스러운 시기를 거치다 방학을 맞았고, 여러 사건을 거쳐 결국 새 학기 시작과 동시에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한 과목 정도를 제외하고 교양수업까지 동일한 시간표로 3학년 2학기를 보냈는데(둘이 다른 마음이었거나 중간에 헤어졌으면 어쩔 뻔,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덕분에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붙어있었다. 아침에 학교에서 만나 막차 시간까지 대체 뭘 했을까? 수업 사이엔 공강이 있고, 저녁을 먹은 이후에도 까페에 가는 것 말고는 딱히 데이트에 특별한 일이 없기 마련이다.
우리는 쿠키런을 했다.
요즘 게임 제작사 데브시스터즈의 주가를 떡상시키고 있는 '쿠키런 킹덤'의 시초이자 '쿠키런 시리즈'의 첫 게임인 '쿠키런 for kakao'는 쿠키 모양의 캐릭터가 달리면서 점프와 슬라이드 조작만으로 젤리와 코인을 먹는 단순한 게임인데, 폭풍 성장하던 카카오톡과 연동되는 초기 게임 중의 하나였다. 혼자 플레이하는 게임이지만 더 오래 달리고 많은 점수를 얻을수록 카카오톡 친구끼리 순위가 변하는 시스템이어서, 더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종일 폰을 쥐고 있게 되는 마성의 게임이었다.
나와 산은 가까워질 무렵부터 어쩌다 이 게임에 빠져들어서, 연애 초기에는 거의 미쳐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지루한 이론 수업을 들을 때면 책상 아래에서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산이 아이패드로 쿠키런을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목격한 내 친구가 나에게 '쟤는 무슨 수업 시간 내내 저렇게 큰 화면으로 게임을 하냐'고 할 정도였다(나도 같은 짓을 하고 있어서 할 말이 없었다). 공략파인 산은 인터넷에서 여러 정보를 검색해 나에게 쿠키를 강화하는 법, 코인을 많이 모으는 법, 심지어 유료 재화인 크리스탈을 무료로 최대한 모으는 법 등을 전수해주었고, 맘대로파인 나는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후 산의 말을 들으며 차곡차곡 레벨을 올리고 내 계정을 성장시켰다. 둘 다 게임은 좋아하지만 게임에 돈을 쓰지 않는 타입이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시간을 붓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고, 또는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스마트폰으로 '천사맛 쿠키'와 '민트초코맛 쿠키'로 달려 코인을 벌고, 당시 존재하던 모든 쿠키를 사고, 모든 쿠키를 최고레벨까지 강화하고, 당연히 1등도 달성했다. 그리고 장렬히 흥미를 잃었다.
게임 회사에서의 첫 사회 생활
우연한 기회로 다니게 된 나의 첫 회사는 모바일 게임 제작사였다. 게임을 좋아하긴 했지만 게임회사에 다니게 될 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던 취업준비생 시절, 게임회사에 다니던 학교 선배가 게임 기획에 관심 있는 졸업생 후배를 찾고 있었고, 다른 선배가 나와 그 선배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었다. 지원했던 수십 개의 회사에 떨어지고 다시 영화관 알바를 시작하며 몸도 마음도 모두 지쳐있던 그때, 나는 어떤 회사든 다니고 싶었다. 어떤 회사든 나를 고용해주기만 한다면 최저시급을 주더라도 감사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었다. 게임과 영화는 물론 다르지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콘텐츠를 만들어낸다는 점은 같았다.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스타트업 창업자가 그렇듯, 자기애가 강한 대표와의 면접에서 면접자에게 자신의 성공스토리를 풀어놓게 한 적절한 질문을 던진 덕분인지 면접 자리에서 첫 출근일과 연봉을 정했다. 세상이 빛났고 드디어 사회인이 되었다는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도 잠시, 끝나지 않는 야근과 정신적 스트레스에 이어 70여 명이던 직원이 두 달 만에 10여 명으로 줄어들었고, 월급 100만 원은 보장해주겠다던 대표의 붙잡음을 뒤로한 채 첫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전혀 무관한 업계에서 7개월 간 일하고, 또 회사가 망해서 의도치 않게 퇴사했다. 첫 회사를 나온지 1년 후 다시 상황이 나아진 회사의 부름을 받았고 고작 신입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채 3개월 일했던 나를 다시 찾아주는 것에 마음이 흔들려 재입사했지만, 또 3개월 후 여러 복합적인 이유로 퇴사했다. (내 인생 정말 파란만장하다… 고작 14개월 사이에 업계를 바꿔가며 4개의 회사에 입사한 이 이야기는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풀어야지... )
합쳐서 6개월 정도인 짧은 시간이었지만 게임 기획자로서 게임 내 세계관과 시나리오를 쓰고, 아바타 연출, 콘텐츠 기획 등 게임 내 세부 기획에 참여하는 일은 즐거웠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대표를 제외하고는 직급이 없는 수평적인 문화와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던 그 시간이 아주 좋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영화를 그만두고 나서 영화가 다시 재미있었던 것처럼, 업계에서 멀어지니 다시 이런저런 게임에 눈길이 갔다. 게임회사에 다니면서 이런저런 용어와 지식을 습득하고 나니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게임을 보게 되기도 했다. 학교에서 처음 영화를 배울 때, 어떤 영화를 볼 때마다 갑자기 컷(Cut)과 신(Scene), 숏(Shot)의 크기(인물과 배경을 중심으로 넓게 찍은 Full Shot 또는 Long Shot인지, 가까이 찍은 Close-up Shot인지 등)를 분석하게 되었던 것처럼, 게임을 이루는 세계관이나 세부 기획의 연출 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걸 만들기 위해 그들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지도…
연애 초엔 쿠키런, 신혼 초엔 로스트아크
쿠키런 시절의 우리를 재현시킨 게임은 '로스트아크'였다. 연애 초 쿠키런에 미쳐있던 우리는 신혼 초 로스트아크에 빠졌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식 오픈한 MMORPG 로스트아크는 스마일게이트에서 무려 제작비 1,000억 원을 들여 7년 동안 개발한 대작이었고, 수많은 게이머의 기대작이었다. 정보에 빠른 산도 이 게임을 기다리고 있었고 내게 같이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두 번의 이직과 결혼까지 6개월 사이에 해치우고 이제 좀 숨통이 트였던 나는 강력한 자극과 보상이 필요했고 100% 유희를 위한 게임을 시작했다. 그리고 로스트아크의 퀄리티와 스케일에 압도당했다. 로스트아크의 기본 스토리는 '악마로 인해 위험에 처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아크'를 찾는 모험가(플레이어)'의 이야기다. 하나의 거대한 세계관으로 구성된 게임 속 세상에서 플레이어는 여러 퀘스트를 수행하며 '아크'를 찾아 나서는데,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며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된 기분을 생생히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RPG가 이런 흐름으로 게임을 진행하지만, 로스트아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중간중간 등장하는 컷신이었다. 이야기를 설명하고, 더 좋은 몰입감을 느낄 수 있는 장치로 3D 애니메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마치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연출과 퀄리티였다. 게임 기획자로 일할 때 나도 게임 속 세계관을 구성하고 대사 등 시나리오를 쓰는 작업을 했었던 터라 차원이 다른 대작 콘텐츠에 압도되었고, 이러한 작업을 진행한 기획자와 개발자들에게 부러움을 넘어 경외심을 느꼈다.
PC방, 그곳은 천국이었노라
산과 나는 첫 신혼집이었던 오피스텔 원룸에서 아이맥과 데스크탑을 나란히 놓고 퇴근 후에 열심히 게임을 하다, 주말에는 PC방으로 가서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내가 그동안 즐겼던 게임들은 보통 모바일 게임이었고 결혼 전에도 PC방 데이트를 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로스트아크 덕분에 나는 PC방의 즐거움을 알아버렸다. PC방에 앉아 있으면 클릭 한 번으로 온갖 먹거리가 내 앞에 놓였는데, 심지어 다 맛있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다이어트의 반작용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음식을 아무 죄책감 없이 먹어 치우던 당시의 나는 스팸마요덮밥을 먹으며 눈앞의 악마를 처단하고, 바삭바삭 감자칩을 씹으며 말을 타고 달렸다. 어떠한 스트레스도 없는 욕구 충족의 시간, 그곳은 천국이었다.
천국으로 가는 계단은 아주 잠깐 열려 있다 아쉽게도 곧 닫혔다. 로스트아크 개발팀이 정식 출시 전에 7년 동안 만들었던 스토리 콘텐츠는 정교한 퀄리티 탓인지 게임을 시작한 지 2-3주 만에 끝나버렸다. 큰 스토리 라인 이외에도 소소하게 즐길 수 있는 사냥 등이 있었지만 기존에 했던 것을 반복해야 하는 방식이 많아서 금방 질렸다. 약 한 달을 기다려 업데이트된 콘텐츠는 또 하루 만에 끝났고 우리의 PC방 데이트는 그렇게 짧고 굵게 마감되었다.
퀘스트 대신 해주는 아내
나는 그만두었지만, 산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로스트아크를 즐기고 있다. 위기를 겪던 로스트아크가 시즌 2 출시 이후에 다시 승승장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유저와의 적극적인 소통으로 꽤 긍정적인 행보를 보여주는 것 같다.
지금의 로스트아크는 유난히 매일 해야 하는 '숙제'가 많은 게임이다. 매일 저녁 8시만 되면 급하게 컴퓨터 앞으로 달려가 이벤트 과제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이없으면서도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뭘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정확히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숙제를 꾸준히 해서 주어지는 보상을 차곡차곡 모아야 계정에 도움이 되나 보다. 산은 요즘 숙제를 하기 귀찮거나 다른 일로 집 밖에 있을 때 날 이용해 이 숙제를 시킨다. 던전을 돌아 몬스터를 잡게 하거나, 거대 뿅망치로 계속 땅을 두드려야 하는 종류의 일이다. 바다에서 배를 타고 목적지까지 이동만 하는 것도 있고, 30분 동안 가만히 서서 계속 낚시를 하기도 하고, 해변에서 서핑 연습을 하는 숙제도 있다.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에는 삐에로 같이 생긴 거대 몬스터를 잡고 춤을 추는 이벤트도 있었다. 처음 해보는 콘텐츠는 재미있어서 기꺼이 즐겁게 해주지만, 같은 걸 반복해야 할 때는 나도 엄청 귀찮아하면서 싫어한다. 그럼 산은 조금 토라질 때도 있고, 그냥 단념하고 스스로 지루한 숙제를 해내기도 한다. 내가 재미있어하면 또 신나서 다음에 또 시킬 궁리를 한다.
모코코 도시락을 구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
최근에 로스트아크에서는 여러 F&B 기업과 홍보를 위한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중 하나로 편의점 이마트24에서 '모코코 도시락'을 출시했다. '모코코'는 게임 속 장소의 이곳저곳에 숨겨져 있는 씨앗인데 이를 활용해 귀여운 캐릭터를 만드는 등 홍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모코코 도시락을 사면 게임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쿠폰이 들어 있다는 소식에 산은 해당 도시락이 출시되는 날부터 시간 날 때 이마트24에 들러서 사와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모코코 도시락이 출시되는 날은 마침 내가 건강검진을 하는 날이었다. 오전에 일찍 병원에 갔다가 검진을 마치고 나와서 근처에 이마트24가 있는지 검색했더니, 2곳이 있었다. 거리가 아주 가깝진 않았지만 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 편의점에 없어서 지도 앱을 따라 두 번째 편의점으로 향했다. 지도에 표시된 위치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편의점이 보이지 않았다. 건물을 빙글빙글 몇 번 돌고 나서야 폐점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허탈한 마음으로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타고 내려서 집 근처 편의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도 도시락 쇼케이스는 비어 있었다. 그때 알았다. 이 도시락을 구하기 위해서는 편의점의 도시락 입고 시간을 알아야 한다.
"혹시 도시락은 언제 들어와요?"
"지금 있는 도시락이 전부예요."
"아니요, 매일 도시락 입고되는 시간이 언제예요?"
"아~ 아침 8시랑 저녁 8시에 두 번 들어와요."
"감사합니다!"
3번이나 허탕이었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고, 재택근무로 일을 처리하고, 저녁을 먹고 8시가 되었다. 경험상 8시에 딱 맞춰서 입고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어서 15분쯤 지난 후 다시 그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또다시 만난 빈 쇼케이스. 다른 도시락도 남아있지 않는 걸 보니 아직 입고 상품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기다릴까 잠깐 고민했지만 상품이 도착하고 전산으로 입고 등록을 하고 진열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판단하에 다시 터덜터덜 집에 갔다.
또 하루가 지나고, 퇴근길에 있는 또 다른 이마트24를 방문했다. 심지어 집에 가던 길에 회사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규모가 조금 더 큰 매장이라 이번엔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과는? 역시나 꽝이었다. 이쯤 되자 '모코코 도시락'이 출시된 게 맞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모든 매장에 공급되는 게 아닌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없을 수가 있지? 이쯤 되면 분노와 함께 오기가 생긴다. 내 너를 구하고 말리라…(화르륵)
금요일 저녁, 도시락 입고 시간을 알려줬던 편의점에 다시 들렀다. 8시 30분이었다. 8시에 입고된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있지 않을까? 했는데, 없었다. 없어, 없어, 오늘도 없어! 대체 언제 있는 거지? 8시에 입고된다고 했는데 왜 없는 거야!!! 화가 났지만 난 도덕을 아는 선량한 시민이고, 편의점에서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대신 착 가라앉은 어두운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나왔다.(소심한 복수)
토요일 아침, 오전에 다니고 있는 기타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다시 같은 편의점으로 갔다. 8시보다 3시간이나 지났으니 분명 입고는 되었을 거다. 오늘은 있어야만 했다. 우리 동네에는 토요일에는 늦잠을 자는 지친 직장인이나 대학생이 많을 거야… 그러니까 꼭두새벽(?)부터 도시락을 사러 나올 리가 없어… 제발… 플리즈… 문을 열고 짤랑, 하는 소리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급하게 도시락 쇼케이스 앞에 섰고, 눈앞에 도시락을 들고 조금 수상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코코 캐릭터가 보였다. 있다! 드디어 있어! 심지어 제육볶음 도시락과 에그 스크램블 덮밥, 총 2종이 모두 하나씩 있었다. 점심까지 해결이다! 누가 오기 전에 얼른 계산대로 갔다.
"혹시 전화하신 분인가요?"
"네? 아니요…?"
"어머, 이거 찾는 분이 전화하셨었는데… 어쩌지? 아마 오실 것 같은데…"
"아 그래요…?"
갈등의 순간, 전화를 먼저 한 사람은 있지만 내가 먼저 도착했다. 편의점에서 그를 위해 따로 빼 둔 건 아니다. 이건 선착순의 원리로 엄연히 내 것이야… 난감해하시던 직원분도 나에게 팔지 않을 명분은 없었는지 그냥 계산을 진행해 주셨다.
"근데 이게 뭐예요? (대체 뭐길래 사람들이 전화해서 찾는 거죠?)"
"아, 여기 게임 쿠폰이 들어 있어요."
"게임 쿠폰이요?"
"네, 저도 몇 번 왔는데, 없어서 이제 겨우 구했어요. 남편이 사 오라고 해서…ㅎㅎㅎ(조금 창피)"
"세상에 ㅋㅋㅋㅋㅋ 그렇구나, 이게 하나씩만 들어오거든요."
"아, ㅎㅎ 감사합니다!"
드디어 모코코 도시락을 손에 넣은 기쁨과, 하나만 사고 하나는 남겨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 조금 혼란스러웠다. 인정머리 없는 차가운 도시 인간이 된 것 같았다. 근데 집에 먹을 게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금방 다시 구하셨길 바라요…
현관 도어락을 열고, 의기양양하게 도시락을 들고 들어 왔다. 산의 눈앞에 반짝이는 모코코 도시락을 내려놓았다.
"짠!!!"
"오… 사 왔네."
뭐지 이 시원찮은 반응은? 내가 지금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이걸 구해왔는데? 고작 이런 반응을 보려고 내가 그 고생을 했다고?
"뭐야? 왜 별로 안 좋아해? 내가 얼마나 힘들게 이걸 구했는데?"
"난 사실 너가 성공한 걸 알고 있었어."
"왜? 어떻게?"
"내 카드로 결제했잖아."
산은 이미 문자로 날아온 '이마트24, 8,500원'을 보고 내가 모코코 도시락을 손에 넣었음을 직감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런 반응은 좀 아니잖아?
"알고 있었어도 기쁘지 않아? 내가 몇 번을 고생해서 이걸 구해왔는데? 왜 반응이 그래?"
"우와!!!!!!!!!! 너무 좋다!!!!!!!!! 고마워~~~~~~~"
후………….
마음에 안 들지만 배고프니 일단 먹어야지. 포장을 뜯으니 '모코코 도시락 전용 스페셜 쿠폰'이 들어 있었다. 그걸 보니 산의 얼굴이 활짝 폈다. 웃기는 녀석. 도시락을 하나씩 전자레인지에 돌리고 식탁으로 가져왔다.
아쉽게도 도시락의 구성은 단출했고, 그렇게 맛있지도 않았다. 짭조름한 제육볶음은 나쁘지 않았지만 기대했던 에그 스크램블 덮밥은 이름이 무색하게 스크램블 에그는 거의 없고, 얇고 뻣뻣한 달걀 지단 아래 소량의 케첩에 버무린 밥이 전부였다. 다른 반찬 없이 먹기엔 무(無)맛에 가까웠다. 그래, 쿠폰을 위한 도시락이었으니 맛은 아쉽지만, 목적은 달성했어. 힘든 여정이었구나… 하…
여기서 궁금한 점, 왜 모코코 도시락은 나만 구하러 다녔지? 산은 집에서 가만히 편하게 내가 구해 오길 기다리다가 쿠폰만 득템했다. 그는 내 분노와 집념을 노린 거다. 그냥 한번 사다 줘~ 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든 열 받아서 구해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거다. 여우 같은 녀석… 얄미워서 꿀밤을 먹였다. 나를 간파하고 부려먹은 벌이다, 이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