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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Nov 29. 2021

주름진 손으로 우리를 먹이던

떠나보낸 후 더 그리운, 또 그리울 당신의 맛

이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을 때 찾아온다. 얼마 전 산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우리의 결혼기념일이라 밖에서 점심을 먹던 중, 아버님께 '할머니가 수술실에 들어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요양원에서 지내시며 건강을 되찾고 계셨던 터라 안심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런 소식이었다. 전날 배가 아프다고 하셔서 병원에 갔는데 검사 결과 심혈관이 막혀 있는 상태라 급하게 수술을 진행했지만, 두 번의 수술 모두 약한 혈관과 심장이 버틸 수 없어서 끝내지 못했다. 결국 그날 밤을 넘기지 못하셨다.


다음날 오후부터 장례를 시작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꽃에 둘러싸인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봤다. 기분이 이상했다. 구순이 넘었어도 정정하시던, 꼿꼿한 모습으로 어딘가에서 걸어나오실 것 같았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마주한 건 이튿날 입관식에서였다. 눈을 감고 코에 솜을 넣은 할머니가 베이지빛이 나는 수의를 입고 차가운 침대에 누워계셨다. 처음 보는 생경한 장면이었다. 잠든 것과는 분명히 다른, 핏기 없는 할머니의 육체를 바라본 가족들은 "아직 이렇게 고운데..."라는 작은아버님의 말과 앞다투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곁으로 다가가 한 명 씩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아들들과 며느리들, 손자들, 손자며느리들, 증손주들까지 최선을 다해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마지막 말을 고르고 골라 입 밖으로 꺼냈다.


"엄마, 이제 더 고생하지 마시고 좋은 곳에서 편히 쉬세요."

"할머니와 함께할 시간이 더 많이 남은 줄 알았는데..."


눈물을 펑펑 쏟는 산의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주먹을 꼭 쥐고 눈물만 흘리는 사촌동생의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버님의 "엄마, 잘 가."라는 말에 눈물이 더 쏟아졌다.





"어머니의 며느리로 살아서 정말 행복했어요."

어머님의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불과 몇달 전, 어머님은 어머니를 떠나보내셨다. 6월이었다. 산은 너무 예전에 찍어 해상도가 다 깨진 외할머니의 영정 사진을 보며 사진이라도 한장 찍어드렸어야 한다며 많이 울었다. 그리고 얼마 후 어머님은 막내오빠도 잃었다. 할머니가 갑자기 병원에 가신 그날은 외삼촌의 49재를 지낸 3일 후였다. 같은 절에 엄마와 오빠를 모시고, 외롭지 않겠다고 아픈 마음에 위안을 얻던 어머님이셨다.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님은 아버님과 함께 달려가 밤새 앰뷸런스를 함께 타고 두 개의 병원을 오가셨다. 그렇게 밤을 새고, 아침에 회사에 다녀와 할머니의 두 번째 수술까지 실패했고 가망이 없다는 말을 들은 어머님은 다른 병원에 갔으면 살릴 수 있었을 거라고, 처음부터 혈관 시술을 잘 하는 큰 병원에 갔어야 한다고 원통해하셨다. 


"우리가 너무 아무 것도 몰랐어. 내가 주변에도 물어보고 검색도 해보니까 여기 말고 다른 병원에서는 80대 노인도 수술 잘 해서 다 살았대. 처음부터 요양원 근처 병원에 갈 게 아니라 거길 갔어야 해. 지금이라도 가보자. 너무 억울해."

"그랬을 수도 있는데, 의사가 그랬어. 장기가 90년을 썼으면 제 수명을 다 한 거라고. 90년을 썼으면 얼마나 낡았을 거야. 엄마의 운명이 여기까지인 거야."

"........ 이제 정말 고아가 돼버렸네."




3년 전 2월, 외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엄마는 같은 말을 했다. 이제 정말 고아가 되어버렸다고. 외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아주 오래 혼자 사셨다. 여섯 딸이 모두 결혼하고, 같이 살자고 해도 매번 싫다고 혼자 지내시다가, 93세의 나이로 요양원에 가신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바로 부산으로 내려가지 못했다. 꼭 가고 싶던 회사의 면접이 잡혀 있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 날이 면접일이었고, 담당자에게 연락해 사정을 말하며 면접 일정을 당기거나 미룰 수 없냐고 물었지만 불가능하다는 답을 받았다. 결국 다음 날 오전, 외할머니는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관으로 들어가실 때 나는 활짝 웃으며 미래의 내 상사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외할머니의 마지막 모습과 바꾼 그 회사는 3년 동안 내 몸과 마음을 모두 갉아 먹었다. 지옥같은 순간이 닥칠 때마다 그날이 떠올랐다. 외할머니가 그날 면접에 가지 말라고 신호를 주신 건데, 나는 왜 그 신호를 무시하고 불효를 저지르면서까지 그 면접에 갔을까. 분명 나에게 기회를 주신 거였는데. 마지막 인사를 전하지 못한 죄책감과 후회가 뒤섞였다.


엄마는 그날의 외할머니가 너무 고왔다고 했다. 





추모공원에 산의 할머니를 모시고 돌아오는 버스 안이었다. 어머님이 갑자기 일어나셔서 모두를 주목시켰다. 일본에 있어 자가격리 등으로 인해 장례식에 올 수 없었던 산의 사촌누나가 페이스북에 할머니를 추모하는 글을 올렸다고 했다. 그 글을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읽기 시작하셨다.


"오늘 저희 할머니가 소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타지생활하면서 가장 우려했던 일이 급작스럽게 찾아왔네요.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코로나 상황에서 격리면제 서류들 챙기다보면 결국 발인날까지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한국행을 포기했습니다. 코로나 끝나면 일본에 꼭 모시고 와서 맛있는 것도 사드리고 싶었는데, 못 해드린 것만 계속 생각납니다. 

부모님이 해외에 계실 때 2년 넘게 할머니께서 매일 밥을 차려주셨는데, 감사한 것도 모르고 한술 뜨는 둥 마는 둥 했던 일이며 밖에서 혼자 먹고 들어갈 때는 할머니가 혼자 밥을 드셨을 텐데 식사 잘 챙기셨냐고 인사 건넨 날도 몇 안되는 것 같아요. 빈소도 못 가게 되어서 전해지지 못할 편지와 화환을 보내면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딸 낳아서 섭섭하다고 지어진 이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꽃처럼 예쁜 김화자 여사님으로 불렸습니다. 젊어서 혼자 되시고 험한 시장에서 생선 장사 하시며 세 아들을 키워낸 자랑스러운 우리 할머니.

마지막 인사도 못 하러 가는 못난 손주대신 가까운 곳 지나시거나 혹 생각나실 때 저희 할머니 하늘에서 평안하시길 기도해주세요."


조의금을 정산하면서 언니의 이름으로 들어온 봉투 몇 개가 있었다. 조모상에도 지인이 오나... 하고 의아했었다. 그래서 몇 분이 들러 주셨구나...를 깨달으며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오지 못하는 손녀의 아픈 마음을 너무 알겠어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울음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라 아파왔다. 산은 소리내 울었다. 장례식장에 다시 도착해서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서 난감했다. 슬픔이 휘몰아쳐서 목놓아 엉엉 울고 싶었다.





산은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할머니가 밥을 차려주시던 순간들이 떠올랐다고 했다. 할머니가 계셨던 큰아버지댁에 가면 할머니는 종종 라면을 끓여주셨는데, 그 때마다 라면을 조금이라도 건강하게 먹이기 위해서 항상 면을 따로 끓여서 기름기를 뺀 다음 국물에 다시 끓여주셨다고 했다. 번거롭고 힘들어도 손주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음식을 먹이려는 그 마음을 생각한다. 


얼마 전 추석에는 결혼하고 처음으로 명절 당일 아침에 우리 할머니댁에 갔다. 작년까지만해도 할머니댁에서 차례를 지냈었는데, 올해부터는 기제사만 지내고 명절 차례는 지내지 않기로 했다. 그래도 가족들이 모여 식사를 해야하니 전날 엄마와 열심히 튀김을 튀기고 동그랑땡을 부쳐 가져갔다. 할머니는 탕국을 한가득 끓이셨다. 차례는 지내지 않지만 명절 음식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부와 어묵, 새우, 낙지, 조갯살 등이 가득 들어간 할머니의 탕국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비슷한 재료를 넣고 끓여도 엄마가 끓여준 맛과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30년 가까이 먹어온 그 맛은 질리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아서 명절이면 아직도 할머니의 탕국을 먹을 생각에 들뜬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온 가족이 먹고 남을만큼 탕국을 넉넉히 끓여서 내 몫을 따로 한가득 봉지에 담아 주셨다. 허리가 아파도 쪼그려 앉아 한솥 가득 막내손주가 좋아하는 탕국을 끓여 먹이고 따로 챙겨주시는 그 마음에 안타까우면서도 매번 사랑받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열무를 다듬는 할머니 옆을 서성거리면서 한참을 있었다. 다리 아프니 들어가서 앉으라고 하셨지만 왠지 할머니 옆에 있고 싶었다. 할머니는 "할머니 곁에 있고 싶나." 하시며 그런 나를 더는 말리지 않으셨다. 겨우 일년에 두세 번 보던 손녀가 곧 해외로 떠나 그보다도 더 자주 볼 수 없을테니,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은 할머니와 나의 마음은 같을 것이었다. 결혼하고 공부하러 간다는 손녀에게 잔소리를 할 법도 한데, 할머니는 내 생각을 묵묵히 들어주고 하고 싶은 일 많이 하라며 응원해주셨다. 주름진 손으로 쉬지 않고 열무를 다듬으면서.

 



할머니가 싸주신 탕국을 집에 와서 데워 먹으면서, 좋아하는 나를 보고 산은 이게 내가 먹는 할머니의 마지막 탕국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다.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면 빨라도 3년 후일텐데, 그때는 더이상 할머니가 탕국을 끓여주실 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언제까지나, 명절이 되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탕국. 너무 많이 싸주셔서 종종 다 먹지 못하고 흘려보내던 지난 시절의 그것이 너무나도 아까워서, 몇끼를 내내 쉬지 않고 꼭꼭 씹고 음미하며 모두 내 몸에 넣었다. 




그날의 탕국이 마지막이 아니길 바라본다. 언젠가 마지막일 수 밖에 없는 그 맛을 아직은 보낼 자신이 없다. 이기적인 손녀는 몇 번 더 그 주름진 손이 나를 먹여주면 좋겠다.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는 할머니의 탕국 사진. 차례상에서 작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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