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부는데 도리 있어? 맞아야지

봄바람 부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수 있나 어깨춤도 추고 콧노래도 불러야지

by Rana


1. 살랑살랑 봄이로구나


가끔식 전(前) 00대학교 부총장님께서는 내게 시 한 편씩을 배달해주신다. 팍팍한 일상의 여백을 시의 언어로 채워주시는 그 정성스러운 루틴은 나의 아침을 깨우는 가장 고상한 알람이다. 그러던 얼마 전, 김용택 시인의 '봄날'이라는 시가 도착했다.


봄날/ 김용택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이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거라


화면 캡처 2026-03-17 134601.jpg


순간,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렸다. '흙 묻은 호미'라는 일상의 노동을 뒤로 한 채, '이쁜 여자랑 손잡고 매화꽃 보러 가는' 그 천연덕스러운 일탈이라니.


봄은 역시 그런 계절인가 보다. 성실히 일구던 텃밭조차 기꺼이 내팽개치고, 다정한 인연의 손을 잡고 가장 눈부신 곳으로 숨어들고 싶게 만드는 계절. 참을 수 없는 연애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그리하여 내가 여전히 뜨겁게 살아있음을 확인하고야 마는 생의 찬란한 한 조각.





2. 난봉꾼들의 추억 소환


이 시를 읽으며 문득 페이스북에서 본 신휘 시인님의 글이 떠올랐다. 중년의 시인이 "나 젊었을 때 여자 참 많이 만났지"라며 짐짓 능청스럽게 과거를 고백하자, 이에 질세라 유건상 조각가님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신다. "내가 젊었을 때는 한마디로 난봉꾼이었지!"


지금은 시골에서 묵묵히 포도 농사를 지으며 예술혼을 불태우고 계시는 유 조각가님이지만, 그 투박한 손끝에 남은 감각은 여전히 뜨거운 청춘의 온도를 기억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다들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지만, 봄기운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옛 추억을 소환하며 자신들이 얼마나 뜨거웠던 연인들이었는지를 경쟁하듯 늘어놓는 모습이 얼마나 정겨웠는지 모른다.


나는 장난기가 발동해 부총장님이 보내주신 김용택 시인의 시를 류 조각가님에게 전송했다. 그러자 곧바로 기가 막힌 답장이 날아왔다.




봄날 / 유 조각가


나 찾다가

작업실에

물감 묻은 붓만 있거든

이쁜 라나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거라


'이쁜 여자' 자리에 슬그머니 '이쁜 라나'를 끼워 넣은 조각가님의 유쾌한 변주! 나는 휴대폰을 붙들고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아, 이 얼마나 생기 넘치는 노년인가.


우리가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연애 세포가 사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죽어가는 세포들 사이로 봄바람이 스미면, 그리움은 더 진해지고 추억은 더 선명한 색채로 채색된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을 꿈꾸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매화꽃 길을 걷는 상상만으로도 소년처럼 설레하고 있었다.


joshua-earle-wyaMgb1ToUI-unsplash.jpg





3. 살아있다는 것은 흔들리는 것


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내 삶에 특별한 사건이 터진 것도 아니고, 로또가 당첨된 것도 아닌데 기분이 맥락 없이 '붕붕' 뜬다.


발바닥이 지면에 닿지 않고 지면 위 5cm 정도 떠서 걷는 기분. 일봉 스님은 불교가 '발견'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오늘 내 안에서 '아직 죽지 않은 소녀'를 발견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잇값 좀 하라고, 이제는 그런 설렘보다는 안정을 찾아야 할 때라고. 하지만 유 조각가님의 재치 있는 시를 읽으며 깨달았다. 안정이란 죽음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살아있다는 것은 흔들리는 것이고, 흔들린다는 것은 바람에 반응한다는 뜻이다.


지금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섬진강의 봄물일까, 아니면 누군가 던진 유쾌한 농담일까. 아무 일도 없어서 오히려 더 완벽하게 '붕붕' 뜰 수 있는 이 기분은, 오직 봄만이 줄 수 있는 신의 선물이다.


joel-overbeck-fGPGd9PFd3w-unsplash.jpg




4. 혼자라도 봄바람 맞으러 갈까?


이 뜨는 기분을 주체할 수 없어 "바람 좀 맞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그런데 문득 멈칫하게 된다. "누구랑 가지?"


우리는 늘 누군가와 함께여야 '제대로 된' 봄맞이를 한다고 믿는다. 시 속의 주인공처럼 이쁜 여자의 손을 잡거나, 멋진 조각가의 손을 잡아야만 매화꽃이 더 예뻐 보일 것 같다. 누구랑 가면 더 좋겠지만 아무나와는 갈수 없다. 그렇다면, 같이 갈 사람이 없다면, 혼자라도 바람 맞으러 가면 어떨까?


같이 추억을 만들 사람이 없어 조금은 싱거운 '봄바람 나들이'가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혼자 바람을 맞으러 나가는 행위 자체가 나 자신을 향한 가장 적극적인 봄맞이가 아닐까. 유 조각가님이 작업실에 붓만 남겨두고 떠나듯, 나도 내 일상의 무게를 책상 위에 던져두고 무작정 밖으로 나가 보는 것이다.


어쩌면 그 길 끝에서 나는 정말 ‘바람만 맞고’ 돌아올지도, 혹은 운명적인 누군가가 바람처럼 내게 스며들지도 모른다. 설령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맹물 같은 봄바람만 맞고 온들 어떠랴. 간질간질한 봄기운이 내 가슴에 들어와 크게 심호흡 한 번 한 것만으로도, 겨울내 웅크렸던 내 영혼의 감각은 충분히 기지개를 켰을 테니.


joe-yates-wNOymf_yTUA-unsplash.jpg




5. 추억이라는 오늘을 사는 최고의 연료


남에게 하는 봉사보다 나에게 하는 봉사가 먼저라고. 나를 아름답게 가꾸고 내 기운을 맑게 하는 것이 주변으로 좋은 기운을 퍼뜨리는 진짜 도(道)라고 일봉스님은 말씀 하셨다.


오늘 나의 '봄맞이'는 바로 나 자신을 향한 봉사다. 붕붕 뜨는 마음을 억누르지 않고, 바람 맞으러 가고 싶은 충동에 나를 맡기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내 삶에 대한 예의다. 내가 즐거워야 내가 피어나고, 내 가족이 즐겁고, 내 문장이 즐거워야 독자들이 즐겁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추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추억을 연료 삼아 오늘을 더 뜨겁게 연애하듯 사는 것이다. 신휘 시인이나 유 조각가님처럼 과거의 '난봉꾼' 기질을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는 여유, 그것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근사한 노년의 모습이다.





6.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거라


이제 짐을 챙기자. 작업실에 물감 묻은 붓만 남겨두고 떠난 류 조각가님처럼, 나도 내 고민이 묻은 펜을 내려놓고 일어선다. 나를 찾는 사람이 있거든, 텃밭에 호미만 있거든, 혹은 브런치 글이 올라오지 않거든 그저 이렇게 생각해주길 바란다.


"이쁜 라나가 바람 맞으러,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 줄 알거라."


혼자면 어떻고 둘이면 어떠랴. 내 마음이 이미 매화꽃잎처럼 흩날리고 있는데. 바람 맞으러 가서 진짜 바람을 맞게 되더라도, 그 바람 끝에 묻어올 매화 향기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의 봄은 이미 완성되었다.


올봄, 당신의 작업실에는 무엇이 남겨져 있는가? 당신의 텃밭에는 흙 묻은 호미가 놓여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도 이제 그만 바람 맞으러 떠날 때다.




봄이다. 바람 맞기 딱 좋은 날이다.


#바람맞기좋은날 #봄바람 #추억은오늘을사는연료 #섬진강매화꽃 #봄나들이 #봄이로구나




marie-michele-bouchard--DDmrbmcP3E-unsplash.jpg


매거진의 이전글철밥통속 침묵의 소각로; 무관심속 사라지는 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