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나이 들어 간다는 것
진실이 무엇인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혼자 사는 남자의 집에 여자가 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은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기 충분하니까. 그 자극적인 소설의 소재를 던져준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이 그를 폭발하게 했다.
제주도 행사 세팅과 진행을 위해 출장 중이던 그는 고혈압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뵙기 위해 급히 육지로 올라왔다. 다음 날 새벽 다시 현장으로 떠나야 하는 그 짧고 긴박한 시간 속에서, 그는 속에 담아두기엔 너무 무거운 진실에 대해 내게 시시비비를 따지러, 아니 속에 쌓인 울분을 토하러 온 것이었다.
옆에서 쏟아지는 말들을 늘 듣는 잔소리처럼 귓등으로 흘리며 차창 밖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정을 향해가는 시간. 가로등 불빛 아래 이른 봄이라 아직 초록이 돋아나지 않은 마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그 나무를 멍하니 바라보는데 어느순간 나무의 모습이 아이에게 젖을 물려 생명을 건네고 난 뒤 비대칭으로 내려앉은, 처진 짝짝이 가슴의 늙은 여자로 변해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는 한참을 쳐다보며 나무의 내재된 욕망으로 뒤틀어진 몸뚱아리 선을 눈으로 따라 그렸다.
성급하게 피어난 목련과 벚꽃 만을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에게 저 나무는 비쩍 말라 볼품없는 자신도 좀 쳐다봐 달라며 처절하게 서 있다. 겨우내 힘들게 살아남은 저 나무의 노골적인 유혹이 이 상황과 오버랩이 되면서 왠지 슬프게 느껴졌다.
나는 무엇을 확인하려 했기에 그런 행동을 했을까. 섹시한 할머니를 나이들어가고 싶다는 것이 내 소원중 하나이다. 여자는 늙어 죽는 그 순간까지 여자임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은 본능일 것이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 우리는 그 욕구를, 그 뜨거운 본능을 심해(心海) 깊은 곳 바닥으로 집어 던지고 ‘제3의 성’으로 살아간다.
여자가 중년이 되면 우스개로 하는 소리가 있다. 이제는 꾸미는 것보다 가리는 것이 일이고, 하루가 다르게 처져가는 살로 인해 중력과 싸우는 것이 하루 일과라는 식의 자조 섞인 농담들. 지금 내가 그 나이를 훌쩍 넘겼고, 육십을 몇 년 남겨두고 있다.
육십이라니. 환갑이 되어간다는 건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의 나이가 아닌가.
어떤 소리를 들어도 깨달음이 깊어 어긋나거나 거슬림이 없어야 하는 나이. 하지만 차 안에서 그의 울분을 들으면서도 기괴한 나무의 형상에 마음을 빼앗기는 나는 여전히 이순과는 거리가 멀다. 내 안에는 아직도 철딱서니 없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 같은 정신세계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남들이 납득할 수 있겠어? 소문나면 당신만 억울한 피해자가 되는 거야. 우리 얼굴에 똥칠 하는거고"
그의 물음에 나는 여전히 입을 다물었다. 감독은 도덕과 상식을 말했지만, 나는 저 마른 나무가 드러낸 '말라가는 욕망'에 시선을 뺏겼다. 타인의 납득을 구해야 하는 나의 처신보다, 지는 해처럼 저물어가면서도 끝내 자신의 여성성을 비틀린 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저 나무가 꼭 지금의 나 자신 같았다.
봄이 오고 있지만, 내 앞의 나무는 여전히 마른 가지를 뻣은 채로 처진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육십을 눈앞에 두고도 여전히 철들지 못한 채, 오늘 밤 나는 타인의 상식이라는 틀 밖을 벗어나는 위험한 짓을 했다는 말에 제대로 된 해명도 포기한채 차창 밖 저 나무의 뒤틀린 곡선을 쫒아가고 있다.
심해로 가라앉히지 못한 본능이 마른 나무의 가지 끝에서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칼 융은 '에로스'를 생명의 근원이라 하였다. 나이가 들어도 여성성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은 단순히 미련이 아니라, 나의 존재가 아직 소멸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가장 처절한 생존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성(性)이라는 것은 마음(心)과 생명(生)이 합쳐진 글자이고 인간이 살아있는 한 그 본질적인 생명력은 멈추지 않는다.
세상은 나이가 들면 욕망이 거세된 '무성(無性)의 존재', 혹은 '제3의 성'으로 우리 여자들를 분류하려 하지만, 우리 안의 에로스는 저 마른 나무의 뒤틀린 가지처럼 죽는 순간까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웅변하려 하고 있다.
칼 융(Carl Jung)의 '아니마' : 융은 남성 안의 여성성을 '아니마'라고 불렀지만, 동시에 여성이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여성적 에너지를 어떻게 통합하고 표현하느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죽을 때까지 여성성을 놓지 못하는 것은 단순히 이성에게 잘 보이려는 욕구가 아니라, 나의 생명력(Eros)을 확인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이다.
자기애적 리비도(Narcissistic Libido) : 프로이트 이후의 심리학자들은 나이가 들어도 '여자'이고 싶은 마음을 '자아를 유지하려는 생존 본능'으로 해석하였다. 육체가 노화될수록 심리적으로는 더욱 강렬하게 자신의 본질(여성성)을 붙잡아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에로스' : 철학에서 에로스는 단순히 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결핍을 채우려는 거대한 창조적 에너지'라고 한다. 육체가 말라가는 중년의 여성이 여성성을 놓지 못하는 것은, 사라져가는 아름다움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다움에 가닿으려는 열망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 그녀는 저서 <노년>에서 "노인은 단순히 노인이 아니라, 여전히 욕망하고 느끼는 주체"라고 말했다. 사회가 노년의 여성을 '제3의 성'으로 분류하려 할 때, 끝까지 여성성을 고집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 저항하는 주체적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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