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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Apr 16. 2024

빨랫대

 리만 차지할 것 같아서 빨랫대 없이 지냈다. 귀찮아서 안 샀던 것들, 안 했던 것들이 있다. 해 보니 편하고 자리 차지도 적다. 숨길 데도 많다. 아직 그런 게 더 남았다.


 언젠가 해야지 미뤄놨던 것들이 어느 순간 너무 많아졌다. 이젠 그게 어떤 것들이었는지도 까먹었다. 고작해야 사소한 것들. 일본어 공부, 봐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책, 덜컥 사 버린 악기 배우기. 당장 급한 전자레인지도 3년째 있을 자리에 없다. 집에서 밥을 잘 안 먹는 이유는 바빠서가 아니라 전자레인지가 없어서다.



 고 싶은 게 전보다 적어지고, 꿈도 전보다 작아졌다. 여기저기 정신 상태를 진단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고 싶은 게 적어진 건 우울하다는 신호다, 같은 말을 쉽게도 한다. 겁을 먹고 군살 빼듯 덜어내려 보니 그렇게 불행하지도 않은 것 같다. 회사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꼭 번아웃이 아니듯이.


 허겁지겁 나가는 출근길, 차 창문 밖으로 비가 내려 여행 가는 기분이 든다. 습관처럼 듣던 음악도 됐다 싶어서 바퀴 굴러가는 소리들을 듣는다. 빠르게 빠르게 구르는구나. 남들보다 늦게 가고 싶다.



 음에 모래알이 생겼다. 좋아하는 가수의 에세이를 사놓고 아직 다 읽지 않은 상태라 다행이다. 진주는 모래알이 조갯살에 박히면서부터 시작된다는데, 조금 모질어도 일단 서있어 본다. 매일 내리는 햇살이 괜히 야속하다가, 고맙다. 미안하다.


 이제야 웃는 사람들 얼굴이 보인다. 참, 빨래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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