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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Mar 05. 2024

인간 대나무숲

어떻게 공감해야 하는지



재작년쯤 일이다. 회사에서 직장 동료가 사소한 것으로 자꾸 태클을 걸어서 엄마에게 얘길 했는데, 내 기분에 대한 공감 및 위로 대신 자꾸 상황 파악만 하려고 해서 너무 서운한 적이 있었다. 나는 어차피 엄마에게 우리 회사의 A to Z를 다 설명할 수 없고, 내가 어련히 잘 생각해서 '아! 직장동료가 나에게 시비를 거는구나' 하고 이미 판단까지 마친 건인데 엄마는 자꾸 그 '사소한 것'이나 '태클', '시비'가 맞는 상황인 지에 대해 계속 물어가며 검증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도 물론 엄마가 나를 못 믿어서 그랬다기보단, 그게 엄마의 고질적인 습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다 꿰뚫어 보고 싶으니까 딸이 당장 기분이 상해 있어도 자신도 모르게 계속 취조하듯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엄마는 뒤늦게 내 의중을 알아차리고 본인이 그렇게 행동한 것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일로 엄마가 위로를 어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예전처럼 미주알고주알 모두 털어놓지 않게 됐다.


나는 사실 그때만 해도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힘들었겠다~" 나 "그 사람 진짜 나쁜 사람이네!" 하고 맞장구만 쳐주면 될 일이었는데. 게다가 하나하나 따져 묻는 것보다 그냥 다친 마음부터 위로해 주는 게 본인 입장에서도 훨씬 쉬웠을 텐데. 성향이 다른 것은 이해했지만 나는 은연중에 내 방식이 맞고 엄마가 틀렸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누군가를 결코 '엄마처럼' 위로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엄마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던 사건이 생겼다. 전 직장에서 가까워진 직장 동료 언니가 있었다. 직장에서 만난 사이였지만 모종의 사건들을 겪으며 많이 친해졌고, 같이 여행도 다녀오거나 쉬는 날마다 전화할 만큼 가까운 사이가 됐다. 하지만 성향은 비슷해도 가치관이나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보니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도 많았다. 특히 언니가 가지고 있는 고민거리들은 너무 많고 나에겐 생소했으며 매우 민감한 것들이라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언니랑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었기 때문에 언니를 정말 잘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 언니에게 위로할 일이 이제 더 이상 없었으면 했다. 내가 어쩌다 1년에 한 번 언니를 만나는 사이라면 나는 늘 그랬듯 언니에게 그냥 "힘들었겠다~"라고만 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1년 더 친구 구독 기간은 무리 없이 연장될 것이므로. 하지만 언니는 나와 너무 가까워졌고, 동시에 그녀의 인생이 조금 더 나아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면서부터 나는 예전처럼 위로하는 방법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난 언니에게 질문을 하고 잔소리를 하며 가끔은 화를 내기까지 했다. 마치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엄마가 그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직장생활에서 받은 스트레스에 엄마의 서툰 리액션이 더욱 화를 돋워서 눈물부터 났을 때. 엄마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면서 했던 말이었다. 엄마는 그저 나를 힘들어하는 날 고통에서 빨리 꺼내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뭐라도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해서 계속 이것저것 묻게 되고 자꾸 어설픈 조언이나 잔소리가 앞서게 됐다고.


나도 언니에게 그랬던 것 같다. 잘은 모르지만 이렇게 해봐라 저렇게 해봐라 같잖은 조언을 많이 건넸던 것 같다. 다행히도 착한 언니는 내 조언에 대해 크게 기분 나빠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교수라도 된 양 언니에게 가르치려 드는 내 모습이 스스로 '극혐'으로 느껴진 적이 있었다. 가끔은 언니에게 짜증을 낸 적도 있었다. 주로 내 해결책을 듣지 않고 똑같은 고민거리를 가져왔을 때였다. 물론 내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 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해결책을 행하지 않으면서 그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게 못내 답답했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언니를 위로하기 시작하면서 '감정적 위로'가 절대 쉽고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AI처럼 영혼 없는 답변만을 출력한다면 모를까. 그 사람에 진짜 공감하고 이입하게 되면, 나 또한 그 사람처럼 우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경험해야 한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에너지가 다 빠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도 솔직히 나도 힘든 상황에선 언니의 말을 들어주기가 힘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나'라는 지푸라기를 겨우 잡은 사람한테, 내가 겨우 조금 지친다고 밀어내는 것도 너무 매몰찬 것 같아서 어려웠다.


엄마도 아마 그랬을 것이다.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극도로 예민해진 딸이 엄마에게 하소연하는데, 자주 반복되니 듣는 것만으로도 짜증 나고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딸이니까 그만하라고 할 수도 없고 최대한 들어주며 엄마 딴에는 내가 그만 힘들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그땐 정말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제야 엄마가 왜 그랬는지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다.








시간이 들면서 역지사지가 되니 그때의 엄마의 입장도 알겠고, 지금의 언니의 입장도 모두 알겠다. 그냥 가까운 사람에게 위로 한 마디 듣고 싶은 그 심정도 이해가 가고, 반대로 가까운 사람이 자꾸 힘들어하니까 잔소리해서 상황을 바꾸고 싶은 그 심정도 이해가 간다. 그래서 더 어려운 것 같다. 지난날 엄마에게 실망해서 내가 원했던 것이 '옳은' 공감 방식이라고 여겼던 때와 달리, 지금은 정말 어떤 것이 더 좋은 것인지 전혀 모르겠다.


나는 인간 대나무숲처럼 되고 싶었다. 타고난 감정적 예민함을 기반으로 남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고 공감해 주며, 가까운 사람들이 내게 털어놓으면 후련하고 치유받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 알게 된 것은 '공감'을 바라는 것도 '공감'을 하는 것도 너무너무 어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과연 잘 이해하고 공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앞으로 나의 인간관계와 인생에 주어진 아주 큰 숙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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