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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Mar 09. 2024

내가 기독교인을 그만둔 이유 (2)

아무래도 역시



그러던 내가 다시 교회를 다니게 됐다. 2017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2~3년간 기약 없는 취업 준비만 길어지자 마음이 많이 힘들 때였다. 그때 우연히 그전 교회에서 알던 동생과 연락이 닿았다. 그 당시에도 외눈박이들밖에 없는 그 교회에서 맘이 통한다고 생각한 몇 안 되는 친구였다. 그 친구도 얼마 전부터 서울에서 타지생활을 하고 있었고, 우연히 어떤 교회를 소개받아 1년 정도 다니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다 너무 좋고 목사님 말씀도 좋다고 소개했다. 평소 같았음 막연한 거부감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안 가려고 했겠지만, 왠지 그때는 그 친구를 따라 그 교회에 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 멘털이 너무 무너졌을 때라 어딘가 의지하고 싶기도 했는데 마침 만난 그 친구가 그 교회를 소개해준 것이 나름 어떤 운명이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그 친구가 낯을 많이 가리는 나를 챙겨줄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다른 데서는 생존형 외향성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랑도 턱턱 말을 잘 섞지만, 거의 무교나 다름없던 내게 교회는 연고도 없는 외국에 혼자 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였다. 내가 지난 교회에서도 일반인의 시선으로 대형 교회 목사의 탈세 같은 얘길 했다가, 바로 무리에서 내쳐진 것을 생각해 보라. 한 마디로 교회 안에서의 문화나 언어, 가치관 등에 익숙하지 않은 내게는 적응을 도와줄 '가이드'가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다행히도 그 친구 덕분에, 그리고 그 친구 말대로 그 교회 사람들이 대부분 꽤 괜찮아서 나는 그 교회를 좀 더 다니기로 결심했다. 교인들 개개인의 성향은 어떤 지 모르겠으나, 우선 나에겐 목사님의 설교에 남녀차별적인 발언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큰 안심이었다. (아예 없진 않았지만 당시 페미니즘 담론이 활발하던 때라 목사님이 매우 조심한다는 것이 느껴졌음) 그리고 사회에서의 성취를 은근히 깎아내리고 교회에서의 희생을 강요하던 시골 교회의 전체적인 하향평준화 분위기와는 다르게, 서울 교회에서는 모두가 교회도 다니지만 밖에서도 제 커리어를 위해 열심히 자기계발하고 일하는 분위기가 교인들에 대한 편견을 많이 희석시켜 주었다.


물론 그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따금씩 현타는 있었지만 그래도 난 내가 기독교인으로 남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그나마 이 교회를 열심히 다녀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기독교인으로 남아야 했던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엄마였다. 내가 언젠가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에 엄마의 반응을 기억한다. 차라리 소리 지르면서 화를 내면 똑같이 짜증으로 되받아치겠는데, 이제 정말 큰일 났다는 듯이 울면서 빨리 그 말을 취소하라고 안절부절못하던 모습이었다. 나는 늘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던 엄마가 큰 딸이 지옥에 갈까 봐 두려움에 떨던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 이후 엄마와 더 이상 논쟁하기를 포기했다. 엄마에게 기독교는 인생 그 자체였다. 내가 그깟 교회 안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엄마의 신앙심을 못 이긴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수많은 선택에서 엄마가 나에게 포기해 준 게 얼만데, (물론 그 과정이 모두 순탄친 않았지만) 이거 하나쯤은 내가 엄마를 위해 그냥 모른척해야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2021년 코로나 시국에 결국 그 교회마저 못 참고 뛰쳐나오게 됐다. 요약하자면, 그나마 상식적이라고 판단했던 그 교회도 결국은 기독교인 특유의 자기들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남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회사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나로 인해 모든 사람들이 다 강제 격리당하는 일 방지) 교회가 대면 예배를 시작한 후에도 절대 가지 않았는데, 교회는 그런 나를 겉으로는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죄책감을 자꾸 자극시켜 대면 예배에 나오게끔 꾸준히 종용했다. 마치 내가 코로나 때문에 무서워서 가지 않는 게 아니라 신앙심이 부족하고 또는 그저 귀찮아서 핑계를 대는 것처럼. 결국 그 압박에 못 이겨 딱 한 번 대면예배에 나간 적이 있는데, 무려 요양병원에서 근무하며 본인 할머니가 코로나 확진이었던 교인이 그 주에 똑같이 참석했다. (아마 당장 열이 안 나고 얼마 전 코로나 검사 시 문제가 없었으므로 괜찮을 것이라 판단한 듯) 그것도 처음엔 말을 안 하다가 나중에 예배 후 소모임 시간에 본인 근황을 말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을 꺼낸 것이다. 다행히 나는 교회 도착 이래 한 번도 마스크를 벗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그 자리에 있던 다른 교인들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턱스크를 하고 다 같이 과자를 나눠먹는 듯 경각심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난 속으로 매우 경악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그 자리에서 나만 유난으로 느껴질 만큼 아무도 그 사람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거나 마스크를 끼라고 하는 등의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나 또한 초면인 그분에게 내가 총대매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다음날 출근하면서 왠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혹시라도 확진자 동선에 포함되어 있으면 어떡하지? 회사에 알릴 때는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교회에서 설득하고 종용해서 나를 대면예배에 앉혀놨다고 한들, 결국 그걸 선택해서 회사에 피해를 준 건 나일 테니까. 나는 무책임하고 조심성 없고 무지했다고 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점심시간을 앞두고 어제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OO아. 어떡하지? 어제 그 XX가 오늘 코로나 확진을 받았다네. 너도 검사를 받아봐야 할 것 같아..."


그 말을 듣자마자 단전에서부터 분노가 끓어올랐다. 내가 우려했던 모든 것이 다 현실이 된 것이었다. 그 친구에게 불같이 화를 내며 따졌다.


"아니, 그러게. 왜 소모임을 하자고 해? 거기서 마스크는 벗고 왜 과자는 먹어? 그리고 자기 할머니가 코로나면 당연히 교회에 나올 생각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진짜 어떻게 그렇게들 무책임해? 나는 회사에 대체 어떻게 얘기하라고!"


친구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만 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코로나 확진자를 감쌌다. 어제까지는 분명 아무 증상이 없었고 할머니랑도 안 마주쳤고 어쩌고... XX도 몰라서 그런 거잖아. 하지만 그 말에 더욱더 분노가 커진 나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리고 회사에 거짓말을 하며 양해를 구했다. "친구를 만났다고". 회사는 떨떠름해했지만 코로나 확진자가 점점 많아지던 시기였기에 별말 없이 검사받고 오도록 보내주었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때 사실대로 교회에 갔다고 말했다간 내 회사 생활이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 당시 팬데믹 상황에서도 사회에 미칠 영향을 추호도 고려않고 예배나 집회 등을 강행하여 다량의 확진자를 양산해 내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반성 없이 억울하다며 항변하기만 하는 일부 종교인들 때문에 사회가 종교에 대해 갖게 됐던 그 살벌한 시선들을 생각해 보면... 다행히 확진이 아니었고 이후 회사에 우연히 다른 확진자가 생기면서 내 일은 묻혔지만 그날 혹시라도 내가 마스크를 벗었다면 어찌 됐을지 생각만 해도 두려웠다.


나는 그 이후로 지금까지 다시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그 교회뿐 아니라 아예 그 어떤 교회에도 나가지 않게 됐다. 그날 '내가 교회에서 코로나에 걸릴 뻔했다'라는 사실과 그 과정들이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때 내가 친구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연락도 받지 않자, 직접 목사님이 연락을 했는데 교회 차원에서 조심했어야 한다는 반성보다는 내가 기분이 상한 것에 대한 '유감'이라는 표현뿐이라 더욱 실망스러웠다.


계속 대면예배랑 소모임을 가자고 부추기던 그 친구도, 본인이 코로나일 거라는 의심 없이 조심성 없게 교회에 온 그분도, 어떤 점이 화났는지 핀트를 못 잡고 달래려던 목사님도 개개인으로는 실수할 수 있다고 본다. 친구 입장에서도 내가 코로나에 진짜 걸린 것도 아닌데 그렇게까지 불같이 화낸 게 의아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내가 겪었던 모든 교인들과 또 이때의 코로나 사건으로 인한 교인들의 모습에서 공통적인 모습을 한 가지 깨달았는데, 그 모습들이 앞으로도 나와 기독교인들의 간극을 절대 줄일 수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나는 오랫동안 기독교도 무교도 아닌 어떤 지점에서 늘 교회를 지켜봐 왔다. 그리고 나는 교회가 어느 정도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선에 있길 바랐던 것 같다. 어렸을 때 겪었던 그 시골 교회의 교인들처럼 이상한 사람들은 극히 일부고, 어떤 좋은 교회에 가면 다 말이 통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너무 지나친 기대였다. 기독교인들의 세상은 모두 교회 안에 있다. 그들에겐 교회 안이 상식이고 기준이다. 그들에겐 악의가 없지만 분명 사회의 시선에선 이해 안 되는 행동들이 생긴다. 교회 밖의 사람들이 교인들에게 피해를 호소해도 그들은 신기하리만큼 공감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교회 안에서 고립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신앙이 크지 않기도 했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냥 좀 일반적인 상식에서 어우러져 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그래서 비로소 나에겐 '기독교'라는 종교가 맞지 않다는 것을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알게 된 것이었다.






사실 아까 얘기했듯이 열성적인 신자인 엄마 때문에, 완전히 기독교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지 못한다. 지금도 엄마는 내게 매일 아침 성경말씀을 카톡으로 보내면서 묵상하라고 하고 내가 그걸 진심으로 느끼고 '아멘'이라고 답하길 바라신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도저히 기독교가 어쩌고 할 자신이 없어서, 엄마가 원하는 대로 '아멘'이라고 답해준다. 물론 엄마도 이런 내가 동태눈깔로 그냥 카톡만 친다는 것을 애진작에 알고 계신다. 그냥 더 이상 서로 싸우지 않기 위해 이 정도 선에서 타협하는 것일 뿐.


1년에 2번 정도 고향에 내려갈 때도 일요일에 걸치게 되면 엄마 따라서 예전 그 교회를 나가야 한다. 그것도 정말 죽기보다 싫은 일이지만 기껏해야 1년에 2번이니까 간다. 더 이상 엄마도 나한테 교회 활동을 더 하라거나 서울에서도 교회를 알아봐서 다니라던가 강요하지 않으니까 이것도 서로 암묵적인 합의인 셈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들 때문에 나는 선 하나를 그어놓고 바로 그 앞을 지키는 군인 같다. 절대 통일되지 않을 내 가치관과 기독교라는 종교에 굵은 선을 그어놓고, 늘 그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던 두 발 모두를 비로소 '기독교' 구역에서 뗀 셈이다. 아주 오랫동안 그곳에 있었지만 이제 아주 가까이에 있어도 넘어갈 수가 없다. 거리상으로는 가깝지만 마음은 아주 벌어진 것이다. 마치 판문점 앞의 남한과 북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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