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에서 센스 있게 건배사 하는 법

건배사의 기본 법칙

by 랑구


나는 알콜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는 심각한 ‘알쓰’(알콜 쓰레기)이다.

하지만 술은 못 마셔도 ‘건배사’ 하나는 센스 있게 잘할 자신이 있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건배사가 많이 부담스러웠다. 우리 회사는 제조업 기반 회사라 구시대적인 조직 문화의 잔재로 회식에는 무조건 ‘건배사‘가 빠지지 않는다. 지금에야 아무렇지 않지만, 당시엔 작은 스타트업에서만 일하다가 와서 건배사는커녕 저녁 회식 자체가 별로 없었어서 매우 난감했었다. 하지만 어설프고 싱거운 건배사를 해서 재미없고 창피하게 기억되기 싫었다. 이왕 하는 거 잘하고 싶었다.


당시 인터넷을 찾아보니 ‘청바지‘ 같은 줄임말 건배사가 주로 검색됐는데, 회사에서 쓰기 부적합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떤 식으로 선창, 후창을 해야 할지 몰랐고 어설프게 따라 했다간 난감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아우디’, ‘청바지’ 등의 줄임말로 된 건배사들은 애초에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다 나처럼 건배사 문화가 있는 회사에 다니던 친구가 몇 개 추천해 줬는데, 그중에 제일 마음에 와닿았던 게 이거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오냐~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해서 이러이러한 도움을 받아서 너무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 ‘고 선창 하면 나머지 사람들이 ‘오냐’로 후창 하는 것이다. 당시 내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직급도 낮고 나이도 어린 편이니까 매우 적합했다. 일부는 ’사낳괴‘(사회생활이 낳은 괴물)라고 부를 정도로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느낌이 나긴 해도, 윗사람들 입장에선 귀엽게 보이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냥 ’ 그래~‘나 ‘네~‘ 가 아니라 ‘오냐~’인 것이 유머러스하고 귀여워서 더 기억에 남았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 회식 자리에서 테스트해 보니 반응이 뜨거웠다. 다들 그냥 회사 이름 선창하고 파이팅~! 정도 하는 수준이라 개중에 매우 튀었나 보다. 나도 그 정도일지는 몰랐는데, 오죽하면 그날 나를 처음 봤던 타 부서 팀장님이 ‘건배사‘로 나를 기억할 정도였다. 그렇게 내 건배사는 두고두고 잘한 케이스로 회자되었다.


뿌듯했으나 이후 회식에서도 나에게 계속 건배사를 기대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근데 나도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매번 회식 직전에 건배사를 한두 개쯤은 미리 준비했고, 그때 그때 분위기상 가장 적합한 것을 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매번 좋은 평가를 받았다. 몇몇 사람들은 나에게 건배사를 미리 귀띔해달라고 하기도 하고, 어떻게 그렇게 매번 잘할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 또한 건배사를 잘하려고 크게 노력하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늘 반응이 좋아서 왜 그런지 한 번 심도 있게 고민해 봤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한 얘기일 수 있는 나름의 법칙(?)을 발견했다.



1. TPO가 중요

- 그 자리에 맞는 건배사가 가장 중요

- 예를 들면 “2025년/더 잘하자! “와 같은 건배사는 송년회나 신년회 때는 와닿을 수 있지만 연중에는 별로 큰 반응이 없음. 또, 승진을 축하하는 자리라면 다른 이슈보다는 승진과 관련된 건배사를 하는 것이 청중들의 반응이 더 좋음.

- 그날 있었던 이슈를 실시간으로 반영하는 것도 좋음. 예를 들어, 그날 직원 누군가의 결혼 소식이 발표 돴다면 이를 바로 차용하여 ‘@@@님/행복하세요 ‘라고 건배사를 하면 순발력이 좋아 보일 수 있음.

- 그냥 ‘(회사 이름)/파이팅!’과 같은 건배사는 회식의 이슈를 반영하지 않아 진부하고 싱겁게 느껴짐.


2. 건배사만큼이나 앞의 인사말이 중요

- 건배사를 완성시키는 것은 앞의 인사말.

- 그냥 ‘잘 부탁드립니다’라고 했으면 그렇게 큰 반응이 없었을 텐데, 그 앞에 나의 상황(입사한 지 ~개월)과 도움 주신 분들에 대한 감사함 표시가 있었기에 반응이 더 좋았다고 생각.

- 인사말은 진정성 있는 인사, 건배사는 이를 압축하는 짧고 임팩트 있는 한 마디.


3. 당연히 칭찬, 긍정적인 내용이 좋음

- 가끔 회사 회식인데 ‘가~족같은 회사’처럼 무리수 두려는 경우가 있는데 갑분싸 되기 십상. 절대 금물!

- 실제로는 회사에 불만이 많아도 건배사만큼은 애사심 가득하게 하는 게 반응이 좋음.

- 나이가 어리거나 직급이 낮을수록 회사나 대표님에 대한 노골적인 샤라웃이 있어도, 오히려 “요 녀석 봐라” 하면서 귀엽게 느껴질 수 있음.


4. 임팩트 있는 포인트나 반전을 넣어라

- 예를 들면 ‘(대표님)/사랑합니다 ‘ 같은 것은 진부해 보이는데, ‘(대표님)/짱!‘ 이러면 짧고 굵어서 더 기억에 잘 남음.

- 내 경우에는 승진을 하게 됐는데 축하를 받기보다는 오히려 채찍질하는 의미로 내 이름을 선창 하면 후창으로 ”잘해라 “라고 해달라고 함. 이 또한 진부하지 않아서 반응 좋음.

- 이런 것들은 미리 얘기하고 싶은 내용을 준비한 후에, 여러 가지 버전으로 말을 만들어보고 가장 입에 잘 붙는 것을 선택하면 됨.


어차피 우리는 개그맨도 MC도 아니니까 회식 자리에서 좌중을 압도하고 사로잡을 수 없다. 다만 위와 같은 건배사의 기본 수칙(?)을 지키면 갑분싸 되지 않으면서도 센스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 모두의 행복한 회식을 위하여…!




매거진의 이전글잘못을 인정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