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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랑구 Feb 07. 2024

잘못을 인정하기

그러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가 우리 팀에서 가장 잘한다고 자부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조사'이다.


물론 우리 팀이 상품기획&마케팅팀인 만큼 다른 팀원들도 잘하지만, 나는 특유의 오타쿠 같은 집요한 성격과 인터넷에서 살다시피 하며 얻은 검색 능력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무조건 찾아내는 모습으로 '명탐정', '코난', '흥신소' 등이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이런 딥한 수준까지 능력을 발휘할 일은 거의 없고, 보통 출시하고자 하는 품목에 대해 미리 소비자 반응을 예측하거나 경쟁사들의 대략적인 시장 가격을 알기 위한 일반적인 수준의 시장조사를 많이 한다.


이번에도 슈퍼 채널(SSM이 아닌 일반 동네 슈퍼) 전용으로 출시할 품목의 시장가를 알기 위해 시장조사를 했다. 사실 슈퍼 채널 전용이었으면 실제로 슈퍼 현장에서 시장조사를 했어야 맞긴 하는데, 슈퍼는 워낙 광범위하고 점바점이라 간단하게 조사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온라인 채널이 워낙 저렴하기 때문에 온라인 기준으로 먼저 가격을 확인해도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렇게 이가 아닌 잇몸으로 하기로 했으면 실제 결과의 신뢰성을 입증할만한 크로스체크를 한다던가 최소한의 의심을 했어야 맞는 건데, 나는 또 '명탐정'이라 불리며 그간 조사 내용에 대해 칭찬을 받아왔던 지라 나도 모르게 그 결과가 맞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결국 온라인상에서 가장 저렴했던 가격을 기준으로 나름대로 판매가를 산정하고 이에 따른 공급가까지 협의했다. 물품을 공급해 주는 업체와도 이상하리만큼 소통이 잘 돼서 오랜만에 일이 순항한다고 생각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안 것은 품목신고 직전 영업과의 미팅 자리에서였다.


"지금 판매가에서 적어도 2,000원은 더 저렴해야 한다."


처음엔 짜증이 확 났다. 어떻게 구한 업체이고 잘 설득해서 받아낸 가격인데... 영업이 원하는 가격을 맞추려면 업체에서 받아 온 공급가보다 500원은 최소 더 저렴해야 했기에 아득해졌다. 내가 생각한 시장 판매가가 틀렸다고 생각한 적 없었기에 나는 영업 입장에서 마진 때문에 일부러 가격을 후려친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영업에서도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영업은 실제 슈퍼 채널을 돌아다니며 가격 조사를 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진짜' 조사를 한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두 채널 간 가격 차이가 그렇게까지 날 수 있나 싶었고, 오히려 슈퍼(오프라인)가 중간 마진 때문에 더 비쌀 거라고 생각했는데 완전 반대였다. 실제로 슈퍼에서 판매하는 시장 가격이 온라인 가격보다 최소 2,000원씩은 더 저렴했던 것이다.


결국 진행되고 있던 프로세스는 다 홀딩되고 스펙이나 업체 등을 다시 고려하기로 했다. 나 때문에 뭔가 잘못될 뻔했다는 것에 마음속 가득 불편함이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나도 직접 슈퍼로 시장조사를 나가보았다. 첫 방문한 곳부터 바로 영업말이 맞았음을 알았다.  


이로써 조사왕이라 불렸던 내 명성과 자존심엔 큰 스크래치가 생겼지만, 그래봤자 내가 잘못한 건데 어쩌겠는가? 죄책감 및 자존심 상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실장님께 카톡을 보냈다.


"실장님, 제가 시장조사를 잘못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벌서는 루피 이모티콘 하나.



직접 확인하고 나니 이번엔 내가 시장조사를 정말 잘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돌아온 실장님의 반응은 질책이 아니라 ㅋㅋㅋ 하는 웃음이었다. 실장님도 전적으로 내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온라인이 더 저렴할 것이라 생각했던 것에서 슈퍼가 더 저렴하게 판매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어 한 수 배웠다는 입장이었다. 그제야 불편한 마음이 눈 녹듯 풀렸다. 그리고 비로소 영업이 시장조사를 제대로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과 안도감이 들었다. 만약 영업이 중간에 제동을 안 걸어줬더라면, 시중에서 타사보다 2,000원씩이나 더 비싸게 팔 뻔했지 뭔가.


이렇듯 가끔 업무를 하다 보면 좁은 시야를 가지고 일을 하다가 그르치는 일들이 발생한다. 나도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사실 이런 크고 작은 실수들을 많이 해왔었는데, 그때마다 잘못을 시인하면 능력이 없는 것으로 비칠까 봐 엄청 걱정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말 쿨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때로는 도움이 된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한 마디에 좋은 상사라면 질책보단 격려와 피드백을 해줄 것이다. 또한, 프로젝트는 모두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 혼자만 모든 것을 짊어지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다른 팀원, 다른 부서에게 물어봐 가면서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내가 성장하고, 업무의 질이 높아지고, 결국은 모두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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