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p.128
한 마디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도 있지만 말의 토씨 하나만 바꿔도 세상이 달라지게 할 수도 있다. 손바닥의 앞과 뒤는 한 몸이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뒤집지 않고는 볼 수 없는 가장 먼 사이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뒤집고 보면 이렇게 쉬운 걸 싶지만, 뒤집기 전엔 구하는 게 멀기만 하다.
나는 왜 이 대화에서 이기려고 할까? 꼭 이겨야만 했을까?
작년부터 이런저런 관심사가 생기고, 글을 쓰고, 부쩍 말이 늘었다. 말이 늘고, 말의 결과도 나와 같은 생각이길 바라는 욕심도 늘었다.
25살부터 얼마 전까지, 억울한데 말하지 못한 것, 몰라서 말하지 못한 것, 당황해서 말하지 못한 것 등등의 반작용처럼 요새는 나의 생각을 분명히 표현하고 한다. 그 점이 나의 가장 큰 변화이다.
나의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원했던 바였지만 '말의 결과'에 대한 욕심, 스포츠처럼 승패를 나누는 게임은 엇나간 욕심이었다. 오늘의 회의 시간이 나에게는 그러했다.
인원이 많으니, 2개 그룹으로 나눠서 회의하는 것은 브레인스토밍에 유리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동안의 경험상, 이 작은 인원이 회의 중 삼천포로 한 번 빠지면 돌아오지 못함을 느낀 후였다. 팀 선임은 이번에도 나눠서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나는 반대했다…곧 다수결의 결과 결국 막내인 나의 의견대로 팀 전체가 회의를 했다.
내가 말한 대로 이루어졌고, 초반의 얼음 같은 분위기와는 다르게 결과는 좋았다. 회의 정리를 어쩌다 하게 된 나는 평소보다 정리 파일에 공을 들였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브레인스토밍 서류가 완성되었다.
의도와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무시해도 좋을까?
자신의 의견대로 되지 않은 팀 선임의 얼굴은 회의 내내 어두웠다. 평소에도 친하지 않은데, 굳이 담장까지 두른 상황이었다. 굳이 반대해야 했을까? 우리 아빠의 회사도 아닌데, 내가 팀장도 아닌데 꼭 업무의 효율성을 말했어야 했을까?
잘해보자고 건의했고, 원하는 대로 시작했지만, 결과는 회의 내내 찜찜했다. 서로의 의견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것이 좋은 문화라고 배웠지만 현실은 이렇게 한약 맛이다. 씁쓸하고, 못내 찜찜함. 회의 결과는 좋았지만 반대로 나는 웃지 못했다.
엄청난 문제가 아니라면 다음엔 나의 발언권을 거두리라 생각하면서. 이기는 대화가 아닌 잘해보자고 하는 대화, 수직선이 아닌 수평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나의 말 그릇은 어떤 크기일까? 이제 막 자라는 새싹처럼 돋아나는 걸까? 아님 너무 작아서,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없는 옹졸함에 갇혀 있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