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몰래카메라라고 말해줘!
미드미가 밤새도록 끙끙거렸다. 성장통 때문에 다리가 아픈 건지, 이가 나는 건지, 무서운 꿈을 꾼 건지 알 수는 없지만 잠들만하면 엄마를 찾았다. 내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물을 찾은 후 다시 잠들기를 열 번은 더 했던, 매우 피곤한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미드미는 세상 쌩쌩한 얼굴로 (마치 아무 일도 없이 밤새 너무나 푹 자서 컨디션이 최상인 사람마냥)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엄마!"
해가 밝았는데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인간적으로 새벽 내내 찡찡댔으면 적어도 늦잠 정도는 자주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밤새 고문 아닌 고문을 시켜놓고 아침 댓바람부터 100% 충전 모드로 날 불러대는 미드미가 한편으로는 얄미웠다. 못 들은 척 몸을 살짝 돌렸지만 미드미는 이미 범퍼를 넘어 내 얼굴을 향해 온 몸을 날리고 있었다.
살짝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평소 같으면 엄마를 골백번도 더 불렀을 텐데 집안이 조용하다니. 순간 두려움이 몰려와 눈이 번쩍 떠졌다. 방문을 열고 나가보니 집안이 난리였다. 어디서 찾았는지 물티슈가 다 뽑혀 바닥에서 뒹굴고 있었고, 서랍은 이미 반쯤 열린 상태로 양말과 손수건, 스카프와 벨트들이 난잡하게 얽히고설켜 발 디들 틈이 없었다.
"미드마!!"
또 무슨 사고를 치고 있나 싶어 신경질 가득한 목소리로 미드미를 불렀다. 그러자 안방 저 구석에서 우다다다 달려오는 미드미의 소리가 들렸다.
"우유! 우유!"
나는 이 집의 난장판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모습으로 천연덕스럽게 우유를 찾는 그녀였다. 아침부터 피곤했고, 짜증이 몰려왔으나 정말이지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았다.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어 컵에 따라 건네고는 한숨을 푹푹 쉬며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실이 좀 정리된다 싶어 방으로 들어갔다. 미드미는 뭐 때문에 신이 난 건지 아침부터 반짝반짝 작은 별 노래를 흥얼거리며 날 따라 종종걸음으로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아직 힘 조절이 미흡한 그녀의 손에 대롱대롱 달린 컵은 수평이 아닌 반쯤 기울여진 상태로 우유가 줄줄 새고 있었다. 양말과 스카프, 그리고 벨트가 다 젖었다. 맙소사.
"미드미, 너 당장 나가 있어. 자꾸 이렇게 일거리 만들 거야?"
사실 미드미가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괜히 짜증이 났다. 미드미를 번쩍 들어 거실로 옮기고 서둘러 방을 치웠다. 방을 치우는 내내 거실이 조용한 게 신경 쓰였지만 설마 더 사고를 치겠냐는 안일한 생각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방을 치우고 미드미의 아침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으로 갔다.
'빡친다'는 단어의 어감을 좋아하진 않지만 이럴 때 사용하는 단어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순간, 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단어였다. 순간 얼음이 되어 바라볼 수밖에 없던 그곳의 풍경은, 주방의 모든 문들과 냉장고에까지 미드미의 예술적 혼이 가득 담긴 크레파스 낙서가 가득했다. 빨강, 파랑, 노랑, 그리고 흰색까지. 형형색색 총천연색이 어우러진 크레파스를 보고 있노라니 깊은 빡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해탈감이 몰려왔다. 그날 아침, 우리 집 스피커에서는 항상 들려오던 동요나 클래식, 피아노 연주곡 대신 방탄소년단이 흘러나왔다. (어찌나 신명 나게 위로가 되던지!)
희한하게 그런 날이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연속적으로 사고뭉치인 날. H와 나는 그날을 '사뭉이데이'라고 이름 지었다. 사뭉이데이를 통해 성장한다는 걸 알지만, 아주 가끔씩만 찾아오는 그런 날이길 간절히 바라본다. 육아가 어려운 건, 꼬마인간 하나와 내 속의 나 두 사람을 길러내는 일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