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반지하에서 카페 같은 집까지
드라마 '인간실격'에서 40대 딸인 전도연(부정 역)이 친정아버지(창숙 역)를 찾아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못 됐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 됐어. 사는 게 너무 창피해." 이 대사는 가정도, 직장도, 아이도, 자신마저도 잃게 된 아픔에 스스로를 옥죄여오는 상황에서 친정 아버지의 품에 안겨 울면서 말한 대목이다. 나도 같은 40대 때 이것을 보았다. 행복하게 사는 게 삶의 궁극적 목적이다. 매일매일 같을 수 없는 삶이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을 긍정적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 그것이 삶의 전부이지 않을까한다.
나는 전문대 관광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엔 단 한 번도 학교에 발걸음한 적이 없다. 취업 준비를 할 땐 신기하게도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그 주변 벤치에서 공부를 했다. 서울대와 나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었고, 주변은 물론 그 너머에도 서울대를 다니거나 근처에 사는 사람조차 없었다.
그런데 왜 하필 서울대였을까?
아무리 떠올려봐도 기억이 나지 않다가,
문득 그 이유를 알아버렸다.
그건 바로 신림동 곱창집 때문이었다! 대학생 때였다. 그즈음 신림동 곱창골목을 소개받고, 그중에서도 '백순대' 볶음을 먹으러 자주 드나들었다. 여러 순대타운 안에서도 맨 앞 집이었던 '전라도집'을 즐겨 찾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깻잎쌈에 양념 뭉치를 넣은 순대와 곱창의 콜라보는 나를 중독시켰다.
그렇게 신림동 곱창을 먹으러 다니다가 서울대 위치를 알게 되었고, 취업 준비를 할 땐 홀린 듯 서울대에 갔다. 뭔가 거기에 가면 좋은 직업을 가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전혀 다른 문화와 삶을 사는, 그 특정 다수의 서울대 학생들을 보면서, 부러웠지만 그건 그냥 다른 세계인들이었다. 그래서 질투는 없었다. 당시에는 어찌 된 일인지 서울대 도서관 안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안에서 일본어 단어를 외우다 잠들기도 하고, 그때 함께 간 친구에게 "몇 시에 나가서 점심 먹을까?" 하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5분이나 흘렀을까? 어떤 남자에게 쪽지를 받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열어본 쪽지에는 정확히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곳은 떠들라고 있는 곳 아닙니다.
남에게 피해가 됩니다. 나가서 해 주세요.”
하! 얼굴이 너무도 화끈거렸다. 이 사람은 분명 나의 존재를 아는 것 같았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고, 결국 그렇게 밖으로 나섰다.
산만함의 기록
생각해 보면, 난 좀 산만했다. 아니, 굳이 생각할 것도 없이 바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중학교 땐 단순 암기 시험으로 반에서, 심지어 전교에서도 곧잘 순위권에 들었다. 학교 대표로 수학 경시 대회도 나갔었고, 아, 국어 부장을 했던 기억도 있다. 부장이라고 해봤자, 선생님이 나눠주시는 프린트물 배부하는 게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중학교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배정받았는데, 놀랍게도 첫 시험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였다. 충격 그 자체였다. 중학교 때 수학, 영어 성적 덕에 고등학교 상위권 반에 배정받았는데, 매번 쪽지시험을 볼 때마다 꼴찌 비슷했고 선생님은 늘 "네가 어떻게 A반에 왔는지 정말 궁금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이유가 나도 궁금했다. 이 학교 애들 실력이 보통이 아닌건가?! 아님 부모님 이혼의 영향이 이토록 크단 말인가?! 혼돈스러웠다.
그러다 당시 수학 과외를 받았는데, 잘 사는 친구 소개로 서울대 다니는 젊은 남자 선생님께 잠시 배웠다. 그분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혜란이는 산만한 것만 없으면 진짜 잘할 텐데."
또 대학교 교양 시간에 잠시 배운 일본어가 너무 쉽고 재미있어서, 따로 일본어 학원을 다녔다. 쪽지시험에서 1등을 했는데, 선생님은 그 결과물을 보고도 나를 믿지 않으셨다. 수업 때 늘 집중 못 하던 내가 1등을 했으니, 분명 실력이 아니라 커닝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일단 책상에 앉으면 5분을 버티기 힘들고, 늘 움직이고 일을 만들며 분주했던 사람으로 나도 선생님도 나를 그렇게 알았으니까. 결국, 나는 따로 시험을 다시 봐야 했다.
그러다 중학교 때 성적이 말도 안 되게 좋았던 이유를 얼마 전 44살에 중학교 동창을 만나서 비로소 알게되었다. 사실 내가 졸업한 그 학교가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 학교였다는 걸 말이다. 큰 조직의 말단이 되는 것보다 작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 같았던 기분이 들면서 30년만에 초 진실을 알아버렸다. 그 자리에서 자지러지게 웃고 말았다.
어느 순간 산만함이 나의 전매특허가 된 것 같았다. 부모님은 내게 산만하단 말을 단 한 번도 해주지 않았고, 해 줄 틈도 없었다. 그러나 난 자연스럽게 자칭타칭 산만한 사람으로 각인되어왔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나를 못 믿었던 선생님들이 여럿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난 졸업 때도, 나중까지도 그 선생님들과 연락하며 지낼 줄 아는 특유의 사교성이 있었다.
산만함 속에서 피어난 도전, 그리고 작은 깨달음
관광과를 졸업하고 여행사 실습에서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던 24살의 나는, '공항 취직'이라는 정확한 목표를 꿈꿨다. 일본어와 특유의 사교성을 무기 삼아 세계인과 소통하는 공항에서의 삶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 보였다. 그래서 무작정 일본어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내게는 서울대학교가 든든한 베이스캠프였다. 지금와서 생각하니 정말 죄송한 일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일반인도 입장이 가능했었다. 친구와 함께 서울대학교 도서관, 매점, 벤치를 오가며 일본어 단어를 달달 외웠고, 공부에 지치면 신림동 곱창타운에서 허기를 달랬다. 인천 집에서 서울 시청의 일본어 학원을 다니고 서울대 캠퍼스까지 지하철을 타고 가서 공부에 매진했던 그때의 열정은 지금 생각해도 놀랍다.
그렇게 노력한 끝에 일본어 자격시험에 턱걸이 합격을 했다. 하지만 공항 면접에서는 보기 좋게 낙방했다. 암기와 시험에는 강했지만, 정작 '말'로 소통하고 물건을 파는 데는 서툴렀다. 면접에서 떨어진 후 다시 서울대 벤치로 향해 엉엉 울며 스스로를 한탄했다. "난 역시 안 돼, 너무 바보 같아. 난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그때 친구는 내게 말했다. "여기가 끝이 아니야. 이거 안 되어도 갈 길은 여러 가지야. 낙담하지마"
지금 생각해도 그 색다른 공간에서
참 시트콤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직관이 이끈 환경설정의 힘
그렇게 낙담한 나는 "일본 사람하고 직접 대화를 트겠다!"는 생각 하나로 한 달 뒤 일본으로 떠났다. 온천, 교통수단, 놀이동산 등을 이용하며 책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현지의 상황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20대 초중반의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절실한 경험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놀랍게도 다음 면접에 바로 합격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 삶은 늘 직관 그 자체였던 듯하다. 곱창이 좋아 곱창타운을 드나들다가 근처에 서울대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곳에서 짧은 변곡점을 맞이하며 성장했다. 엉뚱하고 다소 산만했지만,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의 삶에 집중했다. 산만한 것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산만함의 장점들을 파헤치며 스스로를 위안하며 나아갔다.
-티스토리 >성인ADHD증상-자가진단-테스트 글 -
이 모든 경험을 통해 나는 환경설정의 힘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집에서는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던 일본어 단어 암기가 ‘서울대학교’라는 새롭고 특별한 공간에서 가능했다. 그 경험은, 엉뚱하긴 했지만 내게 '강제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 주었다. 하기 싫은 일도 공간이 주는 힘으로 해낼 수 있다는 걸 말이다. 무한 긍정 끝판왕이 아닐 수 없다.
-공간의 영감을 받고 꾸려나간 현재 거주하는 카페 같은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