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반지하에서 카페 같은 집까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우리 가족은 마침내 ‘주인집’살이를 벗어나 첫 ‘우리 집’을 갖게 되었다. 도시 외곽의 14평짜리 3층 빌라였지만, 그곳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어린 나는 ‘우리 집’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특히, 세면대에서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올 때의 희열은 아직도 생생하다. 나중에 친척들을 만나 삼촌들에게 그렇게 자랑을 했었다.
그 집에서 나는 스무 해가 넘는 23년을 살았다. 셋이 살던 공간은 둘이 되고, 결국 마지막엔 홀로 남은 엄마까지, 집안의 공기는 그렇게 계속해서 바뀌어갔다.
어릴 적 그 동네는 내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빌라들이 빼곡히 들어선 곳이었는데, 각 빌라 아이들과 친구가 되어 온 동네를 휩쓸고 다니며 '콘덴찐빵' 게임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주변 이웃들이 하나둘 이사 나가는 걸 보고는 마음이 슬펐다. '여기서 계속 영원히 같이 살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때는 왜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떠나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들이 발전 없는 이 동네를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어 했다는 걸 알았다.
우리 집은 좁고 추웠다. 외풍이 심해 샷시 틈새로 찬 바람이 스며들었고, 정확히 그 싸늘한 분위기가 지금도 피부로 느껴진다. 아마 그때 고스란히 남겨진 그 집의 어두운 분위기가 싫어 늘 집보다는 밖에서 노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냉장고 뒤 선풍기, 그리고 아버지의 좌절
중학교 시절 어느 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려는데 그 뒤편 공간에 선풍기 더미가 겹겹이 쌓여있는 것을 봤다. 순간 '이게 뭐지?' 싶었다. 세워두는 일반 선풍기가 아니라, 상업용 가게에서 주로 쓰는 거치대 부착용 선풍기였고, 상자도 없이 선풍기 '머리'만 족히 50여 대가 넘게 있었다. 주방과 거실이 한 공간에 있었고, 그 뒤쪽으로 길게 베란다처럼 이어진 공간. 딱히 문이나 구획이 있지는 않았지만 마땅한 이름이 없어 '베란다'라고 불렀던 기억이 난다. 요즘 말로는 '서비스 공간'쯤 될까.
켜켜이, 얼기설기 쌓여 있는 그 많은 선풍기를 보고 그때 난 우리 아버지가 선풍기를 파는 사람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학생이었고, 공부도 좀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버지 직업을 어찌 모를 수 있나 싶다. 아마 그만큼 가족 간의 대화나 소통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한다. 추후 알게 된 사실은, 그 모든 선풍기가 아버지의 거래처 사업이 부도나면서 돈 대신 겨우겨우 받아온 물건들이었다는 거다. 받아야 할 대금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금액의 선풍기 더미들.
아버지는 시골에서 막 상경해서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익히셨다. 20대 후반에는 배짱 좋게 철강 공장을 직접 차리고 꾸려나갔다. 타고난 붙임성으로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겼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추진력 넘치는 그런 분이었다. 그렇게 20대 후반에 사업이라니... 난 40대가 훌쩍 넘은 지금도 내 이름을 걸고 뭘 시작할 엄두조차 못 내는데 말이다. 옷을 좋아해서 한때 관련 사업을 꿈꿨지만, 그 생각은 그냥 거기서 멈췄을 뿐이다. 그래도 내 이름으로 책을 낸 건 방향성은 좀 다르지만, 그럼에도 내가 욕심을 내고 내달렸던 부분이긴 하다. 커가면서 여러 행동 패턴에서 아버지와 닮은 부분들을 알고 소스라치게 놀랄 때도 많지만 사업만큼은 영 딴판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인생에서 부도 상황과 맞물린 좌절감은 30대 후반에 겪은 큰 시련이었다. 나는 겪어보지 못했던 그런 30대를 그는 갖고 있다. 그렇게 30대 후반 부모님의 모습은 사업의 고난과 함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업으로 시작된 것인지, 사업은 그 사이의 연결점일 뿐인지, 원래부터 큰 유대 없던 가족은 더욱 멀어져 갔다.
어머니의 가출, 그리고 이혼
중학교 시절 어느 날, 어머니는 가출을 했고 소식이 끊겼다. 철없고 생각이 없던 나는 어머니가 지금 잠시 속상해서 떠난 거라 생각했다. 곧 돌아올 거라는 믿음이 내 맘속엔 굳건했다. 아버지와 둘이서 그녀가 없는 집에서 한 달여의 시간을 보냈다. 밥을 사 먹었고, 청소와 빨래만 내가 도맡았는데 제대로 바싹 마르지 않은 옷에선 걸레 냄새가 배었다. 당시엔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내가 느낄 정도의 냄새면 분명 친구들도 알았을 거다. 생각해 보면 저 산더미처럼 쌓인 선풍기를 좀 여러 개 빼서 썼어도 되었을 것 같은데. 단 한 번도 건드리지도 못했다. 나는 살림이며 음식이며 아무것도 할 줄 몰랐고 정말 모르는 거 투성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돌아왔고,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부모님은 다시 만났지만 결국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혼하셨다. 그날의 기억은 너무 순식간이었다. 학교 다녀왔는데 아버지에게 “미안하다.”란 전화를 받았던 것 같다. 순간 나는 멍했지만, 셋이 같이 살지만 못할 뿐이지, 또 사이가 그리 좋진 못했지만 늘 함께이지 않을까 했다. 우리 가족에게, 아니 내 삶에 이런 TV에서만 보던 변화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렇게 나는 어머니와 둘이 남았다. 그렇게 아버지 없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아버지 없는 게 뭐 대수냐! 나도 이제 다 컸는데! 흥!
사실 고등학교 때 난 친구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 같은 건 헤아릴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동네 시장에 호프집을 차렸다. 어릴 적 떡볶이집도 잠시 했으니, 아마 이번에도 나름의 도전이었으리라. 새벽녘 돌아오면 남은 노가리를 싸 오셨는데, 그때 난 생전 처음 노가리라는 것을 맛봤다. 적당히 구워진 짭조름한 조각을 아무 생각 없이 씹었고, 내게 호프집엔 얼씬도 말고 공부나 하라고 했다.
어느 날 새벽, 현관 앞에서 신발도 벗지 못한 채 주저앉아 웅크리고 울고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그런데 나는, 단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했다. 지금 다가가서 어머니를 안으면 그건 그냥 우리 모녀가 너무 불쌍할 것 같았다. 나약하고 싶지 않았다. 잘 살고 싶었다. 이불을 푹 덮고 그 안에서 울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
그녀의 고단함과 좌절감, 무력감이 어떤 무게였는지는, 모르지 않았다. 모른 척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난 다 알 수가 없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학교 다니고 공부 잘하는 것이었을까? 25년이 지난 지금 텅 빈 폐허처럼 스러지던 그 마음을, 생각하면 너무 죄송하다. 어머니의 외롭고 두려운 그 마음. 어머니의 호프집 도전은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소녀 같은 사람인데 사실 잘 믿기지가 않는다. 분명 존재하는 사실인데 그녀가 그녀가 아닌 것도 같다. 그녀의 작은 분투이자 궁여지책의 그 삶. 가끔 우린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며 웃곤 한다. "엄마! 그때 그 시장 호프집, 돈은 좀 남았어?" "그래도 손해는 안 봤다." 결국 다시 '0'으로 시작한 어머니. 그녀의 2년 남짓한 호프집 경영 경험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비록 대단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삶의 한 조각으로, 교훈으로 남았을 것이다. 다시는 안 할 거라고 깔깔 웃던 그 모습이 선하다.
사용되지 않은 선풍기, 그리고 나아가는 삶
요즘 선풍기들은 정말 예쁘고 고급스럽다. 깨끗하고 하얀색, 소리 없이 세련된 디자인. 그 옛날 우리 집에 있던 새파란 풍차 모양 선풍기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단독주택으로 이사하기 전, 우리 부부는 천장에 달 실링팬을 미리 사두었을 정도로 그 위력이 궁금했었다. 역시 좋고 세련된 느낌이다. 문득, 그 옛날의 수많은 선풍기들과 지금의 이 실링팬이 오버랩되면서, 양보다 질인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14평 빌라, 스무 해의 공기. 그해 여름 그 집에 그 많은 선풍기가 있었지만, 우리는 단 한 번도 그 선풍기들을 사용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그저 쌓여만 있던, 사용되지 않은 선풍기들의 형체가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다.
부모님은 헤어졌지만, 나에 대한 보살핌은 각자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하셨다.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그 수많은 선풍기처럼, 비록 당장은 사용되지 못하고 쌓여만 있던 기억들이지만, 결국 나의 삶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음을. 움직이지 않던 선풍기처럼 답답했던 지난 시간들이 있었기에, 햇살 가득한 곳으로 나아가려는 지금의 내가 존재함을 말이다. 결국, 세상에 거저 얻는 건 하나 없었다.
더 이상 슬픔이나 결핍이 아니라, 그 모든 순간이 빛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나의 동력이 되었다. 천장에서 세차게 돌아가는 실링팬을 보면서, 나 또한 오늘도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