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반지하에서 카페 같은 집까지
[연재]반지하에서 카페 같은 집까지
친가 쪽 가족 모임이 1년에 한 번씩 열린다. 1박 2일 동안 30명 넘게 모이는데, 아버지 형제 7남매와 그 자식, 손주까지 모두 함께한다. 결혼 후 처음 참석했던 시골, 물 좋고 산세가 멋진 그곳에서 모두 반가워하며 맛있게 먹고, 수다를 신나게 나누었다.
씻으려고 욕실에 들어갔을 때, 작은 어머니가 4인 가족 치약 케이스 4통을 꺼내는 걸 봤다. 각 케이스에는 가족 이름과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순간 멈칫했다. 나는 마흔이 넘도록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다. 치약 케이스에 담긴 가족의 애정과 소속감이 너무 부러웠다.
30대 후반, 기적처럼 결혼을 했을 때도 주변에 놀라는 사람이 많았다. “언니가? 결혼을?” 이성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자유주의자처럼 보였던 나였기에 그랬다. 집들이에 처음 온 친한 친구는 엉엉 울었다. 이유를 물으니 “언니가 결혼 못할 줄 알았어”라고 했다.
사실 나의 자유스러운 성격은 도피일 수도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의 이혼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이후로도 결혼을 상상하지 못했다. 부모님을 보며 사랑을 느낀 적도, 가족 셋이 오붓하게 식사한 기억도 없다. 아버지, 어머니와 각각 따로 먹은 기억만 남아 있다. 분명 그들을 통해 난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그들은 나를 내보내고 각자의 길로 가버렸다.
20대 초반에 나를 낳으신 부모님.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그분들께, 나를 낳은 뒤의 인생 설계란 게 있었을까? 나는 스물두 살, 대학교를 휴학하고 빙수집에서 알바를 할 때였다. 그때 내 하루는 빙수 얼음을 갈고, 과일을 깎고, 설거지와 과일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었다. 그 작은 세상 안에서 묵묵히 내 할 일을 하며 공부와는 잠시 멀어져 집중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 시절 엄마와 아빠는 나를 낳고, 고군분투하며 나를 키워주셨다.
마흔이 넘은 지금도 나는 여전히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들도 나를 낳으며, “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셨을까 짐작해본다.
추운 겨울날, 마지막 버스를 놓칠까 봐 아빠는 나를 한 손에 안고, 손가락이 두 개뿐인 왼손으로 힘껏 버스 뒷문을 쳤다. “열어주세요!” 아빠는 철강 제조업 일을 하시다가 손가락을 다치셨다. 왼손은 가운데 세 손가락이 비었고, 오른손은 엄지와 약지가 없으셨다. 아빠에게 안겨 있던 네다섯 살 꼬맹이인 나는, 그때도 벌써 창피함을 알았다. 버스가 그냥 가버리길 바랐고, 손가락이 부족한 아빠가 문을 치는 모습이 사람들 속에서 눈에 띄는 게 싫었다.
아빠는 어린 나이에 손가락을 잃으셨고, 평생 아프고 힘드셨다. 그런데 내가 그때 느꼈던 정신 빠진 생각을 떠올리면 지금도 너무 부끄럽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커서까지 이어졌었다.
엄마는 공장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신다. 하루하루 버겁고 바쁘기만 했던 그들이었다. 나는 외동딸로, 그들을 기다리며 지하방에 혼자 있기가 싫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주인집 현관 철문 앞에 신문지를 여러 장 곱게 깔고, 그 위에 누워서 숙제를 했다. 깨끗이 씻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철문과 외부 사이 폭 50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그 공간이 참 좋았다. 그게 당시 내게는 큰 행복이었다.
부모님이 헤어지고 다시 만난 건 정확히 19년 만이었다. 나의 상견례 자리였다. 당시엔 내 상황이 급해서 그들의 마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두 분이 어떤 마음이셨을지는 지금도 100%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나’라는 연결고리를 통해 그들은 좋아하기도, 싫어하기도 했을 것 같다.
나는 19년 동안 그들을 각각 만났고, 결혼 후에도 그 관계는 계속된다. 1:1 관계가 강해진 나는 명절이 되면 더 바쁜 하루를 보낸다. 누구 하나 서운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내겐 둘 다 아련한 존재다. 이제는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고 싶지 않다.
지금도 가끔 묻는 분들이 있다. “어머니, 아버지가 혼자 계신데, 같이 살면 안 될까?” 나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절대 그럴 일 없어요. 같이 살면 서로의 삶이 우울해져요.” 그들은 완전히 다르다. 같은 길을 갈 수 없다. 따로 행복하게 사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부모님,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란 내가 이제는 나만의 가족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서로의 행복을 응원하는 것, 그것이 내가 배운 가족의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