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부끄러움'을 가르쳐드립니다

여러분은 ‘부끄러움’을 잘 타는 편인가요 아니면 그렇지 않은 편인가요?

‘부끄러움’의 뜻을 정리해보자면 첫 번째 뜻은 ‘양심에 거리끼어 떳떳하지 못한 상태’를, 두 번째 뜻은 흔히 말하는 ‘수줍다’, 즉 천성적으로 남 앞에 드러나기를 수줍어하는 상태를 지칭합니다. 원래 이러한 “부끄러움”이란 말은 다른 맥락의 두 의미를 지닌 것이었는데, 어느 때부터인가 두 의미가 다소 혼용되고 결합하여 쓰이는 분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최근 들어 더욱 느끼는 것이지만, 점차 이 ‘부끄러움’이란 감정은 감춰야 하는 것, 더 나아가 오히려 그것이 없어야 그 사람이 더욱 돋보이는 것처럼 여겨지는 듯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요? 오히려 ‘부끄러움’ 없음을 강조하며 지내온 시간들이 사실 우리를 얼마나 부끄럽게 만드는지요? ‘나’ 그리고 ‘우리’의 부끄러움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요. 또 부끄러움을 찾아낸 것에서 더 나아가 부끄럽지 ‘않기’를 다짐해야 하지 않을까요. 이런 얘기들을 풀어나가보려 합니다.



우선 ‘부끄러움’ 없음을 강조하는 가장 두드러진 분야는 다름아닌 정치계일 것입니다. 다음의 기사는 ‘정치’의 세계에 있어 ‘부끄러움’이 작동하는 방식을 드러내줍니다.

<‘부끄러움’ 상실의 시대>

한 때 한 정치인들의 발언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다. “저는 정치인이 되기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라고 한 말들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물론 ‘부끄럽다’란 말은 과학적으로 입증하거나 확실한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양심과 가치관으로 판단할 일이다. 하지만 자기 입으로 ‘부끄러운 짓을 안했다’고 말한 정치계의 선배들(?)이 그후에 남들이 보기에 부끄러운 상황에 처했던지라 걱정스럽긴 하다. “이 사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에요”, ‘양심에 한 치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고 독립선언문 읽듯 골목에 서서 큰소리를 치던 이들, 최근엔 “공직자로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말하던 정치인들 대부분 구치소를 거쳐 교도소를 다녀오거나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맹자는 인생의 세 가지 즐거움 중 그 두 번째로서 ‘仰不愧於天(앙불괴어천), 俯不於人(부부어인)’ 즉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굽어 땅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들었다. 윤동주 시인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다짐하며 시어로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처럼 복잡다단한 생활에다 각종 규제와 법이 가득한 세상에 성인군자도 아닌 이들이 ‘양심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오히려 ‘부끄럽다’란 느낌이나 그 단어의 진정성을 잃거나 잊은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 요즘은 정말 뻔뻔하고 목소리 큰 사람이 승리하는 세상이어서인지 자신의 약점이나 실수를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표현하는 이들을 발견하기 힘들다. 온통 거짓말만 늘어놓는 정치인과 탈세전문인 기업인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다.



위의 글에서 ‘부끄러움’은 곧 ‘양심의 가책’과 동의어입니다. 사실 정치인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청렴결백함’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올바른 정치인이라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서슴지 않고 자신의 삶이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는 점을 강조해야 합니다. 그러하기에 그들에게 있어 이 ‘부끄러움’이 없음을 공표하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이 ‘올바르다는 것’, 더 나아가 ‘국민을 대표할 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대부분은 그 양심을, 그 부끄러움 없음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여 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부끄러움’이 없음이 곧 들통날 것을 알면서도 부끄럽지 않음을 스스럼 없이 공표하는 것일까요. 이는 대대로 정치를 둘러싼 허위, 가식적 행위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우리나라의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치인들을 지칭하는 용어 중 ‘대인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배포가 크고 사소한 일에 연연하지 않는 인물형을 말합니다. 정치란 곧 국가의 크고 작은 업무를 담당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국가’는 ‘나’,‘가족’,‘사회’를 둘러싼 가장 큰 공동체 범주입니다. 때문에 마치 국가의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은 반대로 ‘나’나 ‘가족’, ‘사회’라는 ‘사소한’ 공동체에 얽매이지 않는 ‘큰’ 일을 도모하는 인물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움’ 없음을 강요하는 것은 정치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일종의 분위기이기도 합니다. 어느덧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미덕인 양 여기게 된 것입니다. 당당함, 자신감, 욕망에 대한 스스럼없는 발언들, 솔직함 등이 이 시대의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이는 SNS가 발달된 시점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SNS식 대화는 ‘나’를 중심으로 하여 상대방에게 ‘내 얘기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즉, 발화자 위주의 대화방식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날로그식의 소통(예: 전화, 편지 등)에서는 존중되었던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반응 등은 뒷전으로 밀려났습니다. 발화자가 중심이 되어 대화의 상황을 이끕니다. 흔한 ‘카톡’의 경우에도 형식은 대화인 듯 하나 가만히 보면 일방적인 ‘말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서로의 생각을 듣고 나누는 방식의 대화가 아닌 것입니다. 인터넷의 댓글 역시 그러합니다.


‘돌직구 화법’ 즉 ‘직설화법’을 구사하는 TV 프로그램 역시 많아지고 있습니다. ‘돌직구’는 원래 ‘돌처럼 묵직하고 강한 직구’를 뜻하는 야구용어인데 요즘 쓰이는 의미는 말을 통해 남을 아프게 하면서 발생하는 통쾌한 느낌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대중들이 즐기는 이유는 개인이 그간 말하지 못했던 정치, 사회 문제를 아슬아슬하지만 통쾌하게 콕콕 찔러주는 부분에서 희열을 맛보기 때문이겠지요. 이는 마치 어떤 사안이나 일에 대해 “정면승부하겠다. 결코 타협하지 않겠다.” “애매한 복잡한 부분을 다 거둬내고 사안의 본질을 제시함으로써 시청자분들께서 좀 더 본인의 의견, 표현을 형성시킬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데 대단히 유효하다.” 라는 의지와도 접목되어 쓰이기도 합니다. 특히 방송 프로그램에서 돌직구 화법이 조명을 받는 이유는 만만하지 않은 사회 분위기와 힘든 삶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핵심을 찔러주고 답답함을 해소시켜 주는 데서 대리 만족감을 얻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 스스로 안의 화나 불만이나 감정을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걸 다 표출해야 속이 시원해지고 나의 정신건강, 나아가서는 심신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거침없는 솔직함은 ‘돌직구’가 대중문화의 인기 소재로 등장한 이유로 보입니다. 돌직구 화법식의 대화는 비방이 아닌 거센 비판의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또 불만이나 감정을 말을 통해 표출하고 싶어하는 사회적인 심리도 돌직구 화법 확산의 주요 요인입니다.


하지만 ‘부끄러움’을 상실한 지나친 솔직함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도 많습니다. 한 프로그램에 등장한 연예인은 누구라도 언짢게 생각될만한 풍자를 가감 없이 풀어냅니다. 아주 난감한 질문을 던져놓고 상대방을 당혹하게 만들고 웃고 즐기는, 그래서 남을 비하하는 것으로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고 진실함이 없는 말장난을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솔직함을 가장하여 남을 해치거나 비방하는 모진 언어를 확산시키고 다른 사람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은 채 내뱉는 말들. 이는 ‘부끄러움’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부끄러움’은 ‘소인배의 감정’?!

바로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마치 소인배나 소시민의 감성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방식 때문입니다. 이는 ‘부끄러움’이 지닌 개인지향성 때문일 것입니다. 부끄러움이 쓰이는 용례는 대부분 개인에게 적용됩니다. 특히 개인의 ‘내면’을 밖으로 드러내는 작용을 합니다. “좋아하는 여자친구에게 부끄러워 말도 못하고 끙끙 가슴앓이하던 소년이 있었다.”

또한 부끄러움은 대개 여성성을 함의합니다. “선생님께 칭찬을 들어도 부끄러워 오히려 고개를 숙이던 여학생, 간이 맞지 않은 음식을 차려놓고 부끄러워하는 새댁…. 부끄러워 양 볼이 꽃잎처럼 발개지고 땀이 송글송글 맺히던 모습” 등이 그러합니다. 마치 여인의 수줍음을 드러내듯 쓰이는 용례 때문인지 ‘부끄러움’은 곧 공적인 자리가 아닌 사적인 자리에나 걸맞는, 그리고 주로 여성에게 어울리는 단어로 규정되어왔습니다. 그러하기에 ‘부끄러움’을 마치 회피해야 하고 감춰야 할 부정적인 감정으로까지 여기는 사회 분위기도 만연해 있는 듯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문득 박완서의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소설이 떠오릅니다. 잠시 그 줄거리를 살펴보겠습니다. 동창회 모임에 참석한 ‘나’는 그간의 생활을 되돌아봅니다. ‘나’는 그동안 분주함으로 위장된 허구의 삶으로 가득찬 서울 생활에서 마음의 피로를 느낍니다. 동창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많이 변했다는 친구들의 말에 ‘나’는 부끄러움과 같은 감수성을 잃어버리게 된 과거의 경험, 즉 한국 전쟁 당시 피난 갔던 마을이 기지촌으로 변하면서 어머니가 생계유지를 위해 ‘나’에게 몸을 팔기를 강요했던 상황과 두 번씩이나 이혼했던 경험을 떠올립니다. 그러던 중 동창들과 함께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부끄러움을 많이 탄다는 경희네를 방문했는데, 그녀의 가식적인 언행 속에서 속물적인 근성을 발견하고 실망과 안도를 동시에 느낍니다. 일본어 학원을 다니던 ‘나’는 일본인 관광객이 모인 서울 한복판에서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관광 안내원의 말을 우연히 엿듣고 그동안 잊어버렸던 부끄러움의 정서를 다시 느끼게 됩니다. ‘나’는 모처럼 돌아온 부끄러움의 감정이 자신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 작품은 탐욕적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주인공이 ‘부끄러움’을 상실하게 되지만 결국 부끄러움을 되찾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딸에게 매음을 강요하는 부정적인 언행을 일삼습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고는 하나 혼인 전의 딸에게 “한강물에 배 떠나간 자국 있다던? 이 같잖은 년아”라며 매음을 강요하는 모성의 모습은 매우 불쾌감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끝까지 매음을 거부하자 “한 입 더는 게 낫다”는 생각에 딸을 결혼시킵니다. 그 때부터 ‘나’는 “그 가슴의 그 징그러운 젖을 빨고 자란 여자가 어떻게 감히 부끄러움이라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하며 부끄러움을 잊어갑니다.

한편 주인공은 친구인 경희를 만났게 됩니다. 그녀의 ‘싱싱한 느낌’이 부럽긴 하였으나 이내 경희가 주인공에 대해 세 번째 결혼한 것을 알고 정숙한 여자가 못들을 ‘망측’한 소리를 들었다는 얼굴을 ‘곱게 붉히더니’ 입에 손을 대고 웃었을 때, 경희가 지닌 가식을 보고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아름다운 포즈였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아니었다. 노련한 연기자처럼 미적 효과를 미리 충분히 계산한 아름다운 포즈일 뿐이었다. 부끄러움의 알맹이는 퇴화하하고 겉껍찔만이 포즈로 잔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실망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경희가 가지고 있는 부끄러움은 진정성을 상실한 ‘포즈’의 부끄러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알맹이’가 퇴화된 ‘껍질’만 남아 있는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나’가 갈망하는 것은 ‘알맹이’의 부끄러움입니다. 그것은 계산된 부끄러움이 아닌 진정성이 내재된 부끄러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나’는 한국인 안내원이 일본 관광객에게 한국에는 소매치기가 많으니 주의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이 때 ‘나’는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을 상실한 안내원의 태도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또한 되찾은 부끄러움에 몸이 더워지는 ‘환희’를 느낍니다. 즉 경희의 부끄러움이 ‘껍질’로 비유되는 가식적 부끄러움이라면 ‘나’가 비로소 느꼈던 부끄러움은 ‘알맹이’로 비유되는 진정성 있는 부끄러움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나는 왜 내가 그 말뜻을 알아들었을까 하고 무척 무안하게 생각했다. 그러다가 차츰 몸이 더워오면서 어떤 느낌이 왔다. 아아, 그것은 부끄러움이었다. 그 느낌은 고통스럽게 왔다. 전신이 마비됐던 환자가 어떤 신비한 자극에 의해 감각이 되돌아오는 일이 있다면, 필시 이렇게 고통스럽게 돌아오리라. 그리고 이렇게 환희롭게 나는 내 부끄러움의 통증을 감수했고, 자랑을 느꼈다. 나는 내 내부에 불이 켜진 듯이 온몸이 붉게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기에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내가 현실적 속물로 변하기 이전에 지니고 있던 순수한 감정을 상징합니다. 당시의 시대배경을 잠시 보자면, 전후의 폐허 속에서 출발한 급격한 근대화의 흐름 속에 정신적 가치는 외면되었고 물질적인 개발에만 치우쳐졌던 시기였지요. 그와 같은 피상적 근대화 과성 속에서 삶의 진정성은 상실되고 물질적 가치만이 유일한 삶의 가치로 등장하게 됩니다. 화려한 듯 보이지만, 세속적 출세의 욕망과 금전적 가치 위에 구축된 허구적 삶의 연속이라고 할까요. 그런 시대적 배경 속에 몸을 맡기고 흘러가는 대로만 살아왔던 스스로를 돌아보고, 번갯불에 맞은 듯 진정한 '부끄러움'의 정신적 세례를 체감한 주인공. 그 부끄러움의 통증은 오히려 주인공에게 자신에 대한 '자랑'이자 자긍심으로 귀결됩니다.

이처럼 ‘부끄러움’의 감정을 회복하는 것은 곧 이와 같은 추악한 현실을 반성적으로 인식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을 인식하는 것’은 곧 ‘전도된 가치 질서 속에서 삶에 대한 진정성을 회복하려는 노력의 환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인정할 때 진정한 당당함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끄러움 없음’의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페터 슬로터다이크는 <냉소적 이성비판>이란 저서에서 "아마도 앞으로도 여전히 사회 어딘가에는 냉소적 지성과 그들이 가진 현실적인 힘에 기반한 후안무치함이 존재할 것이다. 후안무치한 이들은 “본질적으로 혼돈에 빠진 (함께 뒤섞여버린) ‘동일주의자’- 인간관계에서 차이를 알지 못하거나 차이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이들의 모습은 큰 이변이 없는 한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후안무치함을 냉소적 이성의 태도로 규정하고 그에 대해 ‘뻔뻔함’으로 대처하기를 권합니다. 이는 일종의 저항의 몸짓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고의로 일상 대화의 규칙을 어기고 대화 맥락에 무관한 듯 보이는 말이나 행위로써 자신의 의사를 전하는 소통 방법을 말합니다. 이를 통해 끊임없이 타자를 일깨우고, 상대방과 자신과의 관계를 재정립해가면서 후안무치함에 지속적으로 말을 거는 것이지요.


“내 주위에는 많은 학생들이 출렁이고 그들은 학교에서 배운 것만으로 모자라 XX학원, ○○학관, △△학원 등에서 별의별 지식을 다 배웠을 거다. 그러나 아무도 부끄러움은 안 가르쳤을 것이다. 나는 각종 학원의 아크릴 간판의 밀림 사이에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는 깃발을 훨훨 휘날리고 싶다. 아니, 굳이 깃발이 아니라도 좋다. 조그만 손수건이라도 펄렁펄렁 날려야 할 것 같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라고. 아아, 꼭 그래야 할 것 같다. 모처럼 돌아온 내 부끄러움이 나만의 것이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제껏 우리는 부끄러운 감정이나 제대로 부끄러워하는 법에 대해 지나치게 무심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스스로라도 '부족함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겸허한 감수성'을 인지하고 이를 우리 아이들에게도 가르쳐야 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이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