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이웃, 그들은 누구인가
‘바라본다’라는 감각이 지닌 이타적 윤리
<눈 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에는 이름모를 바이러스로 인해 시력을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시각을 “세상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한다면 시각의 상실은 곧 나를 둘러싼 세계의 상실이자 관계의 소멸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곧 ‘sentient’(라틴어의 sentire(느끼다))한 존재 즉, 감각 지각을 기반으로 살아가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도 그려지지만, 인간에게 있어 감각은 단순히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간을 둘러싼 세상과의 관계맺음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때문에 이 영화에서 사람들은 눈이 멀면서 지금까지 익숙하게 지내왔던 것들과 결별하게 됩니다. 새로운 형태와 개념의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기존의 규칙에 맞추어 살아가지만 점차적으로 힘에 의해 생성된 규칙을 만들면서 상이한 공동체들을 형성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무리는 두 부류로 나뉩니다. 동물적 본능을 분출하며 타인을 배제한, 인간성을 상실해가는 폭력적 무리와 희생과 용기, 양보하고 믿고 연대함으로 위기를 벗어나는 무리로 말입니다. 감각을 왜곡되게 활용한 무리들에서 인간적인 윤리, 도덕은 찾기 힘듭니다. 하지만 어떤 목표, 어떤 윤리를 가지고 그 감각을 사용할 지를 아는 무리에게선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바로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지닌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본다’라는 감각이 지닌 윤리성에는 앞서 언급한 것 외에도 두 가지가 더 포함됩니다. 하나는 인간의 겉치레에 휘둘리지 않는 통찰력에 대한 요구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들 때가 있습니다. 일종의 상대방이 지닌 위상 혹은 외적 조건이 나를 압도할 때 그러합니다. 하지만 실상 그것은 인간 존재의 근본으로 파고들어가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합니다. 이 때 반대되는 ‘보이지 않음’의 감춰진 속뜻은 곧 ‘영혼’(인간 내면)으로부터 물질적인 것이 배제된 상태, 모든 것으로 벗어난 순수함으로 회귀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지상의 것, 오염된 것으로의 해방을 뜻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오히려 시각의 상실이라는 은유적 상황을 통해 다수의 인간들을 강제적으로 약자와 주변인으로 평등화시키는 효과를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불의를 지켜보는 행위, 곧 ‘올바름’을 지키겠다는 의지입니다. ‘정의로움’을 떠올려 볼 수 있겠지요. <눈 먼 자들의 도시>의 주인공이 독백처럼 언급하는 마지막 말은 의미심장합니다. 현대인들을 지적하며, “볼 수 있지만, 보지 않는 눈 먼 사람들”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즉, ‘본다’는 행위, 이를 행하는 사람이 지녀야 할 의무, 책무에 대해 짚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수의 사람이 장님이라는 약자였을 때 ‘볼 수 있는 자’는 강한 자였고, 더 구체적으로는 그 ‘보는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다수의 약자들을 구하느냐 혹은 버리느냐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곧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도리, 책무를 비롯하여 국가로 말하자면 국민을 보호할 책임, 의무 등까지도 포함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국민을 두려워하고 스스로도 불의를 ‘주시하는’ 사회와 국가는 아마도 제대로 밝혀져야 할 사건들이 규명되고 진실이 드러나는 공동체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은 1차적으로는 나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용되는 감각이지만 더 많은 경우는 타인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이타적 감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강좌에서는 ‘바라봄’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타인에게 다가갈 수 있으며 그의 삶에 어디까지 관여해줄 수 있는 지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눠 보려고 합니다.
불편한 ‘이웃’, 그들은 누구인가?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이웃입니까?”
이러한 질문을 통해 가장 먼저 제기되는 화두는 사회적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개인의 소외나 감시, 폭력과 같은 문제들일 것입니다. 좀 더 깊이 나아가자면 곧 공동체 안에서의 선과 악, 행복과 불행이 얼마나 다른 풍경으로 인간의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가에 관한 탐색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질문은 한편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즉, 사회적 관계 속에서 빚어지는 복잡함과 얽힘의 문제를 제시할 뿐만 아니라 그 너머 ‘나’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의 내밀하고도 은밀한 욕망이라는 문제까지도 끌어오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웃’이란 단어에는 양가적 감정 – 애(愛)와 증(憎)- 이 수반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의 두 기사는 이를 증명합니다.
굵은 제목만으로 보더라도, 두 편의 신문기사는 공권력의 영향력이 미약한 장소에서 사람들이 이웃을 통해 겪을 수 있는 상반된 경험치를 보여줍니다. 앞의 기사가 이웃을 통해 ‘상생하는 연대’를 구성하게 된 긍정적인 측면을 보여주었다면 뒤의 기사는 가족을 살해한 범인이 이웃이었다는 부정적인 면을 극과 극으로 드러냅니다. 이웃이기에 서로의 안전을 걱정하고 염려해주기도 하지만 반대로 범죄의 표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상영된 「이웃사람」이라는 영화는 이웃이 지닐 수 있는 잔인함과 그로 비롯된 공포와 더불어 동정심, 연민 등 복잡한 심리양상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화 내용에는 같은 공간 안에 살지만 단절됐던 이웃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외부의 침입자로 인해 더욱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주변을 돌아보게 되는 과정이 담겨있습니다. 여기에서의 이웃 역시 이러한 양가성을 드러냅니다.
요즘처럼 개인주의가 확산되고 사생활을 지키려는 강박이 심해지는 때에는 이웃과의 화합보다는 불신의 골이 그 깊이를 더해갑니다. 그렇게 본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 계명은 현대사회에서 실현하기엔 애초부터 불가능한 언명일 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웃을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인간이 지닐 수밖에 없는 보편적 감정이란 생각까지 듭니다. 이웃이란 곧 가족질서의 바깥, 사회적 관계 속의 타자이기에 면밀히 보자면 동일시하거나 이해하기 힘든 ‘외부’의 존재입니다. 이에 대해 정신분석학자 프로이드는 “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가? 그것을 하는 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을 주는가?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이룰 것인가? (…) 사랑은 나에게 의무를 부과하며,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기꺼이 희생을 치러야만 한다. 만일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든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인간의 이웃은 잠재적으로 원초적인 상호 적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당연하기에 “늑대”로 명명될 수밖에 없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들을 온전히 배척할 수 없고 이들과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는 이유는 이웃이 지닌 유동적 속성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은 바로 언제든지 나를 둘러싼 공동체 영역 ‘내부’로도 틈입 가능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욕망 언저리에 발생하는 불안감이나 적대감과 같은 복잡성을 외부로 드러내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러하기에 더욱 까다롭습니다. 하지만 이웃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고 사유하는 것은 분명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입니다. 특히 우리 곁의 대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회색빛깔의 불분명한 양상을 지닌 이웃에 대해 말입니다. 얼마 전 「착한 이웃, 불편한 이웃, 무서운 이웃」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착한 이웃과 무서운 이웃 사이에 낀 ‘불편한 이웃’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지요. 이들은 곧 ‘법과 무법 경계의 삼투가 가능하며, 동지라는 내부성과 적이라는 외부성의 관계를 변화무쌍하게 넘나드는 사람들’로 지칭할 수 있을 터인데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들이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든 변화하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웃을 적 혹은 동지, 그 중간자인지를 선포하는 문제는 곧 이웃 더 나아가 타자와 나 ‘사이’의 윤리를 어떻게 확정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타자의 혹은 타자를 위한 윤리’라고 명명한다면 이는 곧 그들에게 있어 역시 이웃이라는 경계선 상에 위치해있는 나의 정체성을 규정할 윤리는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 책임 등과도 맞물리겠지요.
따라서 이웃에 대한 이해는 타자와의 올바른 관계맺기에 대한 사유를 확장하게 만드는 동시에 돌이켜 ‘나’의 존재를 짚어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낯선 타자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통해 상처받고 고통 받는 사람들과 어떻게 윤리적 공동체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구체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