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이웃과 '그럼에도' 잘 지내야 하는 이유(2)

'너'를 통해 '나'를 발견하다

‘너’를 통해 ‘나’를 발견하다


한때 평범했던 이웃이 잔혹한 만행의 주범이 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사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종식된 즈음부터 대두된 윤리학의 딜레마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실마리로 발견한 것이 혹 그렇다면 이전부터 추구해왔던 ‘나’ 중심의 사유방식, 1인칭 중심의 윤리학이 어쩌면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와 폭력의 원인이지 않았을까,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은 기존의 주체 중심 윤리학에 대한 반성적 논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다시 말해, 주체를 중심으로 둔 윤리의식은 인간을 단순한 구조의 산물로만 나타내는 데 급급했기에 고유한 개인들과의 연결점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현존재는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에 이르지 못하였지요. 따라서 인간에 대한 바람직한 진리 탐구를 위해서는 오히려 주체를 벗어난 진리로부터 인간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법론이 제시된 것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타자를 통해 다시금 나를 규정하는 윤리학의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는 하나의 길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설명을 덧붙여 보겠습니다. 엄밀히 보자면 나의 ‘존재함’은 곧 관계로서의 실존을 뜻합니다. 즉 ‘있다’라는 존재의미는 ‘무엇과의 관계에 있다.’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란 이미 다원적인 양태들 속에서 자신의 존재함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가족 속의 한 어머니의 희생으로 그 아버지와 자녀들이 존속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어머니’를 그 가족들의 타자(성)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타자(성) 없이 아버지와 자녀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의 존재는 타자를 통해, 타자의 관점에서 규정되는 것입니다.


bandicam 2019-10-13 15-54-46-302.jpg (사진 출처: pixabay.com)


다음은 옥타비오 파스라는 시인이 지은 「태양의 돌」이라는 한 편의 시입니다. 이 시에서는 타자와 내가 실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 서로가 서로를 위한 존재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 일이 없다.
우리 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 되어본 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양식(糧食)이여
(옥타비오 파스, 「태양의 돌」)


이 시는 1990년 노벨문학상을 받기도 하였는데 나와 타자가 실은 우리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실존적 물음과 답을 담고 있습니다. 타자와 내가 결국 무관하지 않고, 타자를 통해 나의 실존을 확인할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다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강물에 나의 모습을 바라볼 때 표면적으로 비춰진 외형만이 나일까요, 아니면 비춰지지 않은 이면까지도 포함해야 진정한 내가 될까요? 물론 후자의 모습이 온전한 나인데 그렇다면 나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면 나의 이면을 일깨워줄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 대상이 바로 타자입니다. 내 안에 갇혀있던 나를 세계 밖으로 꺼내어 다시금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방편, 그 대칭점에 타자가 서 있는 것이지요.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이를 ‘존재’와 ‘존재자’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합니다. 흔히 말하는 존재를 수면 아래 가려져 있는 형이상학적인 상태라고 한다면 존재자는 수면 위로 드러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이 존재자에 의해 발동되는 사건으로 인한 제한된 영역을 존재 전체로 파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존재와 존재자의 관계는 단순히 이분법으로 나뉘어지지도, 그렇다고 전체와 부분으로서의 관계로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존재자는 ‘너와 내가 구별되지 않는, 비인칭의 주체’인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더 이상 홀로 존재하거나 타자를 배타적으로 사유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탄생할 때부터 타자가 존재하는 세계 안에 던져져 있는 존재자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렇듯 갇힌 나로부터가 아닌, 타자로부터 나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일은 어떤 방식으로 가능하게 될 지,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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