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타인들의 표상, 그들과 마주하기
낯선 타인들의 표상, 그들과 마주하기
이제는 낯선 이들을 통해 나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들을 진정한 이웃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1970년대 작품 중 최인호의 「돌의 초상」과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중에 수록되어 있는 「칼날」이라는 소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먼저, 「돌의 초상」에는 주인공이 공원에서 버려진 치매 노인을 우연히 만나 그 딱한 모습을 보고 집으로 데리고 와 돌보아주지만 어느 순간 그 노인이 자신의 삶에 마치 이물과 같은 존재로 느껴져서 다시 버리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삭막한 도시 공동체의 전형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주인공의 직업은 사진작가인데 평소 목욕하는 노인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여기며 주로 찍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사진 속에서 현실로 나온 노인은 그의 휴식처를 침범하는 이방인이 되고 맙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자유. 빈집에서 홀로 담배를 피우며 창문을 열어놓고 소파에 앉아 술을 찔금찔금 마시면서 홀로 석간신문을 보는 그 소중한 자유가 무단 침입한 이방인에 의해서 박탈되어버린 것이다.
이렇듯 타자를 배척하는 배경에는 특별한 논리적 근거가 없습니다. 단지 타자를 잘 알지 못한다고 해서 배타적으로 행동하고, 질투가 난다고 해서 허구의 적으로 만듭니다. 이웃을 향한 동정의 눈빛이 어느 순간 자신의 공간을 훼방하게 된 사람에 대한 불편함과 분노로 변질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환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관계 맺기에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가슴 저릿한 경험을 합니다. 치매 노인을 공원에 다시 버리고 돌아설 때 그 노인이 주인공의 손을 맞잡은 것입니다. 그 순간 주인공은 노인과 정서적인 교감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노인이 맞잡은 손을 통해 전달한 감사, 용서의 감정은 주인공이 지닌 죄책감과 맞물려 묘한 여운을 남깁니다. 그리고 한없는 고독 속에 잠겨 자신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고독’은 전체성을 소유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가지게 되는 감정을 말합니다. 고독은 다른 말로 결핍이기도 하지요. 결핍은 중요한 개념인데 이로 인해 인간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게 하는 초월 또는 이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어떤 이는 이를 ‘자유’의 다른 말이라고도 일컫습니다. 사실 인간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한편 세상에 속하지 못한 자이기도 합니다. 일례로 물질에 대해 생각해 보자면 인간은 이 땅에 속한 물질을 소유하긴 하나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 곧 어느 부분에서 스스로 소외되는 과정을 겪습니다. 물질로 편안해지지만 한편 고독해지는 원리입니다. 이는 인간 자체가 삶과 죽음이라는 시간에 갇혀 전체성을 획득할 수 없는 자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들입니다. 그러하기에 고독 혹은 결핍은 인간이 머물러 있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해 나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어느 한 곳에 머물러 그것을 유일한 진리라고 고백하지 않고 계속해서 어딘가로 향해가는, 무한히 자신을 이월해가는 존재 양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존재적 결핍을 인정하고 직시할 때, 인간은 타자의 세계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소설로 돌아오겠습니다. 노인을 공원에 버린 후 주인공은 집으로 돌아와 “우리가 죄인이예요.”라고 탄식의 눈물을 흘리는 아내의 말에 고개를 떨굽니다. 이 짧은 소설은 타자에 대한 불신과 불편함이 자라나게 된 까닭이 나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곧 나의 ‘외부’ 존재로만 그를 규정했고 화해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불편한 타자가 된 것은 아닐까하는 반성을 갖게 합니다.
<난쏘공>에는 난장이, 앉은뱅이, 꼽추처럼 외형적 불구성을 지닌 이웃들의 고단한 생활상이 담겨있습니다. 그 중 「칼날」이란 소설에는 서울 변두리 다세대 주택에 사는 신애라는 여성이 등장합니다. 어려워진 가정 형편 때문에 그곳으로 이사를 온 그녀에게 닥친 가장 큰 어려움은 다름아닌 ‘물’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점이었습니다. 여러 세대에서 하나의 수도관에서 흘러들어오는 물을 사용해야 했기에 원하는 시간에 물을 받아쓰기는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불편함보다 그녀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인간다움을 상실한 주변 사람들과의 생활이었습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남편을 비롯하여 물욕과 과시욕에 사로잡힌 이웃의 모습은 신애에게 매일같이 좌절과 외로움만을 안겨줄 뿐이었습니다.
남편은 신문을 놓지 않았다. 그는 직장에서, 지하도 속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그리고 숱한 배기 가스 속에서 쫓기며 몸둘 바를 몰라하는 자신을 느낀다고 말했었다. 그는 또 출퇴근길의 만원 버스 속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몇 대씩 줄을 지어 달려나가는 시청 쓰레기차를 본다고도 말했었다. 신애는 남편의 말을 알아듣는다. 얼마나 많은 정신이 날마다 시청 쓰레기차에 실려나가 버려지는가.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중략) “그러니까, 당신은 제 이야길 하나도 듣지 않았어요.” 이제는 식구들까지 각기 다른 말을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말은 늘 빗나갔다.
그런 그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이는 앞집과 뒷집에 사는 가까운 이웃이 아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가난한 난장이 수선공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수돗물을 쓸 권리를 갈취하는 여느 배관공들과는 달리, 수도관을 좀 더 낮은 곳에 달아서 좀 더 편리성을 부여하되 물을 함께 나눠쓰는 방법을 제안합니다. 그녀는 난장이 수선공을 보며, 그녀가 겪어왔던 고통이 그녀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불현듯 깨닫습니다.
신애는 난장이가 일을 하는 동안 그의 부대 속에서 나온 기계와 무쇠 조각들을 만져보았다. 그것은 절단기, 멍키 스패너, 렌치, 드라이버, 해머, 수도꼭지, 펌프 종지굽, 크고 작은 나사, T자관, U자관, 그리고 줄톱들이었다. 쇠로 된 것들뿐이었다. 모두 난장이를 닮아 보였다. 난장이를 닮은 이 도구들도 난장이가 잠잘 시간에는 벽돌 공장의 굴뚝 밑에 놓여 숨을 죽일 것이다. 난장이네 식구들도 모두 숨을 죽이고 잠잘 테니까.... 난장이에게 이 세상은 안전한 곳이 못 된다.
오래되고 낡은 공구들에 꽂힌 신애의 시선은 성치 못한 몸이었기에 더욱 힘겨웠을 난장이의 삶을 경유해, 온전해 보이지만 마치 난장이의 기구들처럼 낡고 초라하게 찌그러져있었던 자신의 내면에까지 이릅니다. 얼굴을 마주했을 뿐인데 그의 삶을, 더 나아가 그와 닮은 스스로를 발견하는 신애. 그 때 그녀의 마음에 변화가 생깁니다. 그녀는 난장이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혐오는 그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생겨난 오해의 감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히려 사람들이 스스로가 지닌 결핍을 가리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덮어씌우는 허위의식이라고 고백합니다.
아시다시피, 신애가 속한 현실의 공간은 권위주의적 체계에 의해 구획 지어진 공간입니다. 산업화를 통한 자본주의 사회구조의 구축은 다수자들에게 안정적 삶을 보장합니다. 또한 다수자의 효율적인 체제유지를 정당화하는 법이나 규범 등의 구조물이 사회 구성원 내 공동체 형성을 위한 사회적 유대감과 신뢰 획득 등의 효과를 유발합니다. 그리고 권력을 지닌 국가 또는 다수의 척도가 일상을 규정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처럼 인간적, 합리적으로 규정되는 다수의 권력수단은 사회의 인간화에 기여하기보다는 권력의 강화에 이바지하면서 인간의 위치를 더욱 고립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러하기에 이에 소속되지 못한 이들은 고립이나 빈곤과 같은 불안정적인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삶의 터전이 확보되지 않은 난장이 계층은 다수자의 궤도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고, 때문에 평범한 중산층에게는 일상의 공간이 사실상 소외된 계층에겐 살아가기에 두려운 공포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다수자에 속했던 신애가 난장이의 민낯 그 고통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이를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며 반응한 것입니다.
‘민낯’은 그야말로 벌거벗은 얼굴을 뜻하는 말입니다. 드러내보이고 싶지 않은 내면의 수치심, 부끄러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허위의식에 쌓여 그 검은 속내를 감추고 있다가 이것을 들키게 되었을 때 우리는 민낯을 보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민낯 앞에 ‘타자’라는 수식어가 붙게 될 때 이는 타자의 얼굴 너머 내면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특히 그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됩니다.
‘고통’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일종의 의식 속에 주어진 것으로 인간은 이를 능동적으로 수용하기를 꺼려합니다. 일상적 궤도에서 질적 의미에서 너무 지나쳐 있거나 벗어나있기 때문입니다.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는 고통이 인간 역사와 사회 진보, 문화 진보에 기여한다고 믿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인간에게 끼치는 외부적 고통(질병, 천재지변 등)을 줄이기 위해 과학과 기술은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문제들이 원활하게 해결된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겪는 고통이 줄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고통은 다른 것과는 달리 초월적 통각을 의미합니다. 이때의 고통은 하나의 ‘성질’입니다. 감각 작용이되 통합되거나 종합하는 것이 불가능한 감각 작용입니다. 즉, 의식 안에 수용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방식 그 자체가 여기에서 강조하는 고통입니다. 아무런 방어나 보호 없이 상처에 노출되어 있다는 의미이자 그러한 감성입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우리는 주도권을 상실합니다. 그런데 수용할 수 없고, 이해 불가능한 고통을 만날 때 그것은 내가 아닌 것, 낯선 것과의 접촉이며 절대적 타자성을 예고해주는 순간이 됩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수용 불가능성 가운데 타자와의 조우가 가능해집니다. 한탄, 신음, 외침, 한숨이 있는 곳에서 타자로부터 도움의 요청이 있고 여기에서부터 타자와의 관계 그 열림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도래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지닌 의미의 유무는 중요치 않습니다. 고통은 인간 상호 간의 윤리적 전망을 열어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칼날」에서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우리는 한편이예요.”라는 그녀의 고백은 난장이를 나와 다르지 않은 존재로 인정하는 단계, 그 지점에 그녀가 서있음을 보여줍니다. 홀로 있을 때엔 미완의 존재인 인간은 인격적으로 서로를 마주보는 상태를 맞닥트림으로써 본래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난장이라는 존재를 자신의 삶의 범주 속에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고통을 마주하겠다는 경계에 다다른 신애, 그녀는 비로소 자신이 완전체가 됨을 실감합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떠나 타자의 세계 속에 한 발을 내디딜 때 인간은 새로운 주체로 탄생하는 경험을 가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웃 표상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낯선 얼굴의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이때 낯설다는 것은 수많은 타자들이 사실은 고통 받는 사람이었으며 이미 그 고통을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럴 때 타자들은 나를 되비추는 거울이기도 하고, 분열된 자신을 추스르는 매개인 동시에 욕망과 욕정의 발현이기도 합니다. 개개인이 확보할 수 있는 개별적인 경험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전체화 할 수 없는 타자와의 관계를 인정하고 타자의 자리로 옮겨가서 ‘너’를 사유하는 것, 이를 통해 타자는 곧 나의 이웃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음 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