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이웃과 '그럼에도' 잘 지내야 하는 이유(최종)

'이웃'에 대한 책임과 '열린 사유'

‘이웃’에 대한 책임 - 열린 사유로 응답하라


김미월의 「유통기한」이란 작품에는 선배의 권유로 위안부 할머니 봉사활동을 시작한 경수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경수는 날라리 교인이지만 교회에 가는 마음으로 가까이 사시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이러한 행동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호기심이나 시혜의식에 가까운 것인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녀들에게 별다른 안쓰러움이나 연민 같은 감정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신축빌라에 사는 그녀들이 부럽고 별로 부족한 것이 없어 보입니다. 동네 교회에서 호의로 베풀어준 물질적인 것들을 아끼느라 쓰지 못하는 한없이 가련한 이웃일 뿐인 것입니다. 솔직히 경수는 처음에는 그녀들의 경험적 상처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할머니들의 상처에 관심이 없으니 그녀들이 보상을 요구하고 인권침해를 고발하는 항의시위에도 알바 아닙니다. 이러한 관망적 태도는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지 말라고 일본을 향해 직설적인 항의도, 반성적인 태도를 촉구하는 계몽적이고 이성적인 발언도 없이 시종일관 소설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에서는 이 할머니들의 권리와 명예를 회복시켜주어야 한다는 외침도, 혹은 역사적 책임을 묻는 질책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경수의 태도는 우리들도 한번 아무런 선입견 없이 죄의식이나 부채감이 없이 그녀들의 일상을 들여다보라고 권유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통기한을 지우면 새로운 상품이 되어 팔려나가는 물건들을 보면서 기억이란, 과거란 얼마나 부질없는 집착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입니다. 그러나 점차 위안부 할머니를 도와드릴 수밖에 없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지금까지 잊고자 했던 행위가 자연스러운 망각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부채를 다시 꺼내서 들여다봐야 하는 인간이 일부러 억제하고 자제했던 의도적인 망각이었음을 깨달아 갑니다.


육칠 십년 전 그날, 소녀가 옆집 아저씨에게 속아 이곳으로 오지 않았다면, 또래 소녀들과 함께 옷 보퉁이 하나씩을 끌어안고 두 줄로 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낯모르는 사내들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그녀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뜨거운 커피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렸다. 왕 할머니가 걸음을 멈췄다. 경수와 조 할머니도 따라 나섰다. … 그는 조금 들떠 있었다. 왕 할머니의 과거사 자체보다 그녀가 마침내 과거사를 털어놓았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격스러웠던 것이다.“…자궁이 없다.”

이때 그녀들은 자신들이 처한 비참한 현실과 자기 방어가 불가능한 상태로, 신체적인 우월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나에게 고통을 호소하는 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타자의 얼굴, 위안부 할머니의 얼굴은 그 순간 윤리적인 사건이 됩니다. 물론 그녀들이 비천하거나 도덕적으로 우월하지 못한 자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자발성에 갇혀 있던 경수에게 타자의 이방성, 낯설음은 타자에 대한 책임을 호명하면서 새로운 주체로 나를 거듭나게 합니다. 물론 낯선 타자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 결코 행복한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수는 몇 번이나 그녀들을 외면하고 도망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도 그녀들은 경수를 따라와서 함께 상처받고 고난 받는 타자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낯선 타자들은 점차 사회의 특정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주체에게 혼을 불어 넣어주고, 응답해야할 의무를 일깨워줍니다. 경수가 깨닫게 된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책임은 타자가 일깨워준 고귀한 의무인 것입니다. 더불어 고난 받는 타자에 대한 진정한 응답은 그들의 인권에 대한 외침과 구호, 요구와 같은 피상적인 행동이 아니라 내적인 공감과 상대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진정성이 담긴 의지임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bandicam 2019-10-14 04-15-12-620.jpg (사진 출처: pixabay.com)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는 열두 살의 소녀인 바리가 가족의 해체를 겪으며 홀로 북한을 떠나 중국을 거쳐 서구사회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영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가 숲에 내다버려서 이름이 ‘바리’가 된 그녀는 성장하면서 자신의 이름에 담긴 뜻을 깨닫게 됩니다. 곧 자신이 다른 사람의 다친 마음을 포용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약한 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바리는 안마사라는 직업을 가지면서 사회적 소수자들을 지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한편, 여기에서 바리가 지니는 위치는 특별합니다. 바로 ‘이주민’이라는 신분 때문입니다. 이주민들은 대개 그들이 거주하는 사회에서 ‘외부자’, ‘틈입자’로 치부됨으로써 단일한 지배체제에 균열을 일으키는 곤란한 존재로 인식되곤 합니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 사회에서 배척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리는 경계선 상에 서있는 자로 스스로를 인정하며 그 자리에서 타자를 포용하고 감싸안는 방법을 배워나갑니다.


이 소설에서 바리는 설화 바리데기처럼,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생명수를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생명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의 멘토인 알리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는 바리를 보며 이런 조언을 남깁니다.


희망을 버리면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다름없지. 네가 바라는 생명수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다만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자와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된다


‘생명수’란 무엇이었을까요? 결국 어두운 세상에서 신음하는 약자를 위해 바리가 흘리는 눈물이 생명수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바리공주가 구하려고 애쓰던 생명수가 자신이 먹고 마시던 물이었던 것과 같이 바리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존재하는 어려운 이들에 대해 갖는 사랑과 위로가 바로 그들을 살리는 생명수가 된다는 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소설은 임신한 바리가 남편과 함께 런던 지하철 테러 현장을 피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열린 결말로 끝맺음을 합니다. 위험의 상황에서도 임신한 생명을 지켜내려는 바리의 행위는 미래의 삶에 대한 책임과 의지를 내포합니다.


앞서 말한 고통받는 사람의 호소에 대한 반응, 요청에 대한 응답이 곧 ‘책임’입니다. 이는 타자의 짐을 대신 짊어져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타자와 이웃하기 위해 수반되는 책임은 타자를 그 자체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단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들을 본래의 그로서 살아가도록 자발적으로 보호막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타자를 향해 ‘책임’을 지기 위한 노력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책임감을 가진다는 것은 곧 삶을 보다 겸허하고 진중하게 살아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자기만이 아니라 자기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소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음의 문구는 한번쯤 되새겨 보아야 할 말이기도 합니다.


“책임 윤리학이란 무엇인가. 이는 의무론처럼 우리가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당위적인 강요가 아니다. 이는 적어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내가 누구에게, 무엇에 책임이 있으며 어떠한 상호작용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개인 주체의 관점에서 나의 삶은 내가 책임진다가 아니라 윤리적인 책임이란 타자를 위한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렇게 얻게 된 책임은 사회, 정치적인 제도 안에서 확인될 수 있는 정의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책임 윤리란 위의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누군가를 책임져야 한다는 당위적인 논리가 아닙니다. 고통 받는 사람들로 인해 상처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을 열어 침입해 들어오는 타자의 간섭을 기꺼이 껴안는 것입니다. 아마도 더불어 사는 공동체의 윤리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대면해야 할 윤리적 공동체가 어떠한 것인지 그리고 이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응답해야 하는 지를 점차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의 공동체를 위하여


앞서 언급했던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희망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었던 계기는 주인공 한 사람의 용기와 의지 덕분이었습니다. 그녀는 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약자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당한 사건, 정의롭지 못한 상황에 대해 단호히 비판하고 이를 바로잡으려는 날선 견제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그 공동체를 구현하고 지속시켜 나갈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기반은 바로 주변인들의 호응과 인간적 유대에 대한 참여였습니다. 즉, 정의를 지키려는 의지와 상호 연대가 없었다면 순간적인 위기의 모면은 가능할 수 있었겠지만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공동체의 유지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 밖 현실 세계를 보면, 지금도 여전히 누군가는 타자와의 진정한 마주함이 왜 어떻게 불가능한지를 수많은 이유와 함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물론 어려운 문제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에서 멈춰서 있기만 한다면 그 무엇도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를 넘어서기 위해 이제는 사유 너머로의 ‘무한성’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는 타자와의 관계에서도 적용가능합니다. 의지적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사실 깊게, 넓게 보자면 타자라는 관점에서 연결되는 일들이 일상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사실을 우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국 나와 타자의 관계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분리가 어려운 매듭같은 것이지요.




그렇다면 더 나은 공동체는 어떤 공동체일까요? 자기 타자성을 끊임없이 넓혀가는 사람, 추구하는 사람,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그 사회는 더욱 살만한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타자의 고통을 대신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타자를 위한 볼모가 기꺼이 되어줄 때, 비로소 이 세계 안에서 연민과 동정과 자비와 가까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타자를 위한 볼모” 이것이 타자와의 연대를 위한 조건인 것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타자의 윤리학’이 현실세계에서 실행 가능한 운동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나와 이웃 사이에서 중요한 것은 ‘이웃함’이라는 문제인데, 이는 결국 타자와 내가 하나의 장소 내부에 공존하겠다는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충실성과 지속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마무리로는 이러한 질문을 나누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누구와 이웃‘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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