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eroeg>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식민주의의 비극

by ratatouille


같은 풍경, 다른 세계

:소설 『Oeroeg』와 식민지의 시선

(좌측이 Raden Saleh의 <Perburuan Banteng>, 우측이 Jan Toorop의 <Het Oogstfeest>)


같은 시기, 같은 인도네시아 식민지를 배경으로 그려진 두 그림이 있습니다.
네덜란드 화가 얀 토룹(Jan Toorop)의 〈Het Oogstfeest〉와

인도네시아 화가 라덴 살레(Raden Saleh)의 〈Perburuan Banteng〉입니다.


두 작품은 모두 유럽 화풍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관람자가 받는 인상은 극명하게 다릅니다.
〈Het Oogstfeest〉가 평온한 농경의 일상과 질서를 담아내고 있다면,

〈Perburuan Banteng〉은 생존을 건 사냥의 폭력성과 긴장, 그리고 처절함을 전면에 드러냅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미적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가,

다시 말해 시선의 위치에서 비롯됩니다.


같은 장소와 시간이라도,

식민자의 시선과 피식민자의 시선은 전혀 다른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이러한 시선의 간극은, 헬라 하세의 소설 『Oeroeg』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0.

“당신의 친구가 사실은 다른 현실을 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있습니까?”


『Oeroeg』는 이 질문에서 출발하는 작품입니다.

소설에는 두 소년이 등장합니다.
한 소년은 네덜란드인 농장 관리인의 아들이고,

다른 한 소년은 그 농장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원주민 노동자 부부의 아들인 우루흐입니다.
두 소년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농장에서 태어나 함께 자라며,

겉으로 보기에는 형제와도 같은 관계를 맺습니다.

소설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Oeroeg was mijn vriend…”
“우루흐는 내 친구였다.”


이어 화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Oeroeg en ik, onveranderlijk samen, in alle ontwikkelingsstadia van kind tot jonge man.”
“우루흐와 나는 유년기에서 청년기까지 모든 성장 단계에서 변함없이 함께였다.”


이 문장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매우 깊고 단단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될수록, 이 우정이 처음부터 평등한 토대 위에 놓여 있지 않았음이 점차 드러납니다.




#1.

함께 자랐지만, 같은 조건에서 자라지 않은 두 사람


주인공은 네덜란드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정식 교육을 받습니다.
반면 우루흐는 그러한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Naar een ander soort school, natuurlijk…”
“물론, 다른 종류의 학교로 가겠지.”


주인공은 의자에 앉아, 익숙한 순다어가 아닌 네덜란드어로 질문에 답해야만 했습니다.


“Ik moest op een stoel gaan zitten en antwoorden, zonder vervallen in het Soendanees, dat me vertrouwder was dan Nederlands.”
“나는 네덜란드어보다 더 익숙한 순다어를 쓰지 않고, 의자에 앉아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이 장면에서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식민 권력의 도구’로 기능합니다.
네덜란드어는 교육과 권력의 언어였고, 순다어는 하위 언어로 간주되었습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Hij komt op geen enkele school met dat taaltje dat hij spreekt.’”
“그가 쓰는 그 말로는 어떤 학교에도 갈 수 없다.”


이는 식민지 사회에서 언어가 어떻게 위계를 생산하고, 배제를 정당화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2.

검은 호수에서 발생한 비극


이야기의 중요한 전환점은 ‘검은 호수(Telaga Hideung)’에서 발생합니다.
연회 이후 어른들의 무책임한 유람 도중 사고가 발생하고, 우루흐의 아버지 데포는 주인공을 구하려다 익사합니다.

아버지는 조용히 말합니다.


“‘Deppoh is vastgeraakt in de waterplanten… Deppoh is dood.’”
“데포가 수초에 얽혔다… 데포는 죽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사고처럼 보이지만, 식민 권력의 무책임과 구조적 폭력이 응축된 비극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이후 주인공은 악몽에 시달리고, 그의 부모는 죄책감 속에서 우루흐의 학비를 지원합니다.


“Ik wist nu ook dat mijn vader Oeroegs schoolopleiding betaalde…”
“나는 이제 아버지가 우루흐의 학비를 대신 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선택으로 인해 두 소년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지만,

이 역시 평등한 기회라기보다는 시혜의 형태를 띤 불균형한 지원입니다.




#3.

바타비아에서 벌어지는 균열


성인이 된 두 사람은 바타비아에서 대학 생활을 하며 다시 같은 도시에 머뭅니다.
그러나 이 시점부터 두 사람 사이에는 점점 거리감이 생깁니다.

우루흐는 주인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k heb jullie hulp niet nodig.”
“나는 너희의 도움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Jullie hadden er belang bij om de mensen te beletten zich te ontwikkelen. Maar dat is nu voorbij.”
“너희는 사람들이 발전하지 못하도록 막는 데 이해관계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끝났다.”


이 장면은 우루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고,

식민지 구조에 대해 분명한 분노를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이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의 우정은 사실상 종결됩니다.




#4.

전쟁 이후,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장소


전쟁이 끝난 뒤, 주인공은 다시 자바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어린 시절의 평온한 안식처가 아닙니다.


“De truck reed omhoog langs de weg als tussen de ribben van een geweldig kadaver.”
“트럭은 거대한 시체의 갈비뼈 사이를 따라 달리는 듯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한 원주민 남자가 주인공에게 총을 겨눕니다.


“‘Ga weg,’ zei hij in het Soendanees… ‘Je hebt hier niets te maken.’”
“‘꺼져라.’ 그가 순다어로 말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그 인물이 우루흐인지 아닌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습니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합니다.


“Ik wist niet wie hij was.”
“나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우루흐는 끝내 이해할 수 없는 타자로 남습니다.




식민지 구조

: 인종, 언어, 교육의 측면에서


이 작품에서 식민지배는 배경이 아니라, 인물 간 관계를 규정하는 구조로 작동합니다.


1) 인종과 계급의 위계


처음으로 가장 눈에 띄게 볼 수 있는 것은, 인종과 계급에 따른 위계구조입니다.

당시, 하얀 피부를 가진 백인은 권력과 교양을 상징한다고 믿었고,

그와 반대되는 토착민, 원주민들에게는 종속과 침묵을 강요하였습니다.


주인공 또한 우루흐가 자신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하급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감정을 교류하며 우정을 키워나갔지만,

두 사람의 심리적, 물리적 위치는 그리 가깝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인용문에서 보이듯, 두 사람은 해가 떠 있는 내내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우루흐는 하인방에서 생활을 하며 잠을 청했습니다.


어쩌면 끈끈한 우정 또한 주인공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책은 주인공 1인칭 시점으로 진행되고,

우루흐는 말이 적고 침묵을 유지하는 편이었기에,

우루흐의 내면에서 어떤 감정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마음의 소리는 들을 수 없습니다.


2) 언어


다음은 언어가 식민 권력의 도구로 쓰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작 초반에 네덜란드어보다 순다어를 더욱 능숙하게 구사하는 주인공을 본 그의 부모님은

이 모습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인식합니다.


그 이유는 주인공이 쓰는 네덜란드어는 ‘권력의 언어’이고,

우루흐가 사용하는 순다어는 ‘하위언어’로 취급되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우루흐가 쓰는 순다어로는 어떤 학교에도 갈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식민지 주체들은 피식민자들의 언어들을 그저 ‘문제’로 간주할 뿐만이 아닌,

‘교정’해야 하고, ‘축출’해내야 하는 부정적 요소로 인식합니다.

그와 동시에, 두 집단 사이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징표로도 인식한 것 같습니다.

3)교육


다음은 교육이 식민 권력의 재생산에 기여하는 모습입니다.


두 사람은 같은 환경에서 함께 뛰어놀며 자라났지만,

주인공은 정식교육을 제때 받을 수 있던 반면,

우루흐는 아버지 데포의 사망 전까지는 정식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우루흐가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주인공 가족들이 죄책감을 덜기 위해 교육비를 지원해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우루흐의 사례마저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만약 데포의 사망이라는 비극적 상황이 없었다면,

우루후는 평생 교육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이 교육비 지원마저도 시해와 같이 여겨지는 것을 보면,

두 집단 사이의 명백한 불평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닌, 후에 우루흐가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는

그가 너무나도 똑똑한 원주민이라는 것에

견제를 하고 불쾌함을 표하는 뉘앙스를 느낄 수 있는데

이 또한, 식민지 내부의 차별과 폐해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타자화와 혼종성


이 소설을 분석하는 핵심 개념은 타자화와 혼종성입니다.


타자화란,

중심에 있는 집단이 자신과 다른 존재를 ‘다름’으로 규정하고 하위화하는 과정입니다.

이는 단순한 차이의 인식이 아니라,

그 차이를 ‘열등함’이나 ‘원시성’으로 고정시키는 사회적 구조이기도 합니다.


책에서도 하위적 타자로 인식되는 우루흐와 그의 가족들은,

원시적이고 무지하고, 침묵하는 존재로 설정되고,

책의 1인칭 화자인 주인공은

그 중심으로 ‘우월한 위치’에서 주변을 인식하고 규정하게 됩니다.


이들의 관계는 표면적으로는 우정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식민지 구조 내 위계적 관계입니다.


특히 우루흐의 침묵은 말하지 못하는 존재로서의 타자화를 상징합니다.

그는 이야기 속에서도 끊임없이 응시되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에 주인공 요한이 “Ik wist niet wie hij was.”라고 말할 때,

그는 우루흐를 끝내 ‘이해할 수 없는 타자’로 남겨둡니다.

두 사람 사이의 간극은 끝내 좁힐 수 없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다음은 혼종성입니다.


호미 바바는 식민지 상황에서 정체성이 고정되지 않고,

중간 지대에서 섞이고 흔들리는 제3의 공간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이 공간에서는 중심도 주변도 아닌,

양쪽의 요소가 섞인 ‘혼종적 존재’가 등장하게 됩니다.


주인공 요한은 전형적인 혼종적 인물입니다.

그는 백인이지만, 자바에서 자랐고,

순다어를 유창하게 말하며 우루흐와 가족처럼 지냅니다.

그는 어렸을 적 자바에서 오랜 시간을 지냈기에,

육체적으로는 네덜란드인, 감각적으로는 자바인에 가까운 존재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경계인의 자리를 끝내 지속하지 못합니다.

성인이 된 요한은 결국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고, 다시 식민 정부의 군인으로 자바에 돌아옵니다.

그는 혼종성을 잠시 가졌지만,

제국의 언어와 정체성으로 복귀하면서 경계를 지우고 중심에 재귀합니다.


책에서 그려지는 우루흐 또한, 혼종성을 지닌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어렸을 적부터 네덜란드인인 주인공과 교류하였고,

아버지의 사망 후 네덜란드식 교육을 받으며 의과대학으로 진학합니다.

하지만, 곧 식민지 내의 차별과 폐해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자각하게 되고,

반란군이 되며 최후에는 저항을 주체로 전환됩니다.




비판점: 작가의 위치성

책은 ‘식민자 시점의 회고’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일부는 “진짜 피식민자의 목소리는 어디 있느냐”는 비판도 제기합니다.


이 비판의 근원의 작가의 위치성에 있습니다.

헬라 하세는 백인 네덜란드인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결국 식민자의 위치이며,

책에서의 우루흐는 끝내 ‘말하지 않는 타자’로 남습니다.

철저히 네덜란드 소년인 주인공 시점으로 내용이 서술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이러한 비판을 어느 정도 수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루흐를 더 적극적이고 명확한 저항의 인물로 형상화하여 그 간극을 보완하는 것 같습니다.




후속작과의 비교: Sleuteloog

작가가 이러한 시점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서 일지는 모르겠지만,

하세는 이후에도 『Sleuteloog』라는 소설 등을 통해

식민 기억을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으로 탐색합니다.


『Oeroeg』가 식민지 수혜자였던 백인 화자의 입장에서

식민지로 인해 파괴된 우정을 그저 자기중심적으로 회상하는 구조였기에,

화자의 시선이 미성숙하고 부분적으로 신뢰할 수 없던 반면,


『Sleuteloog은 화자를 바타비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은퇴한 역사 교사로 설정하였고,

좀 더 성숙한 관찰자로서 기억의 왜곡을 자각하면서

식민 답론을 비판하는 형식으로 재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중의 반응 역시 양가적입니다.

식민지배의 역사에 있어, 양가성이란

: 식민 지배가 단순히 일방적인 억압이 아닌, 지배자와 피지배자 모두가 서로에게

감정적, 문화적으로 얽혀 있는 모순된 관계임을 의미합니다.


Youtube에 게시된 Oereog의 실사 영화 댓글에는,
우정을 강조하는 감상과, 식민지 미화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이는 식민지배가 단순한 가해와 피해의 구도로 환원될 수 없는 양가성을 보여줍니다.


포스트콜로니얼 문맥에서는, 식민지 지배자와 피지배자 간의 관계가

단순히 '지배자 vs. 피해자'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애착과 반감, 동경과 혐오, 우정과 배신 같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관계임을 뜻합니다.

이런 실제 여론들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식민 국가와 피식민 국가 사이의 양가성은

오랜 시간동안 안고 가게 될 숙제와 같은 부분인 것 같습니다.


(출처: Oereog 영화에 대한 Youtube 댓글)



다시 질문으로 돌아오며


주인공은 우후르의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그는 단순히 피식민지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인물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루흐에게 있어 주인공은 더 이상 친구가 아니라,

식민지 구조 속에서 자신에게 압박을 가하는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식민지 지배 구조 속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가 매우 모호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요.
식민지배의 가해자는 언제 가해자가 되는 것일까요.


『Oeroeg』는 이 질문들을 독자에게 남긴 채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읽히고,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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