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순간엔 결국

누군가를 찾게 되는 게 사람인가봐

by 상하


2024년 여름의 이야기




차가 갑자기 퍼졌다.

정확히는 굴러는 가는데 갑자기 더 이상 이대로 굴리면 안 될 것 같은 상태가 됐다.


너무 더워 바다에 다녀오는 길에, 차에 이상이 있음을 눈치챘다. 차에 속도가 붙지 않으면서 계기판의 온도 바늘이 H 까지 치솟아오른 상태였다. 차를 몰기 시작한지는 반 년이 조금 넘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이게 원래 이랬던 거 아닐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잠시 했지만 평소 계기판 상태와 달랐기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름 용량이나 안전벨트 미착용 등의 기본 아이콘만 알던 터라 이유는 가늠할 수 없었다.


미지 앞에서 이상하게 놀람이나 두려움보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이 앞섰다. 마침 며칠 전부터 엑셀레이터를 밟을 때마다 평소와는 다르게 톱니바퀴가 헐겁게 맞물리는 느낌이 들어 이상하다 여기던 참이었기에 더더욱.


침착하게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계기판 사진도 찍어 문자로 보내고. 내용을 확인한 아빠는 차 온도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며, 가장 가까운 카센터를 검색해서 당장 가보라고 했다. 안일하게 생각한 것치곤 제법 심각한 문제인 듯했다.


그러나 여긴 시골이었고, 주말이었으며, 시간마저도 오후 6시를 갓 넘어 있었다. 지금 연 곳이 얼마나 되겠냐는 마음으로 카ㅋㅇ맵에서 카센터를 찾아 연락했다. 한 곳은 연락을 받지 않았고, 한 곳은 오늘 영업을 마감했으며, 또 한 곳은 대형트럭만 본다고 했다. 이 근처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도 없었다. 영락없이 시내까지 가야할 판이었다.


공교롭게도 시내까지는 아직도 30분을 더 가야했다. 시동을 다시 켜보니 나름 온도가 식었는지 다시 중간으로 바늘이 내려가 있었다. 보험을 부르면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모르는 동네, 도로 갓길에 여자 혼자 있는 건 위험하다는 판단이 섰다. 30분 동안 가다가 차에 불이 붙을 수도 있는 건 안 위험한 건지,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만 아무튼 나는 시내까지만 가자고 다짐했다.

그 위기의 순간, 스쳐지나간 누군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내로 들어서는 지점, 그러니까 읍의 경계쯤이라고 해야 할까. 큰 도로가 시작되는 지점에 아는 보살님이 하시는 식당이 있었다.


그래서 계획은 이랬다.


차를 거기까지만 어떻게든 딱 몰자.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차를 거기다 대놓고, 오늘은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가자. 내일 카센터에 가서 수리를 맡기는 거야.


나는 차를 출발했다. 이상하게 50km/s 이상 속도를 낼 수 없어 비상깜빡이를 켰다. 어쩔 수 없이 느리게 가면서 수많은 차들이 나를 지나쳐갔다. 핸들을 쓰다듬고 차에게 혼자 막 말을 걸었다. "베이비, 넌 할 수 있어. 너는 20년이나 된 짬바가 있잖아. 아이, 이쁘다. 힘내서 조금만 더 가자." 차를 어르고 달래는 게 누가 보면 우스울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으레 새 차를 사면 고사도 지내는데, 누구는 새 차를 뽑고 오랫동안 타왔던 차에게 그동안 고마웠다고 말하니 다신 켜지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했는데, 차한테 말 좀 거는 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나는 절박했고 집에 가기 위해서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가다가 계기판의 온도가 또 치솟기 시작하면 갓길에 차를 대고 쉬기를 몇 번. 겨우 지인분의 식당 앞에 도착했다. 울컥하는 마음을 참고 차를 댔다.


올 사람이 없는데 누가 오니까 거사님이 밖으로 나오셨다. 나는 급히 인사를 하고는 혹시 여기 차를 좀 대고 있어도 되겠냐 물었다. 얼굴 몇 번 본 젊은 처자가 울상이 되어 있으니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셨다. 사정을 이야기하자 거사님이 계기판을 들여다보고선 라디에이터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말해주셨다. 이윽고 거사님에게 이야기를 들은 보살님도 밖으로 나왔다. 나는 태연한 척 하려 했지만 보살님의 걱정어린 얼굴을 보자 금세 울 것 같았다.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바다 갔다 오는데 차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았어요, 근데 카센터가 다 문을 닫아서 일단 이리로 왔어요. 보살님밖에 생각이 안 났어요."

"그래, 잘 왔어."


거사님은 여기서 조금만 가면 아는 동생이 하는 공업소가 있다고, 소개를 해주신다고 했다. 차는 오늘 여기다 대놓고, 오늘은 택시 타고 집에 가고, 공업소에 연락 해둘테니 내일 다시 와서 가져가라고도 말씀하셨다.

나는 너무 감사했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웠다. 평소 다른 사람과의 교류가 부담스러워서 최대한 피해다녔던 주제에, 위기의 순간엔 결국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내 모습이 이중적으로 느껴진 것이다.


'사람은 결국 사람과 함께 부대끼며 살게 돼 있다.'

엄마가 자주 하던 말 중 하나인데,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치곤 했다.

하지만 속담이나 격언이 오래 살아남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그걸 온몸으로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사람은 결국 제가 일을 겪어봐야 온전히 아는 법인가보다.


그래도 감사함을 다시금 배우고, 부끄러움 하나를 줄일 수 있어 참 다행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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