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소설 COMPETITION #03
서대문구에 있는 H대학교. 정수현이 청춘을 불태웠던 곳이다. 남들이 술 마시고 연예하고 피시방 다니며 놀 때, 정수현은 오로지 설계에만 올인했다. 지금도 허구한 날 드나들었던 공대건물이며 설계실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앞에 서서 추억에 젖어본다.
‘그 땐 진짜 열심히 했는데.. 물론 그 뒤에도 열심히 한 건 맞지만, 그땐 뭔가 순수함이 있었지. 뭣도 몰랐지만..’
5층에 있는 박 교수님 연구실. 예전 모습 그대로다. 시설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면 좋으련만 이놈의 학교는 비싼 등록금 받아서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다.
“교수님, 저 왔어요”
“어 그래 어서 와. 앉아, 앉아. 음, 얼굴 좋아 보이네.”
“교수님도 좋아 보이시네요.”
H대 건축과 박진호 교수.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돌아와 교수 생활을 한 지 20여년이 넘어간다. H대에 온지는 15년째다. 정수현의 설계 스튜디오를 가르쳤었고, 유학 갈 때 추천서를 써 준 인연이 있다. H대에서 정수현이 가장 의지하고 따랐던 교수가 박 교수였다.
“이 현상 꽤 커 보이는데요.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정돈데..”
“뭐 국가대표라는 사람 다 하겠지. 나 정도면 어떻게 비벼볼만 할지 모르겠네..”
“에이 왜 그러세요. 교수님 정도면 모르는 사람 별로 없죠. 미국에서도 박 교수님 좀 알던데요.”
“하하, 무슨 소리야. 거기서 날 어떻게 알아.”
사실 박 교수는 자신이 운영하는 설계사무실이 따로 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생활 이외에 자신의 작품 활동을 위해 사무실을 별도로 운영하는 것인데, 많은 교수들이 그렇게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박 교수는 일련의 공공 현상설계 당선으로 사실 건축계에서 위상이 꽤 높다. 사무실도 10명 안팎의 소규모지만 내실 있게 운영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음. 그래서 내 생각엔 수현이 니가 잠깐이라도 우리 사무실에 들어왔으면 하는데. 두 세달만이라도..”
“음.. 아무래도 그게 낫겠죠? 회의할 때만 들어가는 것도 그렇고.. 그냥 교수님 사무실에 자리를 하나 잡는 게 낫겠네요.. 자리는 좀 있죠?”
“ 뭐 한 두 자리정도 여유는 항상 있으니까. 컴퓨터 여유분은 없을 거 같으니까 니걸 좀 들고 오면 될 것 같아. 니가 편할 때 들어와. 예린이한테 얘기 해놓을 테니까 구체적인 건 예린이한테 들으면 될 것 같고..”
최예린은 정수현의 대학교 동기다. 정수현과 상당히 가까이 지냈고, 주변에서는 사귀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오로지 설계에만 모든 인생을 바친 정수현은 여자는 사귀지 않는다는 주의였고, 둘 사이는 그렇게 유야무야 끝나고 말았다.
“내일이라도 들어오면 되는데.. 니가 편할 때 오면 될 것 같네. 지침서는 좀 읽어봤어?”
“예. 여기 경복궁 옆 땅인데.. 이거 이것저것 신경쓸게 엄청 많네요. *기무사? 이거 예전에 군사독재시절 시설 아니에요?”
*국군 기무 사령부: 국방 관련 기밀 보안 업무를 수행하는 국방부 직할 군 수사정보기관으로, 줄여서 기무사라고 부른다. 민간인 사찰 의혹 등으로 비판여론이 많아졌으며, 결국 해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어. 뭐 이 땅이 걸려 있는 게 많아. 굉장히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것 같아. 지침서나 다른 자료들도 찬찬히 읽어보고 사이트 답사도 해봐야지. 현장설명회랑 시설 공개를 다다음주인가에 한다고 했던 거 같아. 변명이지만 내가 좀 바빠서.. 하하. 예린이랑 잘 얘기해봐. 일단 너희 둘 위주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대표야 내 이름으로 가겠지만.”
사실 박 교수님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현상설계에 아주 적극적으로 나서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결국 정수현과 최예린이 주도해서 팀을 이끌어가고, 박 교수가 회의 때 의견을 주면서 전체 방향을 정하는 방식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일단 최예린을 만나야 되겠구나 싶다.
“예 교수님. 내일은 좀 그렇고 금요일 정도에 가보도록 할게요.”
아무리 별 거 없는 사무실이라도 뭔가 정리는 하고 가야 될 것 같다. 정수 형과도 몇 마디라도 하고 가야 할 것 같고. 그리고.. 최예린을 만나려면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하다.
박교수님과 간단한 점심식사 후 학교를 나선다. 그래도 할 일이 생겼구나. 내가 나서는데 뭐라도 입상은 해야 되지 않겠어? 음.. 근데 최예린 얼굴은 어떻게 보나.. 정수현은 걱정이 앞선다.
며칠 뒤, 정수현이 아버지의 구형 그랜저를 몰고 서울 시내를 달리고 있다. 트렁크에는 컴퓨터와 건축책들이 몇 권 실려있다. 정수현은 아직 차를 사지 못했다. 거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필요할 때만 아버지 차를 얻어 쓰고 있다.
정수 형과는 일단 몇 달간만 교수님 사무실에서 일하고 현상설계 후에 돌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다. 물론 당선이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사실 그럴 가능성은 그다지 높지 않으니까..
“예, 작은 아버지. 감사한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거 같아서요. 연락처 보내드린 회사가 이런 일 잘 한다고 하니까요. 전화 한번 해보세요. 신경 써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거절 전화는 불편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은 빨리 못한다고 하는 게 상대방에게도 예의일 것이다. 할 수 있는 결정과 판단은 빨리 빨리 하자는 게 정수현의 스타일이다.
박 교수님의 사무실에 도착했다. 박진호 도시건축사무소. 80년대 지어진 단독주택을 개조해서 사무실로 꾸렸다. 옛날식 담장과 정원이 정겹다. 주차 공간이 협소하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다. 길에 차를 잠깐 대 놓고 전화를 건다.
“박 교수님 소개로 온 정수현이라고 합니다. 잠깐 짐 좀 옮겨주실 수 있을까요?”
“예, 아침에 교수님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얼른 나갈게요.”
사무실 밖에서 깜빡이를 켜고 서성거리는 정수현에게 한 젊은이가 얼른 다가온다.
“이것만 옮기면 되나요? 얼른 들어오세요.”
10년 전 봤던 교수님 사무실에서 그다지 변한 게 없다. 책장 가득 꽂힌 *엘크로키를 비롯한 각종 건축책들, 모형들.. 교수님을 도와 방학 때마다 아르바이트도 여러 번 했었다. 정수현의 능력을 잘 아는 박 교수는 급할 때마다 정수현을 불렀었다.
* 엘크로키: 스페인에서 발간되는 유명 건축잡지. 큰 판형의 시원시원한 편집, 비싼 가격으로 유명하다. 세계에서도 가장 유명한 건축가들이 주로 실린다.
“이 자리에 앉으시면 될 것 같아요. 제가 도와 드릴께요.”
싹싹한 남자직원인데 나이는 20대 후반 정도 될 것 같다. 교수님이 말씀하신 똑똑한 친구가 이 친구인가 싶다.
“어 수현이 아냐? 오랜만이네. 길 가다 보면 못 알아보겠는데.. 잘 지내지?”
“아, 강소장님. 잘 지내시죠? 진짜 오랜만이네요.”
강민수 소장. 외부활동이 많은 박교수를 대신해서 실질적으로 사무실을 이끌어가는 리더라고 할 수 있다. 실무경력이나 경험 등 모든 면에서 사무실의 최고참이다.
“미국에서 날라 다녔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언제 들어온거야?”
“한 서너달 된 것 같아요. 날라다닌 정도는 아니고.. 그냥 저냥 한거죠 뭐..”
“그래.. 아 맞다, 예린이는 지금 현장 나갔어. 조금 있으면 올 것 같은데.. 사실 예린이 없으면 우리 사무실 안돌아가지. 하하. 어이 박차장, 수현이 알지?”
정수현은 사무실의 다른 분들과도 데면데면하게 아는 사이라 인사를 나눈다. 가정집을 개조한 사무실은 거실이 회의실, 작은 방이 교수님방, 큰 방이 직원들이 일하는 설계실로 꾸며져 있고 주방이 간단한 탕비실과 모형작업을 위한 공간이다.
컴퓨터를 연결하고 책을 꽂아놓고 스탠드 필기도구 등을 세팅하고 하니 그래도 내 자리 같아 보인다. 사실 정수현은 * 노마드 같은 성격이 있어서 어디에서나 일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있다. 그래도 여기서 몇 달을 일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내 자리처럼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마드: 유목민을 뜻하는 라틴어로, 정해진 자리나 위치 없이 여러 장소를 떠돌며 일하는 최근의 풍조를 반영하는 단어로 유행을 타게 되었다.
지침서를 들여다본다. 공모의 명칭.. 공모의 목적.. 참 대한민국의 공문서라는 것은 몇 십년이 흘러도 변하는 게 없다. 대형 국책사업이라고 해서 고리타분하고 관료적인 단어가 꼭 등장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아까부터 정수현의 시선은 현관문에 쏠려있다. 최예린이 언제 등장할 것인가가 줄곧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 오늘 진짜 덥네. 안녕하세요.”
최예린이 손부채질을 하며 사무실로 들어온다. 초여름 더위에 몇 시간을 현장에서 실갱이를 벌이다보니 잔뜩 지친 모습이다. 정수기에서 물 한잔을 받아 들이킨 후 사무실 구석 자기 자리에 털썩 앉는다.
‘음.. 어색한데..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강소장이 먼저 말을 건다.
“그래 예린아 고생했네. 현장에 별 일 없지?”
“별 일 없긴요. 오늘도 엄청 난리치다 왔어요. 어떻게 골조가 잘못될 수가 있지? 도면도 안보고 시공하나? 다시 해달랬더니 *데나우시 못하겠다고 난리에요.”
*데나우시: 다시 한다는 뜻의 일본어로 현장에서 기존에 작업된 것을 철거하고 다시 시공한다는 뜻으로 흔히 사용한다.
“*감리가 하는 일이 도면대로 하라는 건데 그걸 못한다고 하면 어떡하나.. 에휴. 내가 현장소장한테 전화해볼게. 아, 수현이 왔어. 둘이 잘 알지?”
* 감리: 시공 현장에서 설계도면대로 제대로 시공되는지 확인하는 용역 혹은 그 일을 맡은 사람을 일컫는다. 보통은 설계자가 감리도 겸하였으나 규모가 큰 공사 혹은 관청에서 지정한 공사는 설계자와 감리자가 분리되도록 하고 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최예린이 먼저 말을 꺼낸다.
“아.. 정수현. 미국에서 잘 나간다고 소문 많이 들었어. 잘 지냈지?”
“음.. 예린아, 오랜만이네. 진짜 10년 넘게 못 본거 같은데.”
절친 사이였다고 보기엔 너무 어색해 보인다. 둘 사이에 기름종이 같은 게 끼어있는 느낌이랄까. 강소장이 끼어든다.
“둘이 할 얘기가 많을 거 같은데 나가서 커피 한 잔씩 마시고 와. 예린이도 현장 다녀와서 힘들테니까. 앞으로 몇 개월을 같이 봐야 되는 사이니까 잘 지내야지. 하하.”
두 사람은 어색하게 사무실을 나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