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소설 COMPETITION #05
정수현이 박교수의 사무실에 온 지도 3일이 되었다. 오늘은 킥오프 미팅을 하기로 한 날이다. 아직은 특별히 나온 작업물은 없지만 스케줄 등 현상설계의 전체적인 내용들을 공유하기 위해서 모이는 자리다.
“아, 수현아. 좀 지낼만 해? 잘 되가니?”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박교수가 회의실로 들어선다.
“예. 아직은 파악하는 단계긴 해요. 조금씩 보구 있어요. 오늘 회의하고 슬슬 만들어 보려구요.”
이어서 강소장, 최예린(회사에서의 직책은 차장이다), 김종민(대리)이 차례로 들어선다. 강소장은 당장 작업에 참여하지 않지만, 차후 인원 분배 등을 고려해서 현상설계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당분간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이종민이 전체적인 사항을 먼저 브리핑한다.
“우선 마감이 10월 23일이에요. 금요일이네요. 한 석달.. 95일 정도 남은 거구요. 제출물은 A3 보고서 20페이지랑 A1 *패널 네 장.”
“모형은 없어?”
“예. 모형은 없구요. 상대적으로 규모에 비해 간략한 편이에요.”
“CG 제한은 없나?”
* “렌더링 할 수 있어요. 이 정도 규모면 당연하겠지만..”
* “CG는 내부에서 해야 하나?”
“일단 내부에서 하는 걸로 보자. 난 CG 일부러 맡기는 거 별로라서. 그다지 맘에 들지도 않고.”
“종민이가 고생해야겠네..”
*패널:흔히 도판이라고 부른다. 설계도면, 투시도, 개념도, 텍스트 등을 한데 모아 레이아웃하여 설계안을 설명하기 위해 꾸민 게시판 같은 걸로 보면 된다.
*렌더링은 실사처럼 만들기 위한 효과를 뜻한다. 최근 현상설계는 설계사무실의 과도한 업무와 외주비 지출을 막기 위해 렌더링을 금지하기도 한다. 이 현상설계에서는 렌더링이 허용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CG는 별도의 비용을 들여 외주업체를 둬서 아웃소싱하기도 한다. 하지만 꽤 큰 비용을 요구할 때가 많다. 그리고 설계사무소 특유의 느낌을 내기 위해 사무실 내부에서 처리하기도 한다. 흔히 말단 급에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김종민이 고생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무적인 이야기들이 오고간다. 사실 정수현 마음 같아선 이 정도 현상이면 혼자서 해도 할 것 같다. 하지만 한국 건축사도 없고, 일단 팀 소속으로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니 참고 같이 하는 수 밖에 없다.
“CG는.. 이런 말씀 드리기 좀 그렇지만 제가 해도 될 거에요. 한국 현상설계 제출한 것들 좀 보니까 제가 모델링이랑 렌더링 돌려도 충분히 할만 하더라구요. *다이어그램이나 이런 것들도 마찬가지고..”
* 다이어그램: 건축설계를 진행, 발전시키는데 사용되는 개념 도식 내지는 그림을 말한다.
“어얼.. 정수현. OMA 물 먹은거 티 내는거야? 하기야 거기서 맨날 그런 것만 했을 테니까 도가 텃겠지.”
“야. 최예린. 못 믿으면 말던가.”
“워워.. 벌써 싸우지 말고. 하하. 그래 수현이 퍼포먼스야 내가 잘 알지. 그런데 우리 사무실에서 해오던 분위기나 그런 게 있으니까. 차차 하는 거 보고 결정하자고.”
이종민이 설명을 이어간다.
“일단 지침서에서 중요한 건.. 주변에 경복궁 때문에 3층 이상 계획이 거의 불가능해요. 건축물 높이 제한 10미터 니까.. 근데 요구 *프로그램들을 보면, *캐드로 조금 깔아봤는데.. 지하로 많이 가야 될 것 같아요. 이 정도면 거의 모든 팀이 프로그램들을 지하로 많이 보낼 것 같구요. 다른 답이 없으니까. 두 번째가 기존 한옥 건물들이랑 기무사 건물을 보존해야 하는 것.”
“그래. 근데 그 기무사 보존이라는 게.. ‘최대한 보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반드시 필요할 경우 *구조 검토 및 발주처 협의 후 리모델링 가능’. 이런 구절이던데. 이게 보존 하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CAD: Computer Aided Design의 약자로, 원래는 컴퓨터를 이용한 디자인 시스템을 총칭하는 단어이나 건축설계 업계에서는 autodesk 사에서 나온 autocad 프로그램을 칭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컴퓨터를 사용해서 정확한 도면을 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프로그램: 건축물을 차지하는 실들을 칭하는 말. 미술관이라고 하면 전시실, 사무실, 수장고 등을 일컫는 말이다.
*건축물을 설계할 때 순수한 건축물의 디자인을 하는 건축 설계자 외에 구조, 기계, 전기 등을 담당하는 설계자가 필요하다. 이 중 구조 설계자는 건물의 하중 등을 계산하여 튼튼하게 서 있을 수 있도록 부재 사이즈, 철근 개수 등을 결정하며, 기존의 건물을 리모델링한다면 그 건물의 보강이 필요한지 등을 검토하는 것을 구조 검토라고 한다. 지금의 경우 기무사 건물의 구조검토가 필요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게 기무사라는 이 건물이 ㄱ자 형상으로 대지를 감싸고 있는데다 지하까지 있어서 뭔가 제약이 좀 많긴 해요. 대지 남측에 북촌이랑 이어지는 광장이 있는데 이걸 미술관이랑 연결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기무사가 딱 가로막고 있는 형상이라서요.”
“보존도 하면 좋겠고. 일부는 터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대충 그런 상태인가.”
“아무튼 지침도 애매하네. *질의응답 때 물어봐야 하나.”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마세요.. 이러고 말 것 같은데.”
*보통 현상설계 시 참가자들의 질의를 받아 주최측이 공식적인 답변을 한다.
“그거랑 역시 중요한 것이 심사위원. 국내 건축가 3명, 해외 건축가 2명인데.. 국내는 홍준성, 이만영, 목장호 이렇게 3명이구요. 해외는 샘 헤밍턴, 도로야마 아키라 이렇게 2명이에요.”
“아, 홍 선생님이 들어오셨구나. 아무래도 홍 선생님 주도로 갈 것 같네.. 해외 건축가의 무게감도 떨어지고.”
홍준성 건축가. 가히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한국 근대건축의 거장 이정희 선생님께 직접 사사 받고 자기 이름의 설계사무소를 차린 후 30년동안 숱한 대표작들을 남겼다. 최근엔 정부 직속의 건축문화 위원장까지 지낸 사람이다.
“ 홍 선생님 성향이라면 아무래도 기존 도시조직의 보존, 주변 *컨텍스트와의 조화.. 이런 얘기 위주로 가야 될 것 같긴 하네.”
“ 음.. 뭔가 그다지 그렇게 하고 싶진 않은데.. 심사위원 성향도 좀 보긴 봐야 겠네요.”
*컨텍스트: 건물 주변의 도시조직, 자연환경 등 주변 상황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정수현은 심사위원 성향에 맞춰 뭔가 만들어 낸다는 것이 체질상 썩 내키지 않는다. 그리고 예전부터 도시 조직, 주변 컨텍스트, 대지의 보존 등등 뜬구름 잡는 듯한 우리나라의 건축 담론들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유학을 결정한 것도 있었고..
“아무튼 이 정도 얘기하면 충분히 다들 알 것 같네. 매주 목요일에 회의 하는 것으로 하고. 예린이랑 수현이가 금요일에 * 현장 설명회 좀 다녀와야겠어. 거기서 뭔가 특별한 얘기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일단 들어보고 와야지.”
현장 설명회라.. 그래 일단 사이트는 가보고 설계를 시작하는 게 맞긴 하다. 정수현은 회의 중에 떠오른 몇 가지 아이디어들을 얼른 스케치해볼 생각을 한다.
*현상설계에서 주최측이 현장에 참가자들을 모아 제반사항 등을 설명하는 행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