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설명회

건축소설 COMPETITION #06

by 글쓰는 건축가

오늘은 현장설명회가 있는 날이다. 사실 정수현도 그동안 이런 저런 이유로 사이트(현장)에 와보지 못했고 오늘 처음 둘러보는 것이다. 기무사(국군기무사령부, 군사에 관한 정보수집 및 수사를 목적으로 창설된 국방부 직할 수사정보기관)라는 것이 국가 보안시설이었기 때문에 아직은 경비가 삼엄한 분위기다. 주변 철조망들도 아직 철거되지 않아 을씨년스럽다.


사실 정수현이 OMA에서 숱하게 현상설계를 해봤지만 직접 현장을 방문한 적은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OMA는 전 세계에 걸쳐 굵직 굵직한 현상에만 참여하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그 나라까지 방문할 여유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정신없이 디자인을 뽑아내긴 했지만, ‘대지를 가보지도 않고 설계를 하는게 맞나?’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어? 정수현. 빨리 왔네. 어얼.. 옛날이랑 많이 달라졌네.”

멀리서 최예린이 다가온다. 하기야 정수현도 학생 땐 설계한다는 핑계로 약속을 잘 안지키곤 했다. 하지만 수년간 ‘일’로서 설계를 하다 보니 그런 버릇은 많이 고쳐졌다.

“나도 나름 프론데..이 정도 시간은 지켜야지. 시간 됐네. 얼른 들어가자.”

“더운데 이거 하나 마셔. 너 것도 사왔어.”

최예린이 테이크아웃 커피를 건넨다.

“아.. 고마워. 잘 마실게.”


현장설명회는 옛 기무사 건물의 대회의실에서 열린다. 현상 공모전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을 하고, 질의 응답 후에 사이트를 둘러보는 일정으로 되어있다. 큼직한 회의실이 크고 작은 설계사무실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다.

“이 중에 아는 사람이 무조건 있을 것 같은데.”

“너야 10년 넘게 외국에 있었으니 좀 덜할 수 있는데, 난 벌써 두 세명 봤어. 귀찮아서 일일이 아는 척 안했을 뿐이지.. 어 저기 김철민 소장님이네. 안녕하세요, 소장님.”

최예린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정수현은 멀찍이 떨어져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설계가 힘들다, 어렵다 하지만 아직도 이런 대형 프로젝트가 생기면 어디에 다들 숨어있었던 것인지,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자신의 디자인이 자신의 손길로 국가를 상징하는, 혹은 지역을 상징하는 거대한 건축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작은 보상에도 불구하고 이 많은 사람들이 설계를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그것이 마치 로또에 당첨되는 것과 같이 희미한 가능성이라고 해도 말이다.


“어? 예린이 아냐? 진짜 오랜만이다. 미모는 여전하네, 하하. 음..어? 이게 누구야.. 정수현아냐? 수현이 맞지?”

“어? 재민이? 재민이 맞지? 진짜 오랜만이네. 잘 지내지?”


문재민. 정수현, 최예린과 같이 H대 건축과 동기다. 문재민 역시 설계를 잘한다고 소문난 친구였다. 강남 명문고 출신에 부모님도 부자라서 학생 때부터 부티가 많이 나던 친구였다. 최예린이 정수현과 서로 인정하던 사이라면 문재민은 정수현이 인정하기 싫었던 친구였다. 항상 뺀질거리다가 학기말에 빠짝 달려서 퀄리티를 올려 학점을 잘 받곤 했는데, (정수현이 보기에) 어설프게 쌓은 각종 건축 지식과 현란한 언변으로 무장한 화려한 프리젠테이션이 한 몫을 단단히 하곤 했다. 정수현은 학생 때부터 이렇게 말로 적당히 때우는 듯한 설계 스타일을 정말 싫어했다.


게다가 문재민은 얼굴도 제법 잘 생겨서 따르는 여학생들이 정말 많았다. 본인도 그걸 알고 즐겨서, 여자친구가 자주 바뀌는 바람둥이로도 명성이 높았다. 최예린에게도 몇 번인가 다가가긴 햇지만, 정작 최예린이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재민아, 잘 지냈지? 성문 다닌다고 했던 거 같은데, 맞지?”


“아 맞아. 벌써 10년 정도 되가네.”

성문종합건축사사무소. 국내에서 가장 크고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대형설계사무소다. 공항이나 오피스 등 대기업의 대형 프로젝트들을 주로 수주하고 있고, 설계인원만 600명이 넘는다. 문재민은 성문의 현상설계팀에서 일하고 있다. 2년 전부터 책임디자이너로 일할 만큼 진급도 빨랐고, 사내에서도 인정받는 그야말로 ‘에이스’였다.

“그래. 성문에서 엄청 잘 나간다며. 소문 많이 들었어. 졸업하고 거의 처음 보는 것 같네.”

“왜, 한 5년 전에 동문회에서 본 것 같은데. 정수현은 정말 처음이고. 미국에서 대단했다고 하던데, 언제 들어온거야?”

“한 서너달 됐어. 이제 막 적응하고 있는 정도지.”

“그래, 한국생활 쉽지 않지. 설마 이 정도 현상을 혼자 하려고 온거야? 라이센스(건축사) 있는 사람은 구했나? 쉽지 않을 텐데..”


*건축사를 흔히 라이센스라고도 부른다.


이 놈은 10년 만에 보는 건데도 속을 긁는 것은 여전하다. 학생 때도 정수현에게 라이벌의식이 있어서 그다지 고운 말을 안했었다.

“아니야. 수현이는 우리 사무실이랑 같이 하는 거야. 교수님이 부탁하셔서. 여기도 그래서 나랑 같이 온거고..”

“아 박교수님이랑 같이? 그래도 박교수님이 챙겨주시네. 다행이다 야. 하하.”

“성문 거기는 좀 어때, 할 만 한가?”

“아무래도 제일 크니까. 체계를 갖춰서 하긴 하지. 좀 딱딱한 스타일이긴 하지만. 이 현상도 20명 정도 붙어서 할 것 같아. 내가 실질적인 팀장이고.”

안 물어본 것도 넙죽 넙죽 잘도 말하는구나. 잘난 척은 여전하다. 지 버릇 남 못준다고, 5분 정도 얘기했는데 벌써 더 들어주기가 힘들다. 최예린과 이야기하라고 하고 외면해버린다.

“아, 이제 시작하려나 보다.”

양복을 차려입는 웬 남자가 단상 위로 올라온다. 미술관 관계자인 듯 싶다.


남자가 인사를 한 후 방안에 불이 꺼지고 빔 프로젝터가 켜진다. 남자가 설명을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이렇게 열정적으로 참여해주신 전국의 건축가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현상설계 공모전의 진행을 맡은 국립현대미술관의 이종수 과장이라고 합니다. 우선 간략하게 저희 공모전, 국립현대미술관 신관 현상설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지 위치, 규모, 예산, 프로그램, 주의사항 등등 일반적인 내용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사실 지침서에 거의 다 나와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것은 딱히 없다. 전시공간의 높이를 강조하는 것 정도가 조금 특이하다고 느껴진다.


30여분에 걸친 설명이 이어진 뒤 이종수 과장이 덧붙인다.


“일단 저희가 준비한 내용은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원래 이메일로 질의응답을 따로 받기로 되어있습니다만, 현장답사에 앞서 저희가 답변해드릴 수 있는 건 답변해드리려고 하는데, 혹시 질문 있으십니까?”


최예린이 손을 든다.

“ ‘기무사 건물은 원칙상 보존 한다’라고 하셨는데, 어느 정도까지 보존해야 하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리고 제공된 도면을 보면 ‘지하보존시설’이라고 표기된 지하공간이 있는데, 여기는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요? 꼭 보존해야 하는 공간인가요?”

“저희가 생각하는 보존이라는 것은 전체 건물의 외형을 유지해 달라는 것입니다. 슬라브(건물의 바닥을 구성하는 판을 말한다), 벽, 기둥 등 구조에 핵심적인 부분이나 외관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내부 공간은 자유롭게 미술관 관련 프로그램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구조검토를 받아 본 결과, 주요 기둥, 보, 주요 슬라브를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들은 거의 다 철거가 가능하다는 의견을 받았습니다. 관련 자료도 배포할 예정이니 참고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지하보존시설’은 저희도 아직 논의 중인 부분인데요, 국방부 관계자 여러분과 협의 중인 부분이라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만, 이 부분도 활용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럼 ‘지하보존시설’ 이 부분을 일부 철거해서 미술관과 지하에서 연계한다던지 이런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시죠?”

“가능한 쪽으로 국방부와 협의 중인데요. 결정이 되면 정확히 공지 드리겠습니다.”

음.. 그렇게 된단 얘기지. 그럼 조금 더 과감한 계획이 가능할 것 같은데.. 정수현은 얼른 떠오르는 생각들을 수첩에 스케치해본다.


“미술관 입장은 그러신 것 같은데, 저희 입장은 다릅니다.”

갑자기 단상 구석에 앉아있던 군인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이 일어선다. 국방부 관계자인 것 같다.

“다른 부분은 리모델링이 될지 모르지만.. 지하 공간은 손을 대선 안됩니다. 보안과 관련된 사항입니다.”

“저번 회의 때 하신 말씀이랑 다른 것 같은데.. 저번엔 일부 정도는 손댈 수 있다고 하신 것 아닌가요?”

“그 때 회의에 나간 사람이 어떤 말을 했는진 모르지만.. 저희 입장은 확고하니 다시 한번 전달 드리겠습니다. 지하보존시설의 리모델링은 절대 불가합니다. 일부라도 손을 대시면 안됩니다.”


회의실이 웅성거린다. 주최자들끼리 의견 정리도 안하고 온건가.. 하라는거야 말라는 거야.. 설계자만 힘든 거지 뭐... 볼맨소리들이 들린다..


정수현은 혼자 생각했다.

‘정말 어쩌라는 거지? 대한민국 군인이란 놈들은 정말 꼴통이군. 내용물 다 옮기고 껍데기만 남은 시설인데, 보안이고 나발이고 그런 게 어디 있어?’


김과장이 황급히 수습한다.

“아.. 주최측에서 다소 의견 정리가 안 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참가자 여러분께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의견 정리가 되는 대로 다시 공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수현이 손을 든다.

“설계 기간이 석달 밖에 안되는데, 벌써 공고 후에 2주나 흘렀습니다. 이제 두달 반밖에 안남은 셈인데, 여기서 이런 것들이 정리가 안 되고 나중에 공지가 되면 그만큼 설계 기간이 줄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집니다. 이런 중요한 것들이 결정이 안 되면 설계자들은 그만큼 힘들어지는 겁니다.”

“아.. 죄송합니다. 빠른 시간 내에 결정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구석에 있는 군인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 뭔가 지하 공간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그 밖의 여러 질문들이 이어지지만 그다지 알맹이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그 내용들을 최예린이 부지런히 받아 적는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는데요. 이제 사이트(현장) 답사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모두 바깥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사이트는 거의 다 정리가 돼서 사실 휑한 분위기다. 조선시대 궁궐 부속 건물인 종친부와 기무사 건물이 거의 전부다. 군사시설이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 처럼 높은 담장과 철조망이 주변을 둘러치고 있다. 저것부터 헐어 놔야 분위기가 좀 바뀔 것 같다.


“주변은 이 정도면 될 것 같구요. 기무사 내부를 둘러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사실 기무사 내부도 고지식한 군사시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건물을 관통하는 기나긴 복도 옆으로 끝없이 방이 달려있는 구조다. 필요 없는 벽들을 다 털어내고 다시 활용할 방안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지상을 다 둘러보고 1층으로 내려왔다. 복도를 조금 둘러보니 도면에서 ‘지하보존시설’이라고 표기된 부분에 다다른다.

“여기서부터는 출입이 통제됩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두꺼워 보이는 철제문 앞에서부터 군인들이 통제한다. 뭐가 그리 대단한 게 있다고 이렇게까지 못 보게 하는 걸까. 도면에 표기된 벽체 라인만으로 추정해서 설계를 진행할 수 밖에 없다.


한 시간여에 걸친 대지 답사도 끝났다. 이걸로 현장설명회도 끝이다. 벌써 5시가 되어가니 사무실로 돌아가기도 애매해졌다.

“예린아, 수현아.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녁이라도 같이 먹고 가면 어때. 나도 사무실 들어가긴 좀 그렇고, 퇴근해야 할 것 같은데. 너희도 마찬가지 아냐?”

문재민이 저녁식사를 제안한다. 뭐, 오랜만에 봤으니 이 정도는 무리도 아니지.

“음.. 난 괜찮은데, 수현이는 어때? 바쁜가?”

최예린과 문재민 둘이 있게 하는 것보단 따라 나서는 게 낫겠지. 일단 따라 가기로 한다.


“아냐, 나도 별 일 없어. 난 여기 잘 모르는데. 재민이는 좀 아는 데 있나?”

“광화문이야 내가 꽉 잡고 있지. 단골집 몇 군데 있으니까 따라 와. 하하.”

그래, 여자들이랑 여기 저기 안다녀 본 데가 없겠지. 10년 만에 한국에 온 정수현은 서울이 아직 낯설다.

“그래, 그럼 재민이 믿고 한번 가 보자.”

오랜만에 동창 셋이 걸어가니 학생 때 분위기가 나는 것 같아 묘한 기분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킥오프 미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