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모임

건축소설 COMPETITION #07

by 글쓰는 건축가

문재민이 이끄는 대로 인근 이탈리아 요리집에서 저녁을 먹고 근처 와인바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정수현은 미국에 있는 내내 이런 여유를 가져 본 적이 없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고.. 식사는 항상 대충 하는 것, 커피 한 잔의 여유도 사치라고 느껴졌다. 그에 반해 문재민은 모든 행동에 여유가 있어 보였다. 집안이 그래서 그런지, 그런 방식의 삶을 살아와서 그런진 몰라도.. 정수현도 가끔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살아왔나 싶을 때가 있다.


“예린이는 학교 다닐 때도 인기 진짜 많았는데. 예쁜 거야 말할 것도 없고. 건축과, 아니 공대에서 최고였다고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았는데..”

“아우, 왜 이렇게 비행기 태우고 그래. 너도 인기 장난 아니었잖아. 너 좋다고 쫓아다닌 여자애들도 진짜 많았는데.”

능글 능글한 문재민은 옛날 얘기도 아무렇지도 않게 술술 꺼낸다. 하기야, 저 말들이 아주 거짓말도 아니다. 정말 두 사람은 인기가 많았다. 정수현은 자신이 인기가 많은지 어떤지 잘 알지도 못할 만큼 그냥 설계 외골수였다.


“그래. 니들은 결혼은 한거야? 어때? 난 아직 못했는데.. 이리 저리 바쁘다보니 하기가 힘들더라구.”

“아.. 나도 아직 못했어. 집에선 빨리 가라고 난리지. 이제 막내딸만 보내면 다 끝난다나..”

“하하. 예린이 정도면 맘만 먹으면 시집 가는 건 금방이지. 남자들 줄 서 있지 않나?”

정수현이 끼어들었다.

“나도 못했어. 미국에선 도저히 사람을 만날 여유가 없었고.. 여기 온지도 얼마 안 되다 보니까. 우리 엄마도 난리지. 빨리 결혼하라고..”

“난 뭐랄까. 주변 사람들한테 떠밀려서 결혼하긴 싫어. 결혼도 하고 싶어야 하는 거지. 내 인생 내가 결정해야 되지 않겠어. 회사에서도 이제 자리 잡고 있는데 더 빠짝 달려야지. 덕분에 지금 여자 친구도 없어. 하하. 예린이는 남자친구 있어?”

곤란해 보이는 질문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문재민도 참 남다른 친구이긴 하다. 정수현은 안 그래도 궁금한 걸 꾹 참고 있었는데 문재민이 조금은 고맙게도 느껴진다.


“아니.. 한 이년 사귀던 사람이랑 작년에 헤어졌어. 아무래도 일이 바쁘다보니.. 나랑 결혼할 생각을 하니 그 사람도 좀 까마득했나봐. 내가 일한다고 맨날 야근하고 주말에도 만나지도 못하고 그러니 계속 그렇게 살 것 같았나봐.”

“그 남자도 사람 볼 줄 모르네. 어디 가서 최예린 같은 사람 찾으려구.”

그랬구나. 어쩐지 전화통화도 잘 안하고 약속도 없고 주구장창 일만 하는 것 같기는 했다.


“난 성문에서 이제 한 칠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여기서 대표 디자이너로 자리 잡으려고. 내가 볼 때 나름대로 라인도 잘 타고 있고.. 우리 회사 대표가 H대 출신이거든. 그 밑에 사장들도 H대가 많고..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회라는 게 어쩔 수 없어. 학연이 진짜 큰 거 같아. 밀어주는 게 느껴지거든. 물론 능력도 능력이겠지만.”

“ 왜 너 정도면 대표 디자이너로도 손색이 없지. 이 현상에서도 실질적인 팀장이라면서. 팀장 한 건 이번이 처음이야?”

“그건 아니고, 작년이랑 올해 세 번 정도 당선시켰어. H시 청사 건물이랑 P시 지방법원. 그리고 체육관 하나. 이 정도면 꽤 굵직한 것들이라 내 위상이 좀 올라갔지. 하하. 이번에 미술관 당선시키면 그야말로 화룡정점을 찍는 거지.”

문재민의 무용담이 화려하다. 사실 정수현도 그동안 해왔던 것들을 열거하자면 밤을 새도 모자라지만 지금은 그다지 말하고 싶지도 않고, 참고 듣고 있기로 한다.


“교수님도 욕심은 있으시지만 당선까지 바라긴 참.. 지원한 사무실만 300팀이 넘는다며?”

“그 정도 될꺼야. 그 중에 삼분의 일? 반은 안 낼것 같은데. 제대로 하는 팀은 그것보다 적겠지.”

“넌 성문에서 현상 많이 해봤겠네.”

“나야 현상 전문이지. 지금까지 한 서른 개.. *턴키까지 하면 더 했겠다. 진짜 진절 머리나게 했어. 앞으로 더 할 것 같긴 하지만.. 하하. 이제 좀 다른 거 하면 좋겠는데. 결국 나보고 이 현상도 하라네. 너만큼 하는 놈이 없다나. 넌 미국에서 어땠어? OMA에서 잘 나갔으면 거기서 자리 잡았으면 되는거 아냐? 일본인 *파트너도 있다던데.. 너도 그렇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턴키: 시공사가 주축이 되어 건축, 기계, 전기, 토목 설계 회사 등과 컨소시엄을 이루어 진행하는 공사발주방식이자 경쟁입찰방식. 과도한 제출물, 시공사의 횡포 등으로 설계사무소에게는 악명 높은 설계 방식이다.


*사무실을 공동으로 운영하는 공동대표를 뜻한다.


“그 사람은 좀 예외적인 경우고.. 아무래도 동양 사람이 자리 잡기 힘든 구조니까. 서양 회사라는 게. 나도 나름대로는 정말 많이 치고 올라간 거긴 한데.. 한계가 좀 느껴져서. 그리고 딴거 보다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게 내 걸 해보고자 하는 거니까. 결국 돌아와야 겠다고 생각했어.”


“에이, 한국에서 혼자서 하기 힘들지.. 아틀리에 하시는 분들 다들 먹고 살기 힘든데. 대학교 때 날고 기던 선배들 다들 고생하고 있던데.. 난 설계 할거면 큰 조직에서 하는 게 맞다고 봐. 지금 회사에도 정말 만족하고 있고. 물론 다들 지향점이 다르긴 하겠지만, 먹고 살기도 힘든 상태에서 예술가도 아니고, 자기 건축을 한다? 그거보다 모순적인 상황이 있을까? 물론 몇몇 유명 건축가들은 잘 되고 있지만, 그런 사람들은 정말 소수니까. ”


듣고 있던 최예린이 한마디 한다.

“재민아, 그건 그렇게 쉽게 말할 건 아닌 거 같아. 그럼 그 많은 설계하는 사람들이 헛발질하고 있다는 거잖아.”


“물론 헛발질이라는 건 아니지만, 너무 자기 만족에 빠진 예술가 집단 같아서 그러는 거지. 무슨 망방이 깎는 노인들도 아니고, 쥐꼬리 만한 설계비 받으면서 골방에서 시공이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디테일 도면 그리고 있는 게 맞는 건가?”


*디테일 도면: 재료와 재료가 만나는 부분 등을 설명한 상세 세부도면을 뜻하는 말이다.


이야기가 점점 격해지는 느낌이 든다. 문재민, 이 녀석도 자기 세계가 명확한 놈이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다지 귀담아 듣는 스타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물론 여자 말은 잘 들었지만. 정수현이 정리해보려고 한다.


“각자 관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거라고 해두자. 말하자면 끝이 없으니까. 하지만 건축가들이 예술가적 성향이 있는 건 확실하지. 많고 적음이 있긴 하지만.. 그게 하나도 없으면 그야말로 사업가, *집장사가 되어버리니까. 각자 건축하는 방식을 존중하긴 해야지. 너나, 나나 예린이나 설계하는 방식도 건축을 대하는 태도도 다를 수 밖에 없잖아.”


*집장사: 시장 상황에 맞춰 부동산 개발업자의 입장에서 비교적 성의 없이 설계하고 시공하는 업체들을 비하하는 뜻으로 흔히 쓰이는 말이다.


“음.. 뭐 나도 대형 설계사에 오래 있다 보니 다른 사무실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긴 하지. 하지만 최소한 이해가 잘 되는 방식이 아닌 건 분명한 거 같아.”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고 자정이 좀 넘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간다. 최예린은 정수현과 같은 방향이라 몇 마디를 더 하면서 거리를 걷게 되었다.

“재민이 쟤 말도 아주 틀린 건 아니지만.. 뭐랄까 우리도 점점 순수함을 잃어가는 것 같아. 세월이 갈수록.. 예전엔 설계를 하고 프로젝트를 하는 게 그냥 순수하게 좋았는데.. 점점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해야 하고 결혼 같은 얘기도 나오고.. 서글퍼지네.”

“재민이 말을 듣고 욱하긴 하는데.. 마음 한구석에 저 녀석 말이 맞는 건 아닐까 생각하니까. 내가 건축을 하려는 방식이 맞는 건가 싶기도 하고.. ”

“천하의 정수현이 흔들리면 어떡해. H대에서 설계 제일 잘 하는 사람인데. 니가 건축가 안하면 동기 중에 누가 건축가 하겠어?”

“하하.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나..”

“세상 설계 혼자 다하는 것 처럼 했었잖아. 노는 꼴을 못봤네. 축제고 MT고 온 적이 없잖아. 너 처럼 독한 놈은 처음 봤어.”

“다들 마찬가지 아니었나..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살았나 싶어. 좀 놀면서 살기도 했어야 하는데..”

“그래, 지난 세월 돌이킬 순 없겠지.. 그리고 지금도 늦지 않았어. 넌 조금 여유를 가지고 살아도 돼. 그만한 자격이 되니까. 택시 오네, 잘 가. 주말 잘 쉬고 월요일에 보자.”

최예린을 보내고 정수현이 떠나가는 택시를 물끄러미 쳐다 본다. 넌 조금 여유를 가지고 살아도 된다.. 문재민을 보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여유 속에서 오히려 더 나은 아이디어가 나올 지도 모를 일이다.


정수현은 조심스럽게 집의 현관문을 열었다. 벌써 새벽 1시가 넘었다.

“수현아, 이제 오니? 지금 몇 시지?”

“어머니, 안주무셨어요? 벌써 한 시네요. 얼른 주무세요.”

“그래, 뭐 과일이라도 좀 줘야하나..”

여느 어머니들이 그렇듯 정수현의 어머니도 주섬 주섬 일어나 뭔가 챙겨주시려고 한다.


어머니가 정수현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수현아, 성당에서 아시는 분이 참한 여자분 있다고 너 만나볼 생각 없냐고 하시던데.. 생각 없니?”

“엄마, 저 그런 식으로 사람 안보겠다고 몇 번 말씀 드렸잖아요, 에휴.”

“사람 참 괜찮다고 하던데.. 웬만하면 한 번 보지 그러니.”

정수현은 어머니와 벌써 이런 실랑이를 몇 번째 하는지 모르겠다. 지치기도 하고, 그냥 못이기는 척 한번 나가봐야 하나 싶기도 하다.

“아, 그래. 지금 나가는 회사에 예린이 있다며. 예린이는 결혼했대? 얼굴 본 게 벌써 몇 년 전이야. 우리 집에도 몇 번 왔었잖아.”

“엄마도 참.. 아직 안했대요.”

“그래? 잘됐네. 수현아, 잘 좀 해봐. 예린이 진짜 예뻤는데.”

“마감 얼마 안 남아서 정신이 없네요. 그리고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런 사이가 따로 있나. 정 붙이면 되는 거지.”

“하아.. 늦었는데 그만 주무세요. 저도 내일 나가야 하고.. 안녕히 주무세요 어머니.”

정수현은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한다. 대한민국 처녀 총각 어머니들은 다들 저러시는지.. 언제까지 이렇게 시달려야 할지 까마득해진다.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나가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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