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소설 COMPETITION #08
오늘은 심사위원 및 운영자 회의가 있는 날이다. 홍준성 건축가는 몇 년 전부터 이런 현상설계 심사가 썩 내키지 않는다. 발주처 입맛에 맞춘 안을 미리 다 정해 놓고 건축가들을 심사위원이랍시고 위촉해서 들러리 세우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이라고 하면 가히 국가대표라고 할 만한 프로젝트다. 이런 대형 프로젝트의 심사를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팽개치는 것 또한 건축가의 책무는 아닐 것이다. 이번에도 뭔가 꿍꿍이를 써서 판을 흔들려고 한다면 크게 한번 들고 일어나야 겠다, 나름대로 큰 각오 내지는 결심을 하고 심사위원장 직을 수락한 그였다.
홍준성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미술관 관계자들과 다른 심사위원 건축가들이 다 같이 일어선다. 국내 건축계에서 홍준성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당연한 반응이다.
“홍선생님, 오셨습니까. 어서 이리로 앉으시지요.”
“음, 관장님. 안녕하세요. 저번에 뵙고 한 달 만인가요? 잘 지내시죠?”
의례적인 인사와 환담이 오가고 회의가 시작된다. 전체적인 일정과 심사 기준 확정 등이 주요 안건이다. 사실 저번 회의에서 크게 가닥이 잡혔기 때문에 오늘은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성격의 자리다.
“지난 현장설명회 때 이슈가 되었던 사항인데.. 기무사 지하의 ‘지하보존시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의 문제인데요. 참가자들은 다소간이라도 철거하고 리모델링 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그런데, 여기에도 계시지만.. 국방부 여러분들이 워낙 강경하게 말씀하셔서요.”
국방부 참가자들이 정색하며 말한다.
“저희 입장은 변화 없습니다. 지하보존시설은 절대로 훼손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이미 내부 문서나 중요한 것들은 이전처리가 완료된 것 아닌가요? 대체 뭘 보존해야 한다는 겁니까?”
“보안사항입니다. 일반인들에게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또 다시 결론 없는 갑론을박이 이어진다. 국방부 사람들은 계속 보안시설이다, 이유는 알려드릴 수 없다, 철거와 리모델링은 절대로 안된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다.
‘저런 철밥통 꼴통들.. 아무튼 협의라는 게 안되는 놈들이군.’
홍준성은 결국 자신이 정리해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심사위원장으로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알기로 국방부는 현재 기무사 건물에 대한 소유권 내지는 관리감독 권한을 완전히 미술관 측에 넘기셨고, 이 회의에는 온전히 자문 내지는 참관 목적으로 참석한 것으로 아는데 맞습니까?”
“.. 맞습니다.”
“그럼 심사과정에서 아무런 권한이 없다는 것도 아시지요? 의견을 제시하시는 것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물론 알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막무가내로 자기 의견만 내세우시면 곤란합니다. 물론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이라면 보존해야 마땅하겠지만, 건축가에게 아무런 여지도, 자유도 주어지지 않는다면 설계 자체가 안됩니다. 지상층은 어느 정도 철거와 리모델링이 허용되는데 지하는 아예 건드리지도 말라니, 이건 형평성에도 맞지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습니다. 아니면 무엇 때문에 지하를 보존해야 하는 건지 합리적인 이유를 대십시오. 납득이 된다면 수용하겠습니다. 아무 말씀도 안해주시고 무조건 수용하라고 하시니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하지만 군사보안시설은 특수성이라는 게 있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국방부 의견이라는 조건을 달고 계획안에 지하보존시설에 대한 변경사항이 있을 경우 100점 만점의 설계평가점수에서 3점을 감점하겠습니다. 이 정도 현상에서 3점이라고 하면 대단히 큰 점수입니다. 이 정도 손해를 감수할 정도라면 계획안에 대해서 그만한 확신이 있어야 할 겁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지하보존시설은 도저히.. 저희 입장에서는..”
“이 정도 중재안을 못 받아들이시겠다면 저로서도 방법이 없습니다. 문화체육부 장관님이나
청와대에 연락을 드려보는 수 밖에..“
홍준성은 여기서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방을 찍어 눌러놔야 겠다고 느꼈다. 국방부 사람들이 워낙에 막무가내인데다가, 앞으로 자신의 의도대로 심사과정을 진행해가려면 자신의 영향력을 확실하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국방부 참석자는 마지 못해 대답했다.
“으.. 음. 알겠습니다. 심사위원장님의 제안을 수용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이 과장님, 지금 논의된 사항 잘 들으셨지요? 질의응답 회신에 정확히 전달해주세요.”
“예, 알겠습니다. 심사위원장님.”
몇 가지 이슈를 논의하고 회의는 끝났다. 그다지 긴 회의가 아니었지만 홍준성은 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군인 같은 보수적인 집단과의 대화는 사실 그의 체질에 그다지 맞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하는 수 밖에.
미술관 관장이 홍준성을 달랜다.
“홍 선생님, 고생하셨습니다. 나가서 차라도 한 잔 하시지요.”
“예, 관장님. 저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사업 추진해 가시려면 보통 일이 아니셨겠습니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그 동안 겪은 일들을 얘기하자면 밤 새도 모자랄 겁니다. 하하.”
홍준성은 앞으로의 심사과정도 꽤나 고단하지 않을까란 나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일단 오늘은 이 정도의 작은 성과를 냈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