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미팅

건축소설 COMPETITION #09

by 글쓰는 건축가

오늘은 첫 번째 디자인 미팅이 있는 날이다. 그 동안 각자가 준비해 온 디자인 대안들을 내놓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자리다. 우선은 정수현과 최예린, 김종민이 대안을 내놓기로 했다. 아마 교수님과 강소장의 의견을 듣고 몇 차례의 회의를 거쳐 대안을 결정한 후 제출을 위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정수현은 회의 전날 밤을 새버렸다. OMA에서 항상 해오던 패턴이 익숙해진데다, 한국에서 처음 현상을 하는 것이다 보니 기합이 너무 들어간 것도 있다. 김종민도 같이 작업을 하다 막차 시간에 맞춰 퇴근했다. 최예린은 숫제 칼퇴근을 했다. 최예린은 예전부터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말자는 주의였다. 아무리 현상설계라지만 첫 미팅부터 야근이나 철야까지 할 이유가 있냐는 거다.

“ 정수현 어제 밤샌거야? 벌써부터 그렇게 할 필요 없는데.. 적당히 해~”

최예린이 회의실로 들어선다. 손에는 모형이 들려있다. 개념모형이라 심플해 보이지만 스티로폼을 깨끗하게 잘라 매우 깔끔하다. 간단한 모형이지만 재료를 다루는 최예린의 센스를 느낄 수 있다.

“적당히 한거야.”

“킥킥. 넌 아직도 모형을 이 정도 밖에 못 만드는 거야? 여전하구나.”

“으.. 새벽에 급하게 만들어서 그렇지. 그리고 내가 못 만드는게 아니라 니가 너무 잘 만드는거야.”

정수현은 컴퓨터를 다루는 능력에 비해서 모형을 만드는 것이 서투르다. 잘 만든 최예린의 모형과 비교하면 그것이 더욱 부각되어 보인다. 자른 면이 거칠고 여기 저기 들고 일어났다. 스티로폴(모형재료) 면도 수직이 아니다. 새벽에 비몽사몽 만들다보니 더욱 그런 것도 맞다.


박진호 교수가 회의실로 들어선다.

“다들 모였네. 열심히들 했나봐. 하하. 나도 아이디어 하나 정도는 생각해오긴 했는데.. 다들 너무 열심히 해서 코멘트 정도만 해주면 되지 않을까 싶네. 아무튼 각자 해온 걸 보자구.”


김종민이 변경사항을 브리핑한다.

“지하보존시설에 대해서 새 지침이 나왔는데요.. 그게 참..”

“왜, 어떻게 됐는데?”

“국방부 의견이라고 해서 거길 건드리면 설계점수에서 3점이나 감점하겠대요.”

“뭐? 3점이나? 백점만점 아냐?”

“그러니까요. 그냥 하지 말라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정수현은 지하에서 남측 광장과 연결되는 안을 구상했다. 새 지침에 대해서는 사전에 알고 있었고, 안을 바꿔야 되나 생각이 많은 상태였다.

“음.. 그만한 패널티를 감수하고서라도 할려면 해라.. 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식의 지침은 처음 보는데.. 다들 고민이 많을 것 같네.”

“고민할 게 뭐 있어요. 하지 말라는 거 같은데요.”

현상설계에 잔뼈가 굵은 강소장은 볼 것도 없다는 눈치다. 정수현은 내심 감점을 감수하고서라도 한 번 해볼만 한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다들 해온 걸 보고 생각해봐야지. 한번 보자구.”


먼저 정수현이 준비해 온 대안을 발표한다.

“전 약간은 대담하게 생각해 봤는데요. 우선 대지 전체의 판을 들어올리고 주변 흐름을 끌어들이려고 했어요. 어차피 지하를 쓸 수 밖에 없으니까. 지하를 파고 그걸 큰 지붕으로 덮는 개념이에요. 그리고 큰 *보이드.. 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여기에 사람들이 모여들기도 하고, 미술작품을 내려다 볼 수도 있는 거죠. 이 보이드 공간 가운데에 하이라이트가 되는 전시공간.. 화이트 큐브를 뒀어요.”


*보이드: 건축에서 비워진 공간을 뜻하는 말이다.


정수현이 준비해 온 3D 모델링과 몇 개의 CG를 빔 프로젝터에 띄우자 주변에서 감탄사가 터져나온다. 거의 마감 제출물에서나 볼 듯한, CG회사에 맡겨서 한 듯한 수준의 퀄리티다. 언듯 보기에 더 잘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야.. 수현이는 뭐 마감을 다해버렸네. 이제 첫 번째 미팅인데.. 물론 *평면이랑 세부적인 건 계속 다듬어야 겠지만.. 개념도 좋고 *랜드스케이프 적인 접근이랑 선언적인 공간개념이 잘 보여. 그건 그렇고 이걸 혼자서 다 한거야? 하기야 혼자 할 수 밖에 없겠지만..”


*평면도: 각 층의 방 구성을 보여주는 도면. 건축설계의 기본이 된다.

*랜드스케이프: 조경을 뜻하는 단어. 여기서는 경사로 등을 활용하여 건축물과 주변 대지와의 경계를 흐리는 건축적인 시도를 뜻하고 있다.


“개념이 딱 두드러지게 보이는 게 좋네요. 안이 여러 개 깔려있는 가운데서 팍 튀어보이긴 할 거 같은데요.”

“아까 지하보존시설 얘기가 나왔는데, 전 이 보이드가 지하로 연결되는 것으로 생각했거든요. 감점까진 못 보고 진행한 건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아, 자세히 보니까 그러네. 당연히 개념상으론 지하가 연결되는 게 좋은데, 감점이 너무 커서.. 아무튼 차차 생각해보자.”


다음은 최예린의 차례다.

“다른 프로젝트들 해야 할 게 많아서 아주 많이 하지는 못했는데요.. 저는 약간 마을 형상? 의 미술관을 생각해봤어요. 프로그램이 워낙 많고 크니까 한 동으로 수용하기는 무리고, 여러 동으로 나눌 수 밖에 없는데요. 그것들을 대지 안에 흐트러트리고 그 사이에 여러 개의 마당이랑 골목길을 내구요. 그것들이 산책로가 되기도 하고 전시공간이 되기도 하는 거에요. 이 마당들이 다양한 미술관의 프로그램을 수용하기도 하고, 주변 도시조직을 끌어들이는 버퍼(완충) 역할을 하기도 해요.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한 군데가 아니고 사방으로 여러 군데 퍼져 있어서 관람객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싶어요.”


정수현은 최예린의 설명을 듣는 순간 최예린 다운 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섬세하고 차분한 접근, 무리하지 않으면서도 개념이 살아있는 안이다. 개념을 살리기 위해서 다소 과격한 제안을 하는 정수현과는 조금 다르다. 그에 따라 다소 문안해보이고 힘이 약해보이는 단점은 있다.

“예린이 안도 괜찮네. 도시적인 측면에서.. 주변과 어울린다는 측면에서 이게 더 먹힐 것 같긴 한데. 도시 조직 안에 녹아드는 느낌이 좋은데. *메스랑 동선 같은 것만 조금 다듬으면 될 것 같은데.


*메스(MASS):건축물의 덩어리를 뜻하는 말. 초기에 스티로폼 등으로 박스를 만들며 메스 감을 체크하는 것으로 설계가 시작된다.


“지하에서 연결하는 건 일단 생각 안했어요. 어차피 사실상의 GL(그라운드 레벨. 건물과 대지가 맞닿는 기준 레벨을 뜻함)이 지하에서 형성될 수 밖 에 없으니까. 수현이 게 지붕을 씌운 것이라면 전 안 씌운 거에요. 길을 연장시킨다면 지하에서 남쪽 광장이랑 연결시킬 수도 있겠네요.”


마지막으로 김종민의 차례다.

“전 기무사의 메스가 상당히 인상적이었어요. 물론 단순하긴 하지만.. 길쭉한 장방형 형상이잖아요. 전 그와 비슷한 장방형 메스들을 대지 안에 여기 저기 흩뿌려놓는 안을 생각해봤어요. 이 길쭉한 메스에 각자 다른 프로그램들과 다른 재료들을 부여하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기무사의 형제들이 되는 거죠. 그리고 길쭉한 메스 사이 사이의 공간들에서 다양한 활동들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했구요. 장방형 메스들은 지하에서 적극적으로 연결되도록 했어요.”

정수현은 김종민의 안을 보고 아이디어는 신선하지만 아직 좀 덜 다듬어진 느낌을 받았다. 그다지 강한 설득력이나 당위성 없이 그냥 이러면 재밌지 않을까요? 라고 던지는 느낌? 아무래도 경험이 적은 것이 느껴지긴 한다.

“종민이 안도 괜찮긴 한데.. 뭐랄까. 왜 이렇게 했냐 라고 했을때.. 설득력이 좀 약한 건 사실인 것 같아. 이정도 규모의 건물에서 이러면 재밌지 않을까요?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건 좀 위험하지. 심사위원들도 보통 사람들이 아닌데. 물론 접근이 재밌기는 해. 다른 안들과 같이 있으면 달라 보일 것 같긴 하다. 뭔가 도시에 대한 분석이나 미술관에 대한 분석 내용 같은 것이 덧붙여지면 좋긴 하겠네. 그런 것들을 좀 더 스터디 해보자.”


박 교수는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서 각자의 안을 발전시킬 방향을 제시했다. 아직 첫 번째 미팅이니 가능성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 각자 안을 좀 더 발전시켜서 다음 회의 때 보기로 했다.

“이제 한 삼주? 정도 진행해 보고 안을 하나로 정해야 할 것 같다. 그새 시간이 많이 흘러서.. 마감 작업에 한 달 보면 그 정도 시간이 남은 것 같네. 모두 고생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특히 수현이는 많이 피곤해보이네. 얼른 들어가 쉬어”


정수현은 물론 자신의 안이 가장 좋아 보이지만 다른 사람의 안들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특히 최예린의 안은 자기가 생각해도 꽤나 좋아 보인다. 정수현은 다음 회의 준비를 좀 더 철저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진다.



문재민의 성문종합건축사사무소 팀도 본격적인 설계 작업에 들어갔다. 오늘은 회사 전체 임원들이 모여 설계 방향을 결정하는 디자인 리뷰가 열리고 있다.


문재민이 발표를 마치자 회의장에서 박수가 쏟아진다.

“역시 문팀장이 다르네. 안이 아주 좋아. 한 달 넘게 남았는데 벌써 다한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심사위원장 성향에도 잘 맞을 것 같고.”

“감사합니다, 대표님. 저희도 물론 심사위원 성향 분석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홍준성 선생님이 중요하니까요.”

“물론 그렇지. 남은 기간 수고해줘. 이거, 올해 미술관 당선되면 회사 매출은 걱정 안해도 될 것 같은데. 하하.”

문재민은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대로 당선만 된다면 성문에서 자신의 입지는 탄탄대로일 것이다.


“문팀장, 그런데 지하보존시설은 어떻게 처리하지? 국방부 의견이 나왔다던데.”

회사 전체의 운영을 총괄하고 있는 김종국 사장이 묻는다.

“예. 건드리면 감점이 크긴 한데요. 지하보존시설과 미술관을 연계하면 계획이 좋아질 것 같긴 해서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이, 안돼 안돼. 이런 현상에서 그렇게 안일하게 접근하면 안 된다구. 지하는 절대 건드리지 마. 이런 건 안 건드리는게 맞는 거야.”

“하지만 만약에 지하를 잘만 계획하면 이점이 꽤 많아서..”


김사장이 갑자기 정색을 하고 말한다.

“문팀장, 이건 개인이 하는 공모전이 아니고 회사의 자금이 들어가는 일이야. 이 현상에 투입된 인원이 몇 명인줄 알지? 이 인원 2달 돌리려면 회사 지출이 장난 아니야. 떨어지면 그 돈 다 날리는 거라고. 알고 있잖아? 이런 현상은 최대한 보수적으로, 안전하게 접근해야 해. 지하 안건드릴거지? 여기서 확답을 하게, 확실하게.”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할 필요가 있는 사안인가? 문재민은 의아함을 느꼈다.

“...예, 일단 알겠습니다.”

듣고 있던 이남우 대표이사가 나선다.

“김사장, 왜 그래. 문팀장이 잘 하고 있는데. 너무 다그치지 말라구. 문팀장. 김사장 의견이 저러니 웬만하면 반영하도록 하지.”

“예, 대표님.”

김사장이 말을 이어간다.

“제가 사실 주최측으로부터 따로 들은 게 있어서요. 그 쪽 의견이 지침이야 이렇게 나왔지만 사실상 지하는 건드리면 안 되는 분위기랍니다. 사실 이 지침을 읽고서 건드릴 회사가 거의 없겠지만...”

문재민은 지하보존공간의 처리에 대해서 약간은 고민하고 있었는데, 임원들의 말을 듣고 지하를 활용하는 안은 깨끗이 포기하기로 했다. 이런 대형 조직에서 임원들의 의견을 거스르는 안을 내세울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해도 저 정도의 강경한 반응은 의외였다. 도대체 지하보존시설에 뭐가 있길래 저렇게까지 말리는 걸까.


박교수의 사무실에서도 중간 회의가 끝났다. 정수현과 최예린의 안을 두고 다음 회의에서 최종 대안을 결정하기로 했다.

“둘 다 안이 좋고 장단점이 뚜렷해서 나 혼자 결정하기보다는 사무실 직원들 전체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고 싶어. 다음 회의 때 준비 잘 해서 보자구.”


회의 후에 정수현과 최예린, 김종민 셋이 모여 간략한 회식을 하기로 했다. 그동안 작업해오면서 지친 것도 있고, 서로 꽤나 친해졌기 때문에 저녁 한 번 먹자고 약속을 했었다.


자신의 안이 탈락된 김종민은 다소 실망한 눈치다.

“역시 제 대안은 끝까지 가진 못하네요. 저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너무 실망하지 마, 종민아. 니 *연차에 그 정도면 진짜 잘하는 거야. 니 안도 진짜 괜찮았는데.”

“그래, 미국에서도 너 정도 하는 사람 잘 못봤어. 솔직히 너무 잘해서 놀랐네.”

“전 형한테 진짜 놀랐어요. OMA에서는 다들 그 정도 하는 건가요? 형 혼자 거의 업체 수준의 일을 하던데..”

“거긴 좀 전투적으로 하긴 하지. 요구하는 수준도 워낙 높고..”

“어, 엄마 전화다. 잠깐만.”

최예린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


* 연차: 동종 업계에서 일한 년수. 경력을 뜻하는 말


“형, 진짜 궁금해서 묻는건데, 최 차장님이랑 무슨 사이에요?”

“에? 사이는 무슨 사이. 그냥 학교 친구지.”

“에이, 왜 그래요. 저도 눈치라는 게 있는데. 옛날에 형이 최 차장님 좋아하거나 그랬던 거 아니에요?”

“얘가 왜 이래. 나 최예린 안 좋아했어.”

“하하. 이런 질문에 솔직한 답을 기대하는 게 이상하지. 아무튼, 형 잘해봐요. 최 차장님 같은 사람 거의 없으니까. 사실 최 차장님 진짜 좋은 분이거든요. 신경도 잘 써주시고.”

“음. 예린이가 주변 잘 챙기는 거야 내가 잘 알지..”

정수현은 말을 얼버무렸다.


“근데, 기무사 지하는 다들 어떡할 거 같아요? 형도 연결하는 안을 계속 밀고 있기는 한데, 감점이 너무 크잖아요.”

“맞아. 나도 계속 고민이야. 연결하지 않는 안도 하나 그려보고 있는데, 아무래도 파워가 확 떨어지더라구. 마음에도 안 들고. 다들 어떻게 할런지..”

“교수님도 계속 고민이신 것 같던데요. 다음 회의 때 말씀하실 것 같아요.”


이 녀석이 신경 쓸 정도면 최예린이랑 내가 보통 사이가 아닌 것 같이 보이긴 하나보다, 라고 정수현은 생각했다. 하기야 쌓여온 세월이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사실 미국에 가 있는 10년 동안 정수현은 힘들 때 마다 최예린을 생각했다. 이메일이나 온라인 채팅으로 연락해보고 싶었지만 항상 보내기 직전에 그만두곤 했다. 남자친구가 있진 않을까, 괜히 연락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들 때문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최예린이 말했다.

“많이 늦었네. 그만 들어가자. 주말 잘 쉬고. 이제 다음 주말부터는 사무실 나와야 할 것 같으니까. 마지막 휴일 푹 쉬어 둬. 이제부터 쭉 달려야 할 테니까 말야.”


최종대안이 누구의 것이 되든 경쟁력은 충분하겠지만 정수현은 자신의 대안이 선정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0년 미국생활의 공로를 이런 방식으로라도 보상받고 싶다고 해야 하나. 정수현은 택시 안에서 피곤한 눈을 붙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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