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 결정

건축소설 COMPETITION #10

by 글쓰는 건축가

오늘은 대안 결정을 하는 회의가 있는 날이다. 박교수 사무실 직원 전원이 회의에 참석하기로 했다. 다음 주부터 반드시 필요한 다른 프로젝트의 인원을 제외하고 현상설계에 참여하기로 되어있다. 지금도 직원 2명이 더 붙어서 정수현과 최예린의 작업을 도와주고 있다.


“이제 다 모였나. 다들 알겠지만 3주? 좀 더 남았는데 암튼 조금 있으면 미술관 현상설계 제출을 해야 해서 오늘은 대안 결정을 위해서 모인 거고. 수현이 안이랑 예린이 안이 있으니까 다들 신중히 보고 뭐가 좋은지 자기 의견을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 우선 수현이부터 발표해볼까.”


정수현이 준비해 온 모형을 대지모형 위에 얹는다.


“제가 준비해 온 안입니다. ‘Urban Canvas(도시의 캔버스)'라는 제목을 붙여 봤습니다. 지금의 도시, 특히 서울의 중심지는 너무나 복잡한, 여백이 부족한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주변 도시의 맥락을 존중하고 이어가는 제스쳐도 필요하겠지만, 저는 여기에 좀 더 선언적이고 상징적인 ’여백‘, ’비움‘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대지를 덮는 판은 멀리 인왕산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로서의 플랫폼이자 시민들이 모여드는 마당, 장소로서의 플랫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래의 다양한 미술관 프로그램들을 하나로 엮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중앙의 보이드는 상징적인 전시장, white cube를 담는 장소로서 미술관의 하이라이트가 될 것입니다. 이 보이드 공간은 외부 미술작품을 담는 거대한 전시공간입니다. 또한 지하를 관통하는 관람 축을 통해 기무사, 남측 광장을 잇는 거대한 관람축이 형성됩니다.“


결국 기무사 지하를 연결하는 안을 택한 정수현이다. 최예린은 정수현 다운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완성도 면에서는 더할 나위가 없네. 내가 몇 가지 코멘트 했던 것들도 빠짐없이 반영됐고. 고생 많았어. 다음, 예린이 것도 보자.”


최예린이 발표를 시작한다.

“제가 진행한 안의 제목은 ‘Museum Village(미술관 마을)'입니다. 말 그대로 마을이 되는 미술관이라고 할까요.

미술관이 더 이상 시민의 삶과 동떨어진, 그들만의 장소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친숙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마을 같은 미술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북촌이라는 도시 조직은 이러한 컨셉을 펼치기에 더 없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전형적인 한국의 도심지를 보여주고 있으니까요. 주변 가로에서 뻗어오는 길의 형상을 대지 안으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확장, 흡수 시켰구요. 그 사이 사이에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배치시키되 면적이 모자라면 2층으로 올리는 방법을 취했습니다. ‘


이 길들, ‘Exhibition Alley (전시 골목)' 라고 이름붙인 길들인데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동선이 되기도 하고 전시공간이 되기도 하며, 각종 이벤트가 벌어지는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마치 인사동 길과 같은 분위기가 나기를 바랐습니다. 인사동도 길을 지나가며 각종 화랑에 들어가서 전시를 보기도 하고, 각종 공연과 행사를 관람하기도 하잖아요. 조용하고 사색적인, 소위 ’고품격‘의 미술관보다는 바쁜 삶 속에서 가끔 쉬어가다 만날 수 있는 미술관.. 그런 것을 바랬습니다.“


사무실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과연, 거창한 이론이 아니고 감성과 경험에 와 닿는 피티를 하니 강한 설득력이 있다.


“ 예린이 안도 훨씬 좋아졌네. 무엇보다 예린이 안은 주변 도시 조직과 자연스럽게 엮인다는 게 최고 장점인 것 같아. 상대적으로 수현이 것은 선언적인 느낌이 강해서 뭔가 심사위원들에게 한 눈에 어필할 것 같은 게 장점이고.”


각자 안의 장단점이 뚜렷하다 보니 하나의 안으로 결정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 여러 사람의 격론이 오간다.

“수현이 안이 낫지 않겠어요. 우선 심사위원들 눈에 확 들어와야 되니까. 논리나 이야기 이런 것들은 차차 만들어간다 치구요.”

“내가 볼 때는 예린이 것이 심사위원 성향에 더 맞아. 나 혼자 독고 다이 하는 것보다 뭔가 도시 얘기를 하는 게 먹히지 않을까.”

“다른 사무실들도 다들 예린이 거 비슷하게 하지 않을까요. 제일 하기 쉬운 생각이잖아요.”

“그걸 누가 더 세련되게 잘 다듬고 표현하느냐가 문제지. 원래 설계는 당연한 걸 잘 표현해내는 게 어려운 거야.”

“이런 현상에선 아무리 그래도 아이디어가 잘 보이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수현이 것이 아이디어가 선명해 보이는데..”

30분을 넘어 한 시간 가까이 회의를 해도 하나의 의견으로 좁혀지질 않는다. 강소장을 비롯한 몇 명은 정수현의 대안을, 박차장을 비롯한 몇 명은 최예린의 대안을 지지하는 분위기다. 박교수는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다.


“이래서는 도저히 결론이 나질 않겠는데. 시간상 오늘 대안결정은 꼭 해야 될 것 같고. 할 수 없지. 투표로 결정하기로 하자.”

이런 회의의 결론을 다수결로 하는 것은 그다지 현명하지 않은 것 같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 김종민이 일어서서 한명 한명의 의견을 듣고 화이트 보드에 표시 한다.


“박 차장님이 최차장님 안, 강소장님이 수현이 형 안이고.. 제가 수현이 형 안이고.. 음.. 교수님. 6대 6인데요. 교수님 한 표만 남았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결과론적으로 박 교수가 대안을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오고 말았다. 박 교수는 말 없이 한참 동안 두 개의 대안을 바라보았다.


“음.. 난 개인적으로 난 이 현상을 ‘반드시 당선되어야 한다!’라는 마인드로 하고 있지 않아. 물론 되면 좋겠지. 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도시에 어울리는 미술관, 시민에게 다가가는 미술관, 궁극적으로 시대와 장소에 어울리는 미술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것이 내가 건축을 하는 목적이기도 하고. 내 작품을 만들기 위한 건축보다 공공과 사회를 위한 건축.. 그게 더 옳은 방향이 아닐까 생각을 해. 요새 더 그런 생각이 강해졌고. 난.. 물론 당선이 되면 더 좋겠지만, 그런 제안을 할 수 있다면 현상에 참여하는 의미는 충분하다고 봐.


수현이 대안은 충분히 매력적이야. 심사위원들 눈에도 확 들어올 거고. 공간적으로도 풍부하고.. 하지만 과연 이 대지에 완전히 어울리는가? 시민들에게 먼저 다가가는 안인가? 라고 하면 조금은 퀘스쳔마크가 붙는 게 사실이야. 뭔가 내가 이렇게 멋지고 좋은 공간을 만들어놨으니 너희들은 찾아와야 한다..는 식의 다소 거만한? 느낌이 있어. 예린이 안은 확실히 좀 더 겸손하고 대중 친화적인 안이라고 생각해.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안이고, 주변 도시 조직에 순응하는 안이고..


사무실 여러분의 의견도 충분히 존중해. 수현이 안이 당선 가능성.. 아니 일단 예선에서 뽑힐 가능성이 좀 더 높을 수도 있겠지. 아이디어가 분명하게 보이니까. 하지만 난 단순히 당선가능성보다 ‘어떤 안이 이 땅에 좀 더 어울리는지, 시민들, 사용자들에게 환영받을지’를 먼저 보고 싶어. 뭔가.. 좀 더 ‘옳은’ 대안이라고 해야 하나. 미련한 접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래서 내가 미련한 경영자인지도 몰라. 하하.“


“그래서 교수님 의견은..”

“그래 난 예린이 안이 좋은 것 같다. 예린이 안을 최종 대안으로 해서 진행하도록 하자. 다들 내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지 못할 수도 있어. 특히 수현이는 정말 고생했는데.. 미안하다.”

강소장이 의견을 보탠다.

“음.. 교수님 말씀을 들으니까.. 동의가 되는 측면이 있네요. 당선이 되면 정말 좋겠지만.. 좀 더 이 땅에 맞고, 사용자에게 맞는 대안이라.. 사실 저희 사무실이 해왔던 설계들도 그런 것들이었으니까요.”


다른 직원들도 찬성의 의견을 보탠다.

“저희들도 교수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좋아. 내일부터 다들 마감 작업 같이 도와주고. 한 삼주만 빡세게 한번 해 보자구. 오늘은 저녁 회식 간단하게 합시다. 다들 좋지?”


정수현은 겉으로 티는 못 내지만 망치로 머리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내 안보다 최예린 안이 좋다구? 지금 그런 결정이 내려진 건가? 그럼 내가 이제부터 최예린 *시다가 되어야 하는 건가? 내가 미국에서 보낸 10년은 어떻게 되는 거지? OMA에서 한 고생은? 교수님은 나를 여기까지 불러놓고 결국 최예린 시다를 하라는 건가? 원래 자기 사무실 직원 사기 올려주려고 이미 뽑을 생각을 했던 거고, 난 그냥 CG 다이어그램 뽑아내는 들러리 같은 존재로 부른 거 아냐? 별별 생각이 다 떠오르고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일단 사무실 밖으로 나가 생각을 좀 정리해야 될 것 같다.


*시다: 모형이나 기타 작업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후배 혹은 직원을 가리키는 말.


“수현아 나 좀 보자.”

박 교수가 정수현을 불러낸다. 아무래도 몇 마디라도 해서 정수현을 진정시키고 위로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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