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담과 방황

건축소설 COMPETITION #11

by 글쓰는 건축가

박교수와 정수현은 캔커피를 들고 근처 공원 벤치에 앉았다.

“수현아, 괜찮아?”

“아.. 괜찮..치가 않네요.. 솔직히.. 교수님, 정말 제 안이 예린이 것보다 못했나요?”

“음.. 회의 때 말했지만..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좋다기 보다 매력적이냐 아니냐의 문제라기보다는, 이 대지에 더 어울리고 사용자인 시민들이 좋아할 만한 안이 맞다고 생각하다보니.. 그렇게 됐네. 물론 수현이 대안도 정말 좋았어. 누차 말했지만, 그냥 예린이 안이 내 성향에 더 맞았던 것 뿐이야.”

“.. 이건 교수님께 드릴 말씀은 아닌데.. 사무실 직원이라고 특별히 예린이를 밀어주시고 그런 건 아니시죠?”


박교수의 얼굴이 굳어진다.

“...수현이가 날 그렇게 생각했다면 정말 실망인데. 회의 과정을 다 봤겠지만 사무실 전체 인원이 자유롭게 각자의 의견을 표시했던 거고 나는 한 표를 행사한 것에 불과해. 결과적으로 내가 결정한 것이 되어버렸지만. 우리 사무실 사람들끼리 서로 챙겨준 게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할 말은 없어. 하지만 난 최소한 우리 사무실 사람들이 그 정도 수준으로, 그 정도 자세로 건축을 대하고 있지는 않다고 생각해.”

“..교수님 말씀을 믿고 싶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가슴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제가 너무 속이 좁은 것 같네요.”


“미국에서 10년 동안 고생하다 온 니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가기는 하는데.. 건축설계라는 건 기본적으로 팀 작업이야. 니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도 너 혼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다 같이 의견을 맞춰서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야 해. 수현이 이 정도 소양은 갖추고 있을 줄 알았는데..”

물론 정수현도 학교와 회사에서 수없이 많은 팀 작업을 해봤으니 그런 원론적인 것은 잘 알고 있다. 다만 미국에서 10년을 갈고 닦아온 자신이 여기까지 와서 남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다.

“....”

“뭐, 마감까지 시간 좀 있으니까. 하루 이틀 생각 좀 해봐. 정히 우리 결정이 마음에 안내키면, 더 이상 사무실에 안 나와도 돼. 우리 인원만으로 어떻게든 마무리 해볼테니까.”

“... 알겠습니다.”


저녁 회식을 마치고 최예린이 정수현을 붙잡는다.

“수현아, 괜찮아? 밥 먹는 내내 아무 말도 없고. 내일부터 열심히 달려야 되는데 기분 풀어.”

“.. 예린아, 나 솔직히 이 현상 계속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어찌해야 할지..”

“뭐라구? 수현아, 왜 그래. 너 없이 마감 어떻게 하라구.”

“음.. 일단 내일 보자. 나 먼저 들어갈게.”

“...”


다음날 아침, 다른 팀원들은 모두 출근했는데 10시가 넘도록 정수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어? 수현이 안와? 이 자식 왜 이러지? 이렇게 쪼잔한 놈이었나... 현상설계에 니꺼 내꺼가 어디 있어? 다른 사람 안도 같이 발전시키면 우리 안이 되는 거지.. 종민아, 수현이한테 전화 해봤어?”

“예.. 두 세 번 해봤는데 계속 안 받네요.”

“아, 이거 어쩌지. 다른 일이 있는 건 아니겠지.. 점심 먹고 다시 해봐.”

최예린은 정수현이 걱정스럽다. 학생 때부터 워낙 자존심으로 살아온 데다, 미국에서 이방인으로서 10년을 오기로 버티다보니 그런 성향이 더욱 강해졌다. 설계로 다른 사람에게 질 수 없다, 내가 최고여야 한다는 강박이 더욱 심해진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아무도 자신을 알아봐주지 않는는 생각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고..


“전화기가 꺼져있어..”

정수현은 최예린의 전화도 받지 않는다.

‘아.. 어떡하지. 안되겠다. 나라도 나서서 달래야겠어. 받을 때까지 계속 걸어봐야지.’


“야, 최예린. 도대체 전화를 몇 번째 거는 거야? 부재중을 20번이나 남기면 어떡해?”

오후 늦게 드디어 정수현이 전화를 받았다. 사실 최예린이 아니었다면 아마 끝까지 안 받았을 것이다.

“걱정되니까 그렇지. 도대체 어디 있어? 집이야?”

“몰라도 돼.”

“몰라도 되긴. 사무실 안 나와? 마감해야지.”

“에휴.. 내가 속이 좀 좁아서. 머리 좀 식히러 나왔다. 일단 끊을게. 미안하다..”

“어? 수현아?”


전화가 끊어졌다. 최예린은 책상 앞에서 한참을 생각하다가 짐을 챙겨서 일어난다.

“어? 차장님 어디 가세요?”

“정수현 데리고 오려구.”

“수현이 형이랑 통화하신 거에요? 어디 있대요 지금?”

“말은 안하는데.. 대충 짚이는 데가 있어서. 일단 가 보려구.”


여기는 한강 고수부지. 한 벤치에 정수현이 혼자 앉아있다. 학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다. 정수현이 설계를 하다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이따금 조금 멀리 나와서 머리를 식히던 장소다.

‘..그래. 최예린 안이 좋긴 했지. 일반인들한테 잘 먹힐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내 안이 건축가 심사위원들한테 잘 먹힐 안인데. 정말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말야. 교수님도 자기 사람 챙긴다거나 그런 사람은 아니잖아. 사심 없이 최예린 걸 밀만도 해. 아무리 그래도.. 하.. 이 경력에, 이 스펙에 다른 사람이 그린 걸 모델링 하고 다이어그램이나 그려야 한다니.. 그건 도저히..’

정수현은 혼자 끙끙대며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 정수현. 진짜 여기 있었네.”

이게 누구야. 최예린이 깜짝 놀란 정수현에게 다가온다.


“어? 너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당황한 정수현이 말을 더듬거린다.

“글세.. 니가 예전에 설계가 안되면 여기 나오곤 했잖아. 나도 마지 못해 같이 나온 적도 몇 번 있고.”

“너 내가 여기 없으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나온 거야?”

“음.. 그럼 또 전화했겠지 뭐. 근데 주변에 사람들 소리도 들리고.. 그냥 여기 있을 것 같았어. 큰 생각 안하고 그냥 와 본거야.”

최예린이 정수현 옆에 털썩 앉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나란히 앉아서 말없이 한강물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최예린이 말을 꺼낸다.

"야, 정수현. 이렇게 대책 없이 째버리면 어떡해? 니가 대학교 1,2학년인줄 알아?“

“으.. 니가 내 입장이라고 생각해봐. 미국에서 10년이나 일하고 왔다는 놈이 디자인 선정도 안되고.. 남의 뒤치다꺼리나 해야 한다니..”

“하.. 참나 원. 그게 뭐 어때서? 그럼 내가 너 뒤치다꺼리 하는 건 맞는 거야? 그리고 일하는데 뒤치다꺼리가 어딨어? 다 같이 도와서 하는 거지.”

“그건 아니지만..”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에휴. 너 자존심 센 거야 진작에 알고 있지만.. 너 잘하는 건 다들 잘 알아. 니 안이 나쁘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번엔.. 다른 안으로 가는 게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좀 낫겠다는 거잖아. 넌 가끔은 좀 겸손할 필요가 있어.. 세상에서 너만 잘하는 게 아니잖아.”


“뭐랄까.. 난 여기 사무실 직원이 아니잖아. 내가 다른 현상이나 기회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생각 안할지도 몰라. 다음엔 내가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하지만 난 여기 직원이 아니니까 다음이란 게 없잖아. 그러니까 더 집착 하는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그럴 리가 없겠지만, 사무실 사람들끼리 서로 챙기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자꾸 들어. 교수님도 그런 식으로 바라보게 되고..“


한참동안 정수현의 푸념을 듣고 있던 최예린이 말한다.

“수현아, 너 나랑 옛날에 *건축문화 했던 거 기억나? 엄청 싸우면서 했었잖아.”

“아.. 기억난다. 4학년 땐가.. 우수상인가 받았잖아.”


* 건축문화공모전: 학생공모전의 일종. 건축대전과 함께 가장 큰 공모전으로 꼽힌다.


“그래. 너 그거 하다가 나랑 마감 4일전인가? 진짜 대판 싸웠잖아.”

“그랬지.. 지금 생각하면 진짜 별거 아닌데.. 데크(건물을 구성하는 옥외의 판과 같은 요소. 휴식공간 등으로 활용된다) 레벨(높이) 어떻게 할 건지 때문에 그랬던 거 같은데..”

“내가 그때 너한테 완전 질려가지고 그냥 작업실 나가버렸잖아. 그날 안들어오고.”

“맞아. 그때 진짜 난감했었는데.. 모형은 한참 남았는데 최예린 없으면 만들 사람이 없고..”

“근데 다음날 아침에 그냥 돌아왔어. 아무 말도 안하고. 왜 그랬는줄 알아?”

“난 그냥 화가 풀려서 온 줄 알았지.. 시간도 없고 하니까.”

“에휴. 내가 니가 예뻐서 온 줄 알아? 시다(일을 도와주는 후배나 직원을 이르는 일본어) 뛰어 주는 후배들 때문에 온거야.”

“...”

“만약에 우리가 싸워서 이 공모전 못 내면. 일주일 넘게 도와준 후배들은 뭐가 돼? 황금 같은 방학 때 선배들 돕겠다고 며칠을 작업실 나와서 나무(모형재료) 자른 애들은 뭐가 되냐고. 걔들한테 할 말이 없잖아. 비록 상은 못 타더라도 최소한 제출은 해야 할 거 아냐. 그래서 온 거였어.”

“...”

“수현아. 이건 너 혼자 하는 공모전이 아니야. 너 혼자 하면.. 아니 나랑 둘이 해도 싸우면 그만하거나 해도 돼. 하지만 이건 여러 사람이 하는 거야. 종민이, 수경이, 경호.. 이런 애들 아무 말 없이 우리 도와주고 있잖아.

내 안으로.. 아니다. 나부터 내 안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되겠다. 회의에서 결정된 안으로 간다고 해서 걔들이 솔직히 이 디자인에 관여한 거 하나도 없어. 그런데도 저렇게 열심히 돕고 있잖아. 그건 ‘우리 안’이기 때문이야. 애들 뿐만 아니야. 오늘부터 강소장님이랑 김과장님도 도면 도와주고 계셔. 그분들도 마찬가지야. 디자인에 크게 관여하지 않으셨지만 ‘우리 안’이기 때문에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주고 계신거야. 그 분들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넌 최소한 공모전 팀으로서 나랑 토론하면서 많이 관여했잖아. 내가 니 의견 듣고 고친 것도 많고.”

“...”

“그리고 교수님. 너 믿고 불러주신 교수님은 뭐가 돼?

현상 전에 ‘내 제자 정수현이라고 있다, 진짜 잘하는 애니까 믿고 불러도 된다’ 이런 말씀 다 하셨는데.. 자리 내 주시고 월급 주시고.. 근데 여기서 니가 째버리면. 사무실에서 교수님은 뭐가 되지? ‘미안하다. 수현이 그만하고 싶댄다. 우리끼리 마무리해야겠다..’ 이런 말씀 하셔야 될텐데.. 교수님이 무슨 죄로 그런 말씀을 하셔야 되지?”


정수현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수현아. 난 그래도 널 믿어. 오늘은 다 지나갔으니까 됐고. 내일부터 다 잊고 열심히 해 보자. 알았지? 수현아, 나 너 믿고 간다.”

말이 없는 정수현을 두고 최예린이 일어선다. 멀어지는 최예린을 보고 정수현은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 아침. 정수현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걸 본 최예린이 아무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야, 정수현. 어제 갑자기 왜 안왔어? 몸이 안좋아?”

“아.. 죄송합니다. 좀 그냥 컨디션이.. 오늘부터 열심히 하겠습니다.”

“형 괜찮아요? 우리 형 없으면 마감 못해요~”

“그래 종민아. 미안하다. 오늘부터 풀 파워로 달려봐야지.”


최예린이 정수현에게 몰래 문자를 보냈다.

‘수현아. 오늘부터 잘 해보자. 또 그러면 진짜 혼나~ 파이팅^^’


문자를 보고 정수현은 생각했다. 그래.. 내가 너무 유치하고 속이 좁았구나. 교수님에게도 죄송하다고 따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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