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의 나는 용감하지 못하다
9p 우리는 맨덜리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이고 나도 꿈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을 것이다. 맨덜리는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맨덜리는 이제 없다.
이 책을 읽기 전엔 레베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지만, 읽고 난 후 주인공은 ‘나‘라고 생각한다. 제목도 ‘맨덜리 대저택‘ 또는 '사라진 맨덜리 대저택'이라고 해도 무방 할 것이다. 맨덜리는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레베카 역시 내내 살아있는 상태로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레베카는 책 중반에 이르기까지 '나'를 능가하는 미모와 카리스마로 '나'를 움츠리게 만들고 초라하게 만든다.
책 중반이 넘어가면서 레베카를 죽인 범인이 남편 맥심이 아닐까 했지만 역시나 그였다. 레베카를 죽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할 때는 좀 껄끄럽다. 레베카가 그렇다고 해서 남편에 의해 죽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게다가 레베카가 그런 인성을 가졌음에도 댄버스 부인이 그녀를 우상으로 여기고 맹목적인 충성을 다할 만큼의 대단한 여자로 그려지고 또 남편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역으로 그려진 것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이 만족스럽다. 1938년에 쓰인 책임에도 ‘나‘의 생각의 전개가 만족스럽고 노트에 적고 곱씹고 감상하고 싶은 공감 가는 문장이 많았다. 대프니같이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돈을 받고 맨 호퍼 부인의 허드 레일을 도와주는 동반자 역할의 초라하고 애송이 같은 ‘나‘에게서 이십 대 초반의 서투르고 용기 없고 두렵기만 했던 나를 떠올렸다.
우리는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과거는 아직도 너무나 가깝다. 뒤로 밀쳐놓고 잊어버리려 했던 것들이 다시 떠오른다. 두려움, 근거 없는 공포를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쓰면서 느끼는 내밀한 불안감 같은 것이 어느새 삶의 동반자가 되었다. - 10p -
첫사랑의 열병이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는 점은 참 다행이다. 시인들이 어떻게 찬양하든 그건 분명 열병이고 고통이기 때문이다. 스물한 살의 나이는 용감하지 못하다. 겁이 많고 근거 없는 두려움도 많다. 쉽게 까지고 상처를 입어 가시 돋친 말 한마디를 견디지 못한다. 중년을 바라보면서 탄탄한 갑옷을 입은 지금에야 가시에 찔린 사소한 상처 같은 것을 가볍게 넘기고 곧 잊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남이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 오래도록 남아 고통스러운 낙인이 되고 어깨너머 뒤돌아 본 눈길 하나가 영원히 기억에 꽂히고 마는 것이다. - 56p
그 시절은 용기가 없고 무엇이든 두렵다. 우연히 뒤돌아본 타인의 시선이 오래도록 기억에 꽂히고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쉽게 상처 받는다. 사람들의 말 그 모든 것이 가시가 되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진다. 어쩌면 이십 대 그 서투른 날들이 얼른 지나가고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그 어떤 일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버리는 중년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그 시절의 '나'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103p: 나도 함께 미소 짓고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는 한참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그런 날이 어서 왔으면, 나이를 먹고 머리가 하얗게 세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그런 날이 되었으면, 그래서 지금처럼 스스로를 잔뜩 겁에 질린 바보 같은 존재로만 여기지 않게 되었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꿔봤을 대저택의 안주인, 하지만 낯선 시선과 새로운 환경 앞에서 서투르고 초라하기만 하는 ‘나‘‘. 살아있어도 화려하고 강했던 죽은 ‘레베카‘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며 용기를 잃고 맥심의 사랑을 갈구한 ‘나‘. 맥심의 살인의 고백을 듣고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며 그와 비밀을 공유한 '나'. 스물네 시간 만에 완전히 성숙한 어른이 되어버린 ‘나‘.
466p: 레베카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 내가 그걸 없애버린 셈이지.. 겨우 스물네 시간 만에 당신은 완전히 어른이 되어버린 거요...
15p: 달콤한 시럽이 뚝뚝 듣는 핫케이크가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바삭한 토스트, 갓 구워내 뜨거운 스콘, 속에 뭘 넣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맛이 좋았던 샌드위치, 그리고 아주 특별했던 생강 빵도 떠오른다. 입에서 녹아버리는 카스텔라, 과일 사탕 절임과 건포도가 터질 듯 가득 든 빵도 생각난다.
행복한 회상에 젖어든 현재의 '나'는 얼핏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순진한 여성이 돈 많은 대 저택의 소유주 맥심을 만나 결혼한 신데렐라 이야기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고 사고사로만 알고 있었던 전처를 죽인 범인이 자신이라는 걸 털어놓을 테까지 미스터리 추리물을 보는 것 같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책 내내 전개되는 '나'의 끊임없는 생각과 감정이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고 안락하고 부유하고 풍요로운 아름다운 맨덜리 대 저택의 행복한 날들을 기대하며 그 맛있는 음식들과 분위기에 대한 묘사 하나하나가 바로 맨덜리 대 저택 내부를 속속들이 돌아다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당장 이층에서 뛰어내려 자살하게끔 재촉하는 악마와 같은 댄버스 부인과 '나'와의 갈등 그 모든 게 생생각게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결국 악마는 맨덜리 대 저택을 불 지르고 사라진다.
17p 댄버스 부인 같은 이들에게 내가 그토록 나쁜 인상을 남기게 된 것은 분명 내 미숙한 몸가짐 때문이었으리라. 레베카의 뒤를 이은 내가 그들에게 어떻게 보여야만 했을까?
악마도 떠나고 맨덜리도 없어져 버렸다. 남은 '나'와 맥심은 맨덜리에서 멀리 떨어진 따분하고 작은 호텔에서 형편없는 음식을 먹고 지루함으로 두려움을 이기며 살아가고 있다. 매일 밤 꿈속에서 그녀는 맨덜리 대 저택을 찾아가고 맥심은 '나'보다 더 맨덜리에 대한 기억을 자주 떠올릴 것이다.
5p 지난밤 다시 맨덜리로 가는 꿈을 꾸었다. 저택으로 이어지는 길 입구의 철문 앞에 섰지만 굳게 닫힌 탓에 들어갈 수 없었다. 철문에는 쇠사슬이 가로 걸리고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문지기를 소리쳐 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